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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4월 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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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5주일 -

 

 

2022년 4월 3일 사순 제5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새 일을 시작하려 하시며,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리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온 이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시고는 그 여자를 단죄하지 않고 보내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4월 3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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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이사 43장 16-21절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나의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리라.

 

16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시고 거센 물 속에 큰길을 내신 분, 

17 
병거와 병마, 군대와 용사들을 함께 나오게 하신 분. 그들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꺼져 가는 심지처럼 사그라졌다. 

18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20 
들짐승들과 승냥이와 타조들도 나를 공경하리니 내가 선택한 나의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는 샘을 내고 사막에는 강을 내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필리 3장 8-14절

 

그리스도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10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11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이미 그것을 차지하였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14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8장 1-11절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 고난에 동참하여 부활에 이르도록 합시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힘껏 달려갑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으니 언제나 그리스도의 지체로 머무르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장경진 스테파노 신부 집전

 

 

2022년 4월 3일 (일)
장경진 스테파노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4월 3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구약의 율법에는 이웃의 남편 또는 아내와 간음한 자는 죽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레위 20,10; 신명 22,22-24 참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왜 이 규정을 주셨을까요?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거룩함 속에 머무르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레위 11,45; 20,26 참조).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규정을 근거로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려 합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고 받아치십니다. 그러자 단죄하던 자들은 하나둘 떠나갑니다. 타인에게 적용하는 단죄의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아무도 하느님과 이웃 앞에 죄인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이웃을 평가하려는 잣대를 날카롭게 ‘연마’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냅니까? 그렇게 마련한 잣대를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하며 내면화하고 있습니까? 율법의 본정신인 거룩함은 어쩌면 이웃을 향한 잣대에 집중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것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디로 갈까?

 

오늘 복음에서 죄 지은 여자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서 구해주시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것의 뜻을 우리는 오늘 생각게 됩니다. 가라는 것은 늘 어딘가 목적지를 품고 있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여인에게 가라는 곳은 어디입니까? 여인이 살던 집입니까? 

집으로 돌아가라는 뜻도 될 수 있겠지만 오늘 독서의 말씀들을 보면 집이라기보다는 앞을 향하여 또는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가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사야서와 필리비서 모두 이렇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기도 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저 산다고 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 말처럼 우리는 모두 예외없이 살며 어디론가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외없이 모두 살며 어디론가 가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것을 알고 사는 사람과 모르고 사는 사람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는 마치 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배 위에서 매일 먹고 자고 일하며 사는데 먹는 동안에도 가고, 자는 동안에도 가며, 일하는 동안에도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딘가로 가는데 뒤 곧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앞 곧 미래를 향해 가라는 것이 오늘 사순 제5주일의 가르침이고 그 과거가 죄스런 과거라면 더더욱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는 말은 단지 과거의 죄를 끝내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끝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움을 끝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의 삶을 끝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은총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바꿔 얘기하면 끝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미움을 끝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죄의 삶을 끝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은총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죄지은 여인을 죽이는 것으로 끝장내려고 합니다. 

그렇지요. 그녀를 죽이면 죄의 행위도 끝장나기는 합니다. 살인마를 죽이면 살인마의 계속되는 살인도 끝납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죄인을 죽이는 것으로 죄를 끝장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맹세하노니, 죄인이 죽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노라."는 성무일도 육시경 말씀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살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다고 오늘 선언하시는데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시편 말씀처럼 우리는 사는 새로운 길에 동참하는 것으로 오늘 응답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괜찮다, 다 괜찮다.

 

참으로 은혜롭고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요한 복음에 등장합니다. 이른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 앞으로 끌려온 여인의 스토리’(요한 복음 8장 1~11절)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반응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8,1)

이 부분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체 예수님께서 그 절박한 순간에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요? 수많은 성경학자들과 교부들이 여기에 대해서 연구하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셨습니다.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쓰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적대자들에게 건네고 싶은 성경 구절을 쓰셨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는 ‘악한 고발자들의 죄목’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닥에 쓰신 내용에 대해서는 귀신도 모른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도 모르신다는 것, 오직 예수님 자신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렵고 곤란한 질문을 받을 경우, 즉답을 피하고 싶을 때, 말없이 땅에 무엇인가 쓰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런 행동을 취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촌각의 순간, 하느님 아버지께 지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적대자들을 향해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셨습니다. 단단한 방어막도 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 가만히 계셨습니다. 이어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뭔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작전명은 ‘김빼기 작전’이었습니다.

