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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2년 3월 31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2.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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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3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4주간 목요일 -

 

 

2022년 3월 31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모세의 애원을 들으시고,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희망을 걸어 온 모세가 그들을 고소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2년 3월 31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명동성당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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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탈출 32장 7-14절

 

주님,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 무렵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어서 내려가거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저들은 내가 명령한 길에서 빨리도 벗어나,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고서는, 그것에 절하고 제사 지내며,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 하고 말한다.” 


주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1 
그러자 모세가 주 그의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12 
어찌하여 이집트인들이,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치려고 이끌어 내서는, 산에서 죽여 땅에 하나도 남지 않게 해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시렵니까?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13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게 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14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백성들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금붙이로 만든 우상에 경배하였네. 풀을 뜯는 소의 형상과 그들의 영광을 맞바꾸었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이집트에서 위대한 일을 하신 분,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잊었네. 함족 땅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갈대 바다에서 이루신 두려운 일들을 잊었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당신이 뽑은 사람 모세가 아니라면, 그들을 없애 버리겠다 생각하셨네. 모세는 분노하시는 그분 앞을 막아서서, 파멸의 진노를 돌리려 하였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요한 5장 31-47절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성사의 힘으로 주님의 종들을 깨끗이 씻어 주시고 저희를 모든 죄의 사슬에서 풀어 주시어 구원의 영약을 가득히 받고 진리의 빛을 따라 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종욱 바오로 신부 집전

 

 

2022년 3월 31일 (목)
김종욱 바오로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31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성경의 중심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중심 내용은 어제 복음(요한 5,17-30 참조)에 이어서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변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증언하실 때 그 증언이 유효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시고, 당신의 정체를 확증할 수 있는 증언들을 제시하십니다. 

첫 번째,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5,33-35 참조). 그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1,6)으로, 장차 오실 분에 대하여 증언하였습니다(1,19-34; 3,27-30 참조). 

두 번째,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입니다(5,36 참조). 이 일들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어 행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입니다(5,37 참조). 그분께서 직접 당신 아들을 위하여 증언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증언입니다(5,39 참조). 성경은 신적 기원을 지니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에 관한 다양한 증언을 알려 주셨지만,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원천이시고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5,40.43 참조). 유다인들의 이러한 배척은 불신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안에 하느님 말씀이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다고 지적하십니다(5,38.42 참조).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나누는 영광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5,44 참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셨고, 인간의 역사 속에서 그분을 알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이 완고하여 우리 자신만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주며,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분을 받아들이고 구원자로 고백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살리는 일

 

오늘 주님께서 유다인들에 대해 하시는 말씀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너희는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의 반복입니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신을 증언하는 것이 많은데도 그 증언들을 모두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모든 것을 유다인들이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것이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래서 하지 않지요. 

믿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좋다고 믿는 것과 나쁘다고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나쁘다고 믿는 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믿음을 나쁜 믿음이라고 하고 불신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신을 할 때 그와 관련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통 믿는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이 좋다고 믿는 것이고 이렇게 좋다고 믿을 때 그에게 문을 열어주고 그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무엇이든 하게 되겠지요. 

예를 들어 저를 믿을 때 저의 증언을 받아들여 제가 전하는 하느님도 믿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세례자 요한을 믿으면 그의 증언을 받아들여 그가 증언하는 주님을 믿고 받아들일 텐데 유다인들이 그와 그의 증언도 믿지 않기에 주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시는 그렇지만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서는 믿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믿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서 믿으라는 말을 요한 복음은 오늘 말고도 10장에서도 얘기하고 14장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다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제도 얘기했듯이 살리는 일입니다. 안식일을 어기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입니다. 

살리는 일만 아니라면 주님께서 안식일을 어길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일을 한다고 비판하는 자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고 물으심으로써 단칼에 그들의 비판을 제압해버리셨지요. 

살리는 일은 좋은 일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뿐 아니라 우리도 이 살리는 일을 하면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남을 살리지 않거나 죽이는 일을 하면 그것은 악마적인 일이고 그 안에 하느님이 안 계시며, 그도 하느님 안에 있지 않고 아마 악마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우리가 함에 있어서 인간은 물론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도 제외돼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생태적 회심의 7년 여정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죽이는 모든 짓을 그만두고 살리는 일에 모두 동참해야 합니다. 

