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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사순 제3주간 토요일 -
2022년 3월 26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호세아 예언자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이고,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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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호세 6장 1-6절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4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5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6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화답송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당신의 자애로 시온을 돌보시어, 예루살렘의 성을 쌓아 주소서. 그때에 당신이 의로운 희생 제사, 제물과 번제를 즐기시리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복음
루카 18장 9-14절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가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언제나 저희를 천상 은총으로 채워 주시어 굳건한 믿음으로 성실히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형훈 미카엘 신부 집전
2022년 3월 26일 (토)
오형훈 미카엘 신부 집전
명동성당 매일미사
2022년 3월 26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정진만 안젤로 신부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리사이의 모습에서 벗어나 세리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해야 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비유를 들어 기도에 관하여 가르치십니다. 먼저, 제자들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기도할 것을 당부하십니다(루카 18,1-8 참조). 이어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 곧 바리사이들(16,15 참조)을 대상으로 또 다른 비유를 제시하시면서 기도의 올바른 방법과 자세를 가르쳐 주십니다.
비유에서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입니다. 그는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하고 신실한 유다인을 대표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지역에서 로마인들을 위하여 세금을 걷는 유다인입니다.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들을 ‘갈취하고, 불의를 저지르며, 간음하는 이들’의 범주에 몰아넣고 죄인 취급합니다. 아울러 자신이 단식과 십일조 규정을 준수하는 것을 자랑합니다(18,11-12 참조). 이와 대조적으로 세리는 성전에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합니다(18,13 참조).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세리가 의로운 이였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였지만, 자신의 신앙 행위에 바탕을 둔 자기 확신으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우월한 신분을 자랑하였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쳤기 때문에 의로움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한 세리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에게서 오는 것을 청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는 바리사이들을 넘어서 그리스도인 전체를 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바리사이의 모습에서 벗어나 세리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때 하느님께 받을 상도 클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 우리는"
오늘 호세아서는 "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자"라는 말은 뭔가를 시작하려고 할 때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말을 하려고 하거나 누군가와 일을 하려고 할 때 다른 데로 향하여 있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하는 말이지요. 그래서 한 번으로는 시선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 자, 자"하며 여러 번 주위를 환기시키지요.
아무튼, 호세아는 "자"라는 말로 말을 시작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소를 하는데 그 호소의 내용은 주님께 돌아가자는 것과 주님을 알아드리자는 것입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저도 오늘 호세아처럼 여러분에게 "자"하며 호소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제 호소를 귓등으로 흘리지 않고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번 대통령 선거 때 참으로 많은 분이 자신이 마치 후보이거나 그 운동원인 과하게 선거에 몰입을 하고는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 분들은 마치 자기가 승라한 듯 승리에 도취해 있고 그 반대인 분들은 너무도 허탈해하고, 분노하고, 멘붕 상태인데 그렇지만
"자, 이제는 주님께 돌아갑시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도록 합시다. 그리고 어머니인 지구가 환경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고 갈등과 전쟁이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데 이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죄는 독이요, 죄의 고백은 해독 행위입니다.
또다시 판공성사 시즌이 돌아왔습니다. 어려운 시대, 고백소 앞에 길게 줄지어 서 계신 교우들의 모습, 반갑고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백소에 들어가는 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바리사이와 세리, 두 죄인을 비교하며 말씀하십니다. 그런 분들 가끔 있습니다. 진지하게 성찰하고 뉘우친 죄 고백은 뒷전입니다. 자화자찬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처럼 말입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루카 18,11~12)
고백성사의 내용으로서는 빵점입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인물 세리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사무친 송구함에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못냅니다. 그저 가슴을 크게 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바리사이는 아주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빠트렸습니다. 자신의 내면 상태, 현재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도 하나도 하느님께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외적인 것, 그저 표면적인 것, 그저 형식적인 것에만 온몸과 마음이 몰두해 있었습니다.
