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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4주일 -
2022년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그 땅의 소출을 먹습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라며,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권고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고 돌아온 아들을 따뜻이 맞아 주는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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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여호 5장 9ㄱㄴ절, 10-12절
하느님의 백성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 무렵
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10
이스라엘 자손들은 길갈에 진을 치고, 그달 열나흗날 저녁에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11
파스카 축제 다음 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날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은 것이다.
12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멎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에 가나안 땅에서 난 것을 먹었다.
화답송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나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모두 그 이름 높이 기리자. 주님을 찾았더니 응답하시고, 온갖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셨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제2독서
2코린 5장 17-21절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
루카 15장 1-3절, 11ㄴ-32절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은 우리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에 달려오시어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어 주시는 자비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사절인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권고하시는 대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하느님,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비추시니 은총의 빛으로 저희 마음도 밝혀 주시어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을 생각하며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김지형 제르오지오 신부 집전
2022년 3월 27일 (일)
김지형 제르오지오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27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소외된 이들의 복음
루카 복음 15장은 ‘소외된 이들의 복음’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The Sayings of Jesus, T.W. 맨슨, 282면 참조). 특히 세 가지 비유(15,4-7.8-10.11-32 참조)의 연속 배치는 소외된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관심을 증명합니다. 14장과 16장에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이들을 환대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다룸으로써, 15장의 중심 주제가 더욱더 두드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15,11-32 참조)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을 보고 매우 불만스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왜곡된 인식을 고쳐 주시려고 비유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비유의 구조는 단순하고, 주제는 명확합니다. 비유 속 주인공인 아버지는 자신이 가진 것, 곧 아들을 잃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찾았고, 아들을 찾은 것에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잃음에 대한 슬픔이 아닌, 찾음에 대한 기쁨을 전해 주고자 하십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청자, 곧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반응에 대한 묘사 없이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로써 잃어버린 이를 찾는 기쁨에 함께하도록 그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할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도 그분과 함께 식사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화해의 사절인 우리
사순 제4주일은 복음에서 집 나갔던 작은 아들을 용서하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를 들려주며 제2독서에서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강력한 호소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말씀이 저하고는 거리가 먼 얘기처럼 들려서 괜히 죄송하고 제가 무뎌서 그런 것인가? 죄를 만들어서 용서청해야 하나?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느님과 원수진 적이 없고, 비유의 작은 아들처럼 주님을 떠난 적도 없으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 때문에 옛날에 하느님을 원망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아무런 원망이 없으며 아무런 분노도 없는데 무슨 화해를 하라는 것인지.
그러니 저는 지금 화해할 일은 없고 감사할 일만 있다고 할 수 있겠고, 다만 제가 지금보다 더 늙어 병고가 많아졌을 때 그리고 병고를 제가 잘 받아들이지 못해 하느님과 불화중에 있을 때 그때는 제가 하느님과 화해해야 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하느님과 화해할 일은 없어도 화해의 사절이 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저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사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보다 화해의 사절이 되라는 말씀을 하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고작 하느님과 자신의 화해를 걱정하고 노력해야 하는 존재가 우리 정체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화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사절들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정체성이 확고하고 이 정체성을 영예롭게 생각한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겁니까?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으로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우리도 남의 잘못을 따지지 않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것에 그저 기뻐하는데 큰 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과 방탕하게 살은 것에 대해 따집니다.
그런 큰 아들에게 오늘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제가 앞서 하느님을 떠난 적이 없고 원수진 적도 없으니 하느님과 화해할 것도 없다고 얘기했는데 오늘 큰 아들도 아버지를 떠난 적이나 원수진 적이 없지요. 그런데 동생에게는 너그럽지 못하고 시비를 겁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도 그런 것이 아닌지 반성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받았으면 그 은총 지위의 삶을 살며 하느님 자비의 사절이 되어야 하는데 시비나 거는 삶을 살지 않는지. 만약 그런 우리라면 주님께서 비유를 든 종과 같습니다. 주인에게 큰 빚을 탕감받았건만 자기에게 빚진 다른 종을 보자 즉시 멱살잡이를 하고 마침내는 감옥에 처넣는 가혹한 종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는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의 슬픔을 안고 끼고 애써 보듬으면서 살아가는 형제자매님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감내하고 있는 그 큰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그저 눈빛만 봐도 즉시 알수 있습니다.