이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조만간 말씀드릴 계획인데 그때 여러분이 많이 동참해주시길 바라며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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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 안에 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사랑의 시작인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증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신이 자신을 증언하는 것은 유효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자기주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세례자 요한’을 내세우십니다. 그는 빛 자체는 아니지만, 빛을 증언하는 인물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자기 일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여러 기적과 목소리를 통해 아드님을 증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예로 드십니다. 모세의 성경이 다 당신에 대한 증언이라 하십니다. 

이렇게 여러 증언을 내세우시는 이유는 그런 것들로 믿으라는 말씀이 아니십니다. 그런 많은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섬기기로 한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오시는 그분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요한 5,44)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이 겪게 되는 현상이 있는데 ‘인지부조화’입니다. 그냥 ‘고집’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중국의 그 많은 무술 고수들이 쉬샤오둥이라는 격투사에게 깨졌습니다. 쉬샤오둥은 중국 무술이 실전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고픈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고 나서도 바닥이 미끄러웠다느니, 쉬샤오둥이 다칠까 봐 일부로 봐주었다느니, 아침을 잘못 먹어 설사해서 그렇다는 이유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분명 모든 증거가 중국 전통무술의 실전성 부재를 말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도 느끼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전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누군가를 믿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믿는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에게 영광을 주려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증거를 가져다 놓아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이라 가르쳐줘 굳게 믿고 따라왔는데 알고 보니 그 반대였음을 깨달으려면 열심히 자아를 믿고 달리다 넘어져 봐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 안에서 ‘유혹자’를 찾아내게 됩니다. 

김미경 강사가 4년 만에 ‘어쩌다 어른’에 출연하여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논문표절로 9시 뉴스에 나오기 전까지는 돈도 많이 벌고 자신의 이름을 딴 TV쇼를 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물론 그때도 정신병원에 가봐야 할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꿈을 좇으라고 젊은이들에게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망하고 나니까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자아가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녀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걸었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자신의 꿈의 노예가 되어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 안에는 제1존재, 제2존재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1존재는 태어날 때의 본래 나이고 제2존재는 자라면서 생겨나 꿈을 좇으라는 새로운 나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제2존재가 바로 나인 줄 알고 착각하고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신은 제1존재였습니다. 성공하지 못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냥 밥 먹고 자기만 해도 행복한 나가 꿈을 좇으라는 제2존재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냐의 마지막 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제1존재로 살다가 또 기회가 오면 제2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제2존재, 곧 우리가 에고(ego)라고 부르는 이 존재의 본성을 아직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전보다는 아니겠지만 또 세속-육신-마귀에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아를 섬길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자아에 집착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갤럭시가 좋냐, 아이폰이 좋냐의 문제와 같습니다. ‘확증편향’이 생깁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에 틀렸어도 돌아서지 않습니다. ‘인지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은 서로 근거를 놓고 싸우는 일이 아닌 이 분열의 근본 원인이 ‘자존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모든 싸움의 원인이 ‘자아’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니 모든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압데라는 어리석고 고루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슈트루치온이라는 치과의사는 이웃 마을 게라니아에 왕진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간밤에 암당나귀가 새끼를 낳아서 자기 당나귀를 포기하고, 당나귀 몰이꾼인 안트락스의 당나귀를 돈을 주고 당나귀를 빌리고 같이 옆 마을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황무지를 지나다가 날씨가 매우 무더워서 잠시 당나귀를 세우고 당나귀 밑에 드리워진 그늘 속에 주저앉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당나귀 몰이꾼은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나귀를 빌린 것이지 그림자를 빌린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치과의사는 절대 줄 수 없다며 거절하고, 논쟁이 거듭되자 재판관에게 찾아갑니다. 

재판관은 중재를 시도합니다. 몰이꾼에게는 나귀의 그림자에서 쉴 수 있도록 허락하고 치과의사는 감사의 성의 표시만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둘은 동의합니다. 그러자 양쪽에 변호사가 붙습니다. 자신이 꼭 이기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자 둘은 갈 데까지 가보자고 합니다. 

치과의사는 자기편을 더 만들기 위해 수선공 조합의 조합장을 찾아갑니다. 조합장은 치과의사의 후원자가 되기로 합니다. 한편 비조합원인 몰이꾼은 신전의 사제에게 줄을 대고자 합니다. 도시에는 개구리를 섬기는 신전과 염소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당나귀 몰이꾼은 개구리를 모시는 신전의 사제에게 줄을 댑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치과의사는 염소를 섬기는 신전 쪽을 자신의 편으로 만듭니다. 