적대자들 입장에서 이번 먹잇감을 가운데 두고 예수님과 언성 높여 대판 한번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짠 ‘예수 고발과 체포’작전이 팍팍 진척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시며 깡그리 그들을 무시해버리셨습니다.

갑자기 김이 빠질 데로 다 빠져버린 적대자들은 엄청난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위기관리능력이 참으로 뛰어난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어서 맥 빠지고 허탈해진 적대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결정타 한방을 더 날리십니다.짧은 한 마디 말씀은 이 세상 그 어떤 현자, 솔로몬 할아버지도 내놓을 수 없는 불멸의 명언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그 말씀 끝에 사람들은 하나하나 떠나가고, 결국 텅 빈 성전 마당에는 예수님과 그 여자 단 둘만 남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그 순간에 대해서 아주 아름다운 주석 하나를 남기셨습니다.

“모두가 다 빠져나가고 오직 둘만 남았습니다. 우리 인간을 대표하는‘비참한 여인’과 ‘하느님의 자비’ 둘만 남았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이 어처구니없는 사랑,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 기막힌 사랑으로 인해 여인은 눈보다 더 깨끗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이런 여자의 상태를 가리켜 교회 전승은 ‘순결한 창녀’라고 했습니다. 순결한 창녀,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언인가 쓰셨다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는데 사실 땅바닥은 여인의 가슴이었습니다. 그 땅바닥은 죄와 타락과 방황으로 얼룩진 여인의 마음이자 우리 각자의 마음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 마음 하나하나에 당신 손가락이 아프도록 꾹꾹 눌러 또 다른 한 말씀을 새겨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들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딸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죄가 많다할지라도, 너희들이 아무리 몹쓸 짓을 했다 할지라도, 괜찮다, 다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착해서 휘둘리는 걸까?

 

오늘 복음은 간음한 여인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부터 구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볼 것 없이 돌로 쳐 죽이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적으로 여기는 이들은 예수님께 이 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십니다. 손가락으로 땅에다 무언가 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상황을 종료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실 때 항상 ‘은총과 진리’를 이용하십니다. 은총은 피요, 진리는 말씀입니다. 벳자타 연못의 병자를 고쳐주실 때도 은총의 힘으로 치유해 주시고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으로 새로 나게 하십니다. 

그러니 여기서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시는 행동은 분명 은총을 주시는 행동입니다. 은총의 힘으로 무언가가 땅에 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드러나게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른 복음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누군가의 마음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려면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언가 쓰시는 것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기 위한 사전작업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심장이 칼에 꿰찔림으로써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이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행동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들 행동에 대해 책임이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각자의 책임은 각자가 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책임을 나누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자신들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요한 8,9)

다은과 순만은 매우 각별한 부녀지간이에요. 순만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애지중지하며 키우고, 엄마는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둘이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죠. 순만은 다은을 키우기 위해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하며 딸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이제 다은은 기자 지망생으로 취직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도중 영화를 하나 보게 됩니다. 15년 전, 유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영화인데요. 이 영화 속에서는 실제 범인의 음성을 마지막 장면에 추가하여 관객들에게 범인 잡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음성 속 목소리가 매우 익숙한 목소리임을 눈치 챈 다은. 그리고 범인의 말이 자신의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자기에게 습관처럼 했던 말임을 기억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다은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음성을 듣고, 듣고 또 듣고.. .수 차례 의심을 반복하다가 남자친구를 통해 아버지의 신원조사를 부탁해요. 그러다 자신의 아버지가 전과 3범이며 돌아가신 줄 알고 살았던 어머니는 요양 병원에 의식을 잃은 채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15년 전 유괴사건은 공소시효가 얼마 안 남았었던 상태였어요. 그렇기 때문에 영화로 이슈를 만든거고,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지며 경찰은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범인을 잡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죠. 다은의 신원조사 요구로 순만의 인적사항과 과거 행적들이 꼬리를 잡히게 되고 경찰쪽에서도 순만을 의심합니다. 
순만의 집으로 유괴사건 피해자 아동의 부모님이 경찰들과 함께 오게되고, 순만의 목소리를 듣고는 기겁을 하며 순만을 내려칩니다. 그렇게 공소시효 2일인가 3일을 앞두고 쓰러진 순만은 의식을 잃게 되는데요. 이 때, 다은은 순만의 쪽지와 필적이 담긴 것들은 모두 싹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찾아오기 전 다은은 기자를 사칭하며 피해자 부모님에게 가서 유괴사건 당시에 범인에게 받은 쪽지를 건네받았었는데요. 그 쪽지를 보고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했던 받아쓰기 기억이 생각나며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아버지가 다은에게 시킨 받아쓰기는 피해자에게 지령을 내리기 위한 쪽지였던 것이죠.