어린 두 자녀를 두고 먼저 떠난 아내, 참으로 혹독한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두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한 젊은 아빠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눈빛이 놓아버리고 싶은 삶의 의지를 계속 붙들게 한답니다. 이제는 순전히 자신의 몫이 되어버린 산더미 같은 빨래며, 싱크대 설겆이 거리에서 아내의 얼굴을 본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극도의 슬픔과 고통을 말끔히 치유해주시고 위로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따라 복음 구절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따뜻한 얼굴이요, 한없이 포근한 그분의 품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탕자의 귀향에 대한 헨리 나웬식 묵상의 결론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 아들, 그리고 첫째 아들, 최종적으로 아버지, 세 인물이 공존합니다. 탕자의 귀향 스토리는 둘째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첫째 아들로 넘어가고,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끝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분위기는 참으로 따뜻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존재합니다. 죽을죄를 짓고 불안해하는 둘째 아들을 다독여주며 안심시켜주는 모습에서 너그럽고 지혜로운 한 노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주목할 부분이 두 손입니다. 두 손의 크기가 우선 다릅니다. 아들의 어깨에 닿은 왼손은 강하고 억셉니다. 마디마디에 꽤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저 만지는 데 그치지 않고 힘을 주고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반면 오른손은 어떻습니까? 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습니다. 귀부인의 손가락처럼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우아하고 다정한 분위기입니다. 손을 사뿐히 올려놓은 듯합니다.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고 있는 어머니의 손입니다. 아버지 안에는 모성과 부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면서도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한편으로는 붙잡아주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루만져주십니다.
아버지가 걸치고 계시는 큼지막한 외투 역시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색상이 따뜻하고 고운데다 큼지막합니다. 모양도 아치를 닮아서 깃들이기 좋은 환영의 공간입니다.
세상에 지친 나그네들을 쉬어가게 하는 장막처럼 보입니다. 헨리 나웬은 특별한 표현을 합니다.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머 새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 결국 아버지의 커다란 망토는 보살핌과 보호 속에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오는 한 존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극진히 환대하고 있습니까? 괜찮다 다 괜찮다며 다정히 등을 두드려주고 있습니까?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를 꽉 움켜쥐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탕자의 귀향을 감상하고 묵상하며, 나는 과연 돌아온 탕자인가? 아니면 첫째 아들인가? 파악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와 헨리 나웬은 그게 아니라고 외칩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모두 다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부단히 둘째 아들에서 첫째 아들로, 첫째 아들에서 아버지로 옮겨가고 변환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이를 꽤 먹은 헨리 나웬의 고백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노년기를 살아가는 분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갈 것입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헨리 나웬, 탕자의 귀향, 포이에마 참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모든 인간은 자기감정의 원인을 움직이는 수레바퀴다.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 이야기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주인공은 돌아온 탕자의 형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하시는 대상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들고 계시는 것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과 함께 기뻐해야 옳은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평생 아버지만을 위해 일했는데 방탕하게 살고 돌아온 동생에게만 잘해주는 것이 얄미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써 아들은 아버지에게 속하지 않았음이 증명됩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하느님께 속하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기쁨의 원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정’으로 내가 어디, 혹은 누구에게 속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감정은 내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진다고 믿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은 내가 속하려고 하는 대상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는 그 감정의 원인을 나르는 수레바퀴입니다.