반면 세리를 보십시오. 그는 성전 앞으로 나아갈 엄두도 못 내고 성전 뒤편 기둥 뒤에 숨어 서서 몰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절실한 참회와 회개의 표시로 진심으로 가슴을 쳤습니다. 이어서 그가 하느님께 던진 한마디의 말은 참회 기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바리사이가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던 반면, 세리는 겸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의인이라는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던 반면, 세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결과 두 인생은 완전히 역전됩니다. 한껏 자신을 들어 높인 바리사이는 하느님 앞에 부끄럽게 되었고, 최대한 자신을 낮춘 세리는 충만한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성화되었습니다.
올해도 또 다시 고백소로 향하는 교우들을 위해 성인들의 말씀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고백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죄는 독이요, 죄의 고백은 해독 행위입니다. 다시 의로워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죄를 고백하십시오.”
- 성 암브로시오 주교
“여러분의 죄를 고백할 때 외적으로 드러난 죄만 고백하지 말고 모든 종류의 은밀한 죄까지 빠짐없이 고백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히 내릴 것입니다.”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충실하고 솔직한 고백성사로 여러분의 마음을 텅 비워버리십시오. 그 텅 빈 마음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리하실 것입니다.”
- 성 마더 데레사 수녀
“사랑하는 여러분, 은총의 샘인 고백성사로 돌아오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몸소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치유하실 것이고,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남과 비교하는 지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법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한 것에 대해 이미 자신만만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행위로 의로워졌다면 기도는 왜 하는 것일까요? 기도의 목적이 의로움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반면 세리는 기도하러 들어오기 전에는 의롭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래서 세리는 의로워졌습니다. 기도를 통해 얻는 열매가 의로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움은 그리스도를 통해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어야 의로워집니다. 마치 야곱이 에사우의 의로움을 입어 의롭게 인정받았듯이,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워지려는 이는 그리스도 수난의 의미를 무시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워지려 하는 사람의 특징은 이웃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이미 의로워서 다른 이를 판단하는 자에게 기도는 의미 없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판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는 자신을 하느님과 비교하지, 인간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나를 비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앞에 하느님 모습을 놓고 사는 사람과 인간의 모습을 놓고 사는 사람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놓고 사는 것 자체가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웃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본성에 머물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자신을 인간과 비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비교의 굴레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합니다. 에사우의 옷을 입은 야곱의 비교 상대는 이제 에사우밖에 안 남게 됩니다.
단편 영화 ‘어 버츄얼 나이트메어’(A Virtual Nightmare)의 내용입니다. 번역하자면 ‘가상현실의 악몽’정도가 되겠습니다. 주인공은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였습니다. 친구와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가상현실 VR 게임기가 TV에 나왔습니다. 가격을 보니 그것을 살 수 있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1달러에 그 기계를 판매하는 사이트가 있었습니다. 속는 셈 치고 주문하였는데 정말 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절친과도 공유하고 함께 게임을 시작합니다.
폐건물에서 하는 게임이었는데 각자의 무기를 고르고 괴물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괴물과 마주쳤을 때 그것과 싸우다 보니 자기 몸에 정말 상처가 나고 아픈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게임이 아니라 실제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게임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한번 시작했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게임이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들과 맞서 싸우며 괴물을 처치하였습니다.
또 한 괴물이 달려들자 그는 그 괴물을 무기로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거울이었습니다. 그는 깨진 조각으로 자기 모습을 비춰보았습니다. 자기가 사람인 줄 알았더니 괴물로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죽인 괴물들은 실제로 자신과 함께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절친도 이 건물에 함께 있는 것은 알았지만 알아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울 조각을 들고 다니기로 합니다.
사실 친구는 이 게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매우 높은 단계까지 올라 무기도 매우 강력해졌습니다. 그 친구가 갑자기 덤빕니다. 거울로 그 친구가 자신도 괴물임을 알려주려 하지만 그는 믿지 않고 거울 조각을 또 깨버립니다. 다행히 주인공은 친구를 이깁니다. 그러나 죽이지 않고 다시 깨어나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게 꽁꽁 묶어놓습니다.