다은은 차라리 아버지가 깨어나질 않길 바라며, 집 안에 있던 모든 증거는 없애버립니다. 다은도 공범이 되어버린 것이죠. 어릴 적 자신이 원하던 원치 않았던 되었던 공범과 현재 성인이 된 지금 스스로 공범이 되었습니다. 수사에도 협조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순만은 깨어나게 되고 목소리 검증을 하는데, 목소리 불일치로 순만은 풀려납니다. 

순만은 풀려났지만, 다은은 아버지를 향한 의심이 확신이 되어 다시 물어봅니다. 왜 그랬냐고, 왜 어린 나에게 받아쓰기를 시켜서 공범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공범으로 만드냐고 이야기하는데요. 순만은 자신은 아니라며 내 말을 믿으라고 애원합니다. 

함께 트럭을 타고 가던 중, 공소시효가 끝난 12시 정각이 되자 순만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라고 했지..?" 자신을 옥죄여오던 15년의 공소시효가 풀리자마자 순만은 변하는데요. 다은은 트럭에서 내려서 같이 죽자며 왜 그랬냐고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그 뒤에 이들을 따라 오고 있던 유괴사건 피해자 아동의 아버지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트럭을 받아버리고, 피해자 아버지와 순만은 사망합니다. 

다은은 충격으로 튕겨져나가며 목숨은 구했으나 매우 심각한 중태에 빠지는데요. 마지막 씬에서는 다은의 엄마가 나오며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어릴 적, 자신의 아이는 유산이 됐고 순만은 산부인과에서 다른 신생아를 납치하게 됩니다. 그게 다은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엄마의 동생(삼촌)은 순만에게 끊임없이 다은을 미끼로 돈을 요구하는데요. 순만은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또 다른 아이를 납치하고 죽이게 되죠. (유괴사건 피해자) 결국 다은은 납치 된 아이었으며, 범죄가 또 다른 범죄를 낳은 이야기였습니다. 입원실의 다은의 이름은 윤미선으로 바뀌게 되며 이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하느님 자녀를 유괴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범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을 안다면 나 스스로라도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그 사람도 하느님과 함께 단둘이 자기 일을 해결하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휘둘릴 때 나도 피해자가 아닌 공범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휘두르는 사람들은 타인의 자유를 빼앗는 범죄에 나를 가담시켜 공범으로 만다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의 죄를 아담과 공유하고자 아담에게 선악과를 내미는 순간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담은 그때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요? 선악과를 권할 때 땅에다 무언가 쓰는 시간을 가졌어야 합니다. 아무리 부부지만 네 인생은 네 것이고 내 인생은 내 것입니다. 내가 비록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는 쓸모 없어 보이는 일을 할지라도 그것을 멈출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침묵하며 당신이 나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다음엔 선악과를 먹으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의 자유입니다. 죄이지만 그 책임은 온통 자신이 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이 하와에게 휘둘리지 않고 완전히 독립적일 수 있었다면 하와도 하나만 먹고 말았을 것입니다. 죄책감은 공유할수록 작아지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지면서 끝까지 그런 행위를 고집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아담이 이렇게 했다면 아담이 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착한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오히려 휘둘리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알려줄 뿐이지 그 사람의 자유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행동을 일관되게 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사람이 자신의 자유도 존중받으려 합니다. 그래서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카톡을 하루에 한두 번만 봅니다. 아침에 카톡을 한 사람은 밤에 답장받을 수도 있습니다. 기분이 나쁠 수 있지만 제가 그때그때 카톡에 답장한다면 정신없어서 아무 일도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 좀 기분 나빠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남의 자유는 아무리 친해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가 휘둘리고 있다면 어쩌면 나도 휘두르는 사람이어서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혼자 남겨져도 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느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으로부터 다 버려져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된다는 생각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야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하려고 하는데 해도 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다 하라고 합니다. 다만 그 책임은 나에게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해서 하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나의 권고와 그 사람의 행위는 완전히 별개입니다. 