‘요나’(Jonah)라는 단편 영화 내용입니다. 움부나와와 그의 친구 주마는 한 휴양지 바닷가에서 사는 절친한 친구입니다. 둘은 관광객의 사진기와 같은 물품들을 훔치는 좀도둑입니다. 그들은 사진기를 훔쳐 아름다운 자신들의 마을을 홍보하여 더 큰 휴양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은 물고기가 잘 잡히는 것 빼고는 이렇다 할 뷰포인트가 없었습니다. 사진기로 여기저기 찍는 순간 그들의 인생을 바꿀 대형 사고가 터집니다. 주마가 음부나와를 촬영하는 그 순간 거대한 물고기가 물 위로 솟아오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함께 찍힌 것입니다. 음부나와는 흥분하여 이 사진으로 마을을 홍보하자고 합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물고기를 보러 몰려들었고 관광객이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쓰레기와 향락 시설도 함께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움부나와는 ‘피시 맨’이라 불리며 이 지역의 가장 유명한 홍보대사가 됩니다. 움부나와는 행복을 마음껏 즐깁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사진을 찍어준 친구에게는 점점 관심을 잃어갑니다. 움부나와는 돈과 향락에 물들어갔고 물고기는 그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 주마는 너무 변해버린 움부나와를 떠납니다.
세월은 흘러 움부나와는 노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더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멋진 바닷가를 이렇게 쓰레기장이 되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외롭게 바닷가를 바라보던 움부나와에게 그 큰 물고기가 보였습니다. 그 물고기를 잡는다면 마을을 다시 한번 일으킬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는 배 한 척을 끌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갑니다. 혼자 힘으로는 그 물고기를 잡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움부나와는 물고기와 사투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거대해지고 더 더러워진 그 물고기는 음부나와를 삼켜버립니다.
이 영화는 구약의 요나 예언자의 이야기를 나름대로 해석해서 만들었다고 봅니다. 요나는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기 나름의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그렇게 결국 들어가게 된 것이 큰 물고기의 배 속입니다. 그는 다시 자기 행복의 원천을 하느님의 뜻에 둡니다. 그리고 니느베로 하느님 뜻을 전하기 위해 들어갑니다.
감정은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행복이라 여기는 것에 내 마음을 둘 때 그 행복이라 여기는 것으로부터 감정이 비롯됩니다. 우리는 마치 마차의 바퀴와 같습니다. 마차의 바퀴는 중심에 축을 끼울 수 있는 구멍이 있고 그 중간에 여러 개의 살이 바퀴를 지탱합니다. 가장 중간의 구멍이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무언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종속됩니다. 그리고 바큇살들이 바로 여러 감정입니다. 내가 마음을 두고 있는 것에 의해 감정들이 나옵니다. 바퀴는 그 감정들에 의해 움직이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만약 내 마음을 하느님 사랑의 축에 끼우면 나의 감정은 그것에 의해 좋게 바뀌고 그러면 사랑의 행위가 나옵니다.
따라서 내 마음을 하느님께 두면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고 하느님과 함께 슬퍼합니다. 세상 감정들이 휘둘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감정이 곧 나의 감정이 됩니다. 내 마음을 하느님께 두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할 줄 몰랐습니다. 이 말은 그들의 마음이 다른 곳에 꽂혀있다는 뜻입니다. 자녀들이라면 당연히 그 마음이 부모에게 꽂혀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기뻐하시는데 우리가 슬프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른 것에 종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감정을 뽑아내는 다른 것에 먹힌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할 것은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움부나와는 물고기에 자기 마음을 빼앗겨 절친 주마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 잃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기면 좋은 감정이 솟아납니다. 오늘 복음의 아버지는 사실 두 아들의 모든 감정을 다 이해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감정은 열려있었고 첫째 아들의 감정은 닫혀있었습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나머지 모든 감정의 원인은 어둠입니다. 빛은 태양이고 어둠은 블랙홀입니다. ‘만개’(In full bloom)라고 번역되어도 괜찮을 이런 단편 영화도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별한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아내에게 행복의 원천은 남편이었습니다. 아내는 밖에 절대 나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택배로 주문하고 집안에서 남편이 하던 식물을 가꾸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화분에서 지렁이 몇 마리가 나와 거실을 파고듭니다. 이내 그 구멍은 블랙홀이 되어 점점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들입니다. 집안에서 달아나려 해 보지만 지금까지 밖을 나가보지 않아서 밖은 두렵습니다.