둘은 서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려고 고군분투하게 됩니다. 마침내 도시는 치과의사를 지지하는 ‘당나귀 그림자당’과 당나귀 몰이꾼을 지지하는 ‘당나귀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당나귀당은 개구리 신전에, 당나귀 그림자당은 염소 신전에 모여서 의지를 불살랐습니다.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입니다. 

재판은 합리적인 시선으로 볼 때 당나귀그림자당 쪽으로 전개되는 듯싶었습니다. 당나귀의 그림자까지 당나귀 몰이꾼의 소유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재판을 내려버린다면 두 파간의 갈등은 되돌이킬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이 모든 문제는 당나귀에게서 비롯되었으니 당나귀를 재판정에 증인으로 세웁시다”라고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러자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한 사람이 당나귀를 보더니, “이 모든 것이 저 당나귀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소리쳤고 사람들은 일제히 당나귀를 죽이고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참조: ‘인생의 방해꾼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지혜’, 유튜브 채널, ‘지혜롭다’] 

정말 이 마을에 전쟁이 일어날 뻔한 것은 당나귀 때문이었을까요? 당나귀는 그저 희생양일 뿐입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이 그 근본 원인입니다. 그들은 또 다른 당나귀를 찾아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것이고 다른 의견은 묵살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에덴동산의 뱀임을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싸우게 된 것은 선악과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뱀 때문이었습니다. 그 뱀을 모르면 그 싸움의 원인이 사라져도 다른 원인을 찾아 자기 영광을 추구할 것입니다. 자아를 뱀이라는 구체적인 상징으로 이해해야 더는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아를 믿는 일이 없습니다. 누가 뱀에게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내 집에 더는 살지 못하도록 죽이려 할 것입니다. 세계 평화로부터 내 마음의 평화까지, 이 모든 평화가 깨지는 근본 이유는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자아를 뱀으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이것만 알면 세상은 천국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잘못된 판단 멈추기

 

어느 유명 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 그렇게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특히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이 어느 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머리가 나빠서 졸업이나 할지 모르겠다.”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계속 머릿속에 간직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이 말을 마음에 새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답니다. 그러자 더 열심히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판단이 자신의 미래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 아주 유명한 강사가 되었습니다. 
 
종종 어렸을 때의 말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을 봅니다. 그 말로 인해 자신이 성장할 수 없었다면서 분노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새기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늘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말이면 담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나’였습니다. 다른 이의 판단이 100% 옳을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 안에서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다른 이의 판단에 무조건 동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자기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백성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뛰어난 학식이 있었고, 인품도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100% 틀렸습니다. 
 
율법서에는 어떤 사람을 죄인으로 고발하려면 적어도 한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일 경우에는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조항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고발할 때 적용될 조항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위 증언은 당신의 신성을 증명하는데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며,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굳이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사고방식을 따라 당신의 신성을 증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명을 세례자 요한, 예수님께서 행한 여러 가지 기적, 하늘에 계신 아버지 자신, 마지막으로 성경을 통해 증명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자기들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모습,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죄인으로 만들어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못된 판단은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판단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또 주님 뜻에 맞게 사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희망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두 함께 희망에서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 프란치스코 교황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요한 5,40)

 

봄꽃도 아름다운 꽃으로 가장 좋은 생명을 드러낸다. 진실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사랑과 생명은 하나이다. 참된 생명을 증언하시는 우리의 예수님이시다. 진실로 믿지 않으며 진실로 사랑하지도 않는 우리들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우리들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을 토해내신다. 하느님을 떠난 이들은 생명의 삶과 점점 멀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신 당신의 삶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신다. 삶의 마지막은 모두 하느님을 증언한다. 

세상 모든 것들은 다 하느님께로 귀결된다. 마지막 우리들 삶에 필요한 것은 빛이며 구원뿐이다. 하느님 말씀을 밟고 지나가는 우리들 여정이다.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을 향한 참된 증언이며 참된 진리이며 참된 빛이며 참된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이며 참된 영광이며 참된 희망이다. 참된 믿음 참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희망의 새날이다. 

믿음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모든 여정이다. 믿음의 힘으로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알게된다. 진실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은총의 사순이다. 이 희망의 이름을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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