그 사람이 선택하고 책임도 그 사람이 지게 합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지옥 갈 수도 있다고. 대부분 잘 알아듣습니다.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고 그런 사람을 바꾸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 두 과정을 거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정말 훌륭한 상담가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을 꾸짖는다면 그것 역시 그 사람에게 휘둘리는 것입니다. 일단 자신을 돌아보도록 내가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도 그 사람에게 자유를 주니 책임 있는 행동을 잘 생각해서 하도록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자신 행동에 대한 책임을 혼자 지지는 못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신부님은 정말로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어떤 자매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솔직히 저 자신은 스스로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게으르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귀찮고 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지런한 사람’으로 평가하십니다. 좋은 의미로 말씀하셨기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지만, 분명 저를 완전히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유령으로 만들곤 합니다. 즉, 상대를 판단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이야기하며 세상에서 제일가는 악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족함으로 인해 100%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판단에 앞서 다시금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유령 만들기’를 하는 것이 아닌지를 말입니다. 
 
개인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본다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다면, 주님 역시 유령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간음한 여자 한 사람을 잡아다가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서 판단을 재촉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약혼녀가 혼전 정사를 다른 남자와 범했을 경우 친정의 동네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라고 했고, 창녀는 군중이 돌로 치고 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유다인의 사법기관이라 할 수 있는 최고의회는 로마제국의 통치 밑에 있으면서 그들 자신이 직접 누구를 사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치는 사형에 처하라고 하면 로마 행정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반대로 풀어 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멋진 말씀을 하시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율법에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기 전에 적어도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증인이 없었지요. 또 실제로 간음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간음한 여자의 상대 남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곤란한 상황에 놓이도록 한 여자를 극한 상황으로 몰았던 것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께서도 단죄하지 않는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단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의 행복은 딱 한 가지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다.

- 조르주 상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아직껏 사랑을 모른다. 사랑이 없기에 용서도 없는 것이다. 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한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우시고 우리는 없는 죄까지 다시 창조한다. 우리가 마구 던진 돌이 다시 돌아와 우리의 오늘을 세차게 친다. 끝내 쥐고 놓치 않는 판단의 돌이다. 

판단의 돌은 사랑의 힘을 막을 순 없다. 참된 사랑은 법조항에 결코 밟히지 않는다. 우리모두 하느님을 속일 수 없다. 우리자신이 바로 용서가 절박한 죄인들이다. 용서를 믿는 것이 복음이다. 죽음보다 앞선 판단의 돌을 이 사순에 내려놓게 하신다. 

심판의 돌을 내려놓으면 하늘 아래 서 있는 우리자신을 볼 수 있다. 죄인을 만나는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파렴치와 몰염치가 사라지면 우리자신 앞에는 예수님만 계신다. 예수님께서도 단죄하지 않으신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 바로 단죄라는 절망에서 나오는 길이다. 그래서 사순은 희망이 된다. 희망은 서로를 단죄하지 않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다시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가는 벅찬 기쁨의 시간이다. 

단죄의 돌 대신 진심어린 기도로 다시 시작하는 은총의 주일이다. 죄 없는 자는 없어도 기도할 사람은 나와 너 우리모두같이 너무 많다. 단죄가 아닌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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