이제 남편을 기억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남편이 좋아하던 화분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내는 갈등합니다. 화분을 지키기 위해 밖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화분과 함께 남편의 기억이 있는 블랙홀로 들어갈 것인가. 영화는 후자를 택합니다. 이는 어떻게 세상 것으로부터 감정을 얻어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의 최후를 보여줍니다.
빛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나머지 우리에게 감정을 일으키는 모든 피조물은 실제로 바퀴와 같은 우리를 굴릴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 감정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입니다. 요나처럼 자신을 만든 분의 목적대로 그분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결합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퀴는 구르게 되고 자신이 딛는 땅의 느낌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블랙홀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맏이의 모습은 아버지의 마음에 자기 마음을 끼워 넣지 못한 가짜 하느님 자녀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 것에 감정이 휘둘리면서 하느님 자녀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끼워져야 하는 마차 바퀴와 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같은 피조물에서 비롯되는 감정에 종속될 것인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감정에 종속될 것인가는 우리 선택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격은 정말로 바뀌지 않을까요?
날 때부터 유전자에 새겨지기 때문에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바뀌지 않을까요? 성격이 타고난다고 하지만, 성격의 상당 부분은 태아기와 유아기에 각인된 경험으로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서 튼튼한 몸을 만들 수가 있듯이,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면 분명히 성격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바뀌어 갑니다. 성격, 자아, 행동양식, 습관 모두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자신이 변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분명히 바꿀 수 있습니다. 단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쉽게 포기해서 문제입니다.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죄의 유혹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다면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열정을 가지고 변화의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선함으로 변하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하느님께로 향하는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율법의 유산법은 장자가 아버지 재산의 3분의 2를 가지고 동생은 그 나머지 3분의 1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유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생전에 유산분배가 있어도, 분배받은 아들들은 재산에 대한 소유권은 있어도 처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은 유산을 분배받았고 처분까지 한 것입니다.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죄를 마음껏 범하라는 이유가 아닙니다. 또 자기 혼자만 잘 살면 그만도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상의 삶을 지키지 않고, 자기 멋대로의 비정상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정상적이지 않은 작은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하느님께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사는 우리를 매번 용서하시고 받아주십니다. 물론 복음에 등장하는 큰아들처럼, 세상은 이런 용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하다면서, 끊임없이 단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향하면 당신의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십니다.
이를 위해 작은아들이 보여 주었던 모습처럼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변하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한 노력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은 사라질 운명을 인정하면서도 영원을 믿는 고백이다.
- 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루카 15,32)
참 많이도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 그럼에도 지극하신 하느님 사랑을 아직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어리석은 우리들이다. 아파하신 하느님께서 아들을 다시 살리신다.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기뻐하신다. 회개의 체험에서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회개의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 진정한 회개는 새롭게 태어나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길이다. 하느님 사랑이 곧 우리 삶의 의미이며 목적임을 깨닫는 회개이다. 다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아버지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이 회개의 진정한 첫걸음이다.
모든 사랑은 회개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음과 하느님을 떠나감을 아프게 회개한다. 마침내 일어나 하느님께로 발길을 옮긴다. 참된 회개로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된다. 회개하는 사람만이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작은 아들 큰 아들 모두 기쁘게 아버지 사랑을 만난다.
언제나 더 많은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잃어보아야 더 소중한 것을 다시 보게된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 돌아설 수 없다. 망설임은 회개가 아니다. 가장 빛나는 선택의 실천인 회개로 우리는 다시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되었다.
가장 소중한 하느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순이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아버지 집이 있다. 오염된 사랑을 치유하시듯 가장 좋은 옷을 다시금 손에는 반지를 발에는 신발을 다시 주시는 아버지시다. 이 사랑을 만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자신이다. 회개해야 할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은 우리자신을 대변한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이 다시 열리는 회개의 삶이다. 먼저 회개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시는 하느님께서 기쁜 회개를 보여주신다. 하느님께서 잃었던 우리자신을 도로 찾으셨다. 가장 좋은 잔치가 시작되었다. 하느님과 노래하며 춤추는 회개의 기쁨이다. 다시 아파하신 하느님께서 진실로 기뻐하신다. 기뻐하시는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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