주인공은 자신의 무기를 버립니다. 그랬더니 프로그램에 오류가 생깁니다. 주인공은 그 자리로 자리를 옮기자 다행히 게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게임기를 부숩니다. 그리고 자기 친구의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깨닫습니다. 자기가 친구를 묶어놓고 왔다는 것을. 친구는 그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짧고 잔인하지만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기도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기도는 거울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면 자신도 자신이 판단하던 사람들과 똑같이 괴물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무기를 휘두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거울을 보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자신만 인간이고 나머지는 괴물들이라 여기며 자기가 한 행위, 곧 그 무기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바리사이는 여전히 무기를 내려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남을 심판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하느님께 자비만을 청합니다. 그래서 의로워진 것입니다. 남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웃을 어떤 모습으로 보며 살아가는지에 따라 기도의 열매가 맺혔는지, 맺히지 않았는지가 결정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인지, 아닌지가 결정됩니다.
왜 남과 비교하게 될까요? 하느님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없을 때는 형제들끼리 비교합니다. 유산을 두고 싸웁니다. 그러나 부모가 살아있을 때는 자신을 부모와 비교하기 때문에 형제들끼리 싸우는 일이 드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비교하지 않으면 형제와 비교하게 되어있습니다. 비교는 생존 욕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기려는 경쟁의식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부모 앞에서 형제간에 서로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투하고 싶다면 하느님과 비교하지 않고 살면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비교하고 질투하고 열등감으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나를 작게 만드는 부모이신 하느님을 앞에 두고 산다면 그런 부모님이 계신 데 서로 살아보겠다고 아웅다웅하는 형제들이 불쌍해 보입니다.
카인과 아벨을 생각해 봅시다. 아벨은 하느님과 비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카인은 형제와 비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비교하지 않으면 저절로 형제와 비교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과 비교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사랑에 비해 내가 그 보답을 하찮게 하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십일조는 내는 사람이라면 이웃과 비교하여 덜 가진 것에 대해서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거듭되는 걱정, 불안,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분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부정적 생각에 스스로에 대해서 늘 불만족스럽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어느 신부님을 찾아갔고, 신부님은 이분의 말을 듣고 “당신은 교만한 사람이에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누구나 갖는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감정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고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완벽한 감정을 취해야 자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한 삶입니다.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 교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긴 예수님 앞에 고개를 숙이며 나왔던 이들은 자기 부족함을 모두 인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부족한 자기 모습을 숨기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교만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부족함으로 자기 존재가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받을 기회입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세리는 동족에게 세금을 거둬들여서 로마에 건네고 있었기 때문에, 매국노라는 소리를 듣는 공적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리의 가족은 유다인들의 공동체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법정에서 증언할 자격도 없었습니다. 하물며 세리 본인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성전에 기도하러 갔지만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서서 기도했습니다. 서 있어야 그만큼 하느님께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리는 팔을 펴서 하늘을 향하거나 두 눈을 우러러보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있기에 감히 하늘을 향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리에 앞서 등장하는 바리사이의 기도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선택은 누구였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
오늘 제1독서의 호세아 예언자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호세 6,6)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를 내세우는 열심보다는 자기를 낮추는 진정한 회개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리사이의 모습을 간직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 자기 생활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자기 생활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단죄를 하는 사람, 세상일을 잘해서 자기는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 바리사이의 모습입니다.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주님께서 좋아하실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며 한 권의 책이다. 얼굴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오노레 드 발자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루카 18,14)
우리의 부족함이 기도가 된다. 부족함 거기에서 시작되는 기도이다. 부족함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이다. 절실한 반성이 기도가 된다. 반성이 없는 기도는 또 다른 판단이 된다. 반성으로 더 깊어지는 기도이다. 이것을 아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가장 선한 기도는 마음의 진심어린 기도이다. 남들에게 드러내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반성이 동반된 고백이 참된 기도이다. 기도는 결국 의롭게 되는 우리자신을 위한 가장 좋은 은총의 선물이다.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아름다운 사람은 세리처럼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마음들 안에는 참된 기도가 있다. 새로 태어날 수 있는 기도의 사순이다. 하느님께 사랑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진심어린 기도가 있다. 부
족함과 부끄러움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우리의 사순이다. 가슴을 치며 고백할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신다. 향기로운 눈물의 기도로 우리의 사순은 더욱 따뜻하다. 우리의 부끄러움까지 은총이 되게하는 기도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심어린 기도를 심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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