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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
21년 8월 19일 (목)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입타는 암몬 자손들을 쳐부수고 돌아와 주님께 서원한 대로 딸을 번제물로 바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에 비길 수 있다며,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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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판관 11장 29-39ㄱ절
저를 맞으러
제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을
주님께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그 무렵
29
주님의 영이 입타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그는 길앗과 므나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길앗 미츠파로 건너갔다가, 길앗 미츠파를 떠나 암몬 자손들이 있는 곳으로 건너갔다.
30
그때에 입타는 주님께 서원을 하였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31
제가 암몬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32
그러고 나서 입타는 암몬 자손들에게 건너가 그들과 싸웠다. 주님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으므로,
33
그는 아로에르에서 민닛 어귀까지 그들의 성읍 스무 개를, 그리고 아벨 크라밈까지 쳐부수었다. 암몬 자손들에게 그것은 대단히 큰 타격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굴복하였다.
34
입타가 미츠파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딸이 손북을 들고 춤을 추면서 그를 맞으러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다. 입타에게 그 아이 말고는 아들도 딸도 없었다.
35
자기 딸을 본 순간 입타는 제 옷을 찢으며 말하였다. “아, 내 딸아! 네가 나를 짓눌러 버리는구나. 바로 네가 나를 비탄에 빠뜨리다니! 내가 주님께 내 입으로 약속했는데,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단다.”
36
그러자 딸이 입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주님께 직접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원수인 암몬 자손들에게 복수해 주셨으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37
그러고 나서 딸은 아버지에게 청하였다. “이 한 가지만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두 달 동안 말미를 주십시오. 동무들과 함께 길을 떠나 산으로 가서 처녀로 죽는 이 몸을 두고 곡을 하렵니다.”
38
입타는 “가거라.” 하면서 딸을 두 달 동안 떠나보냈다. 딸은 동무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처녀로 죽는 자신을 두고 곡을 하였다.
39
두 달 뒤에 딸이 아버지에게 돌아오자, 아버지는 주님께 서원한 대로 딸을 바쳤다.
화답송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오만한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거짓된 자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두루마리에 저의 일이 적혀 있나이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복음
마태 22장 1-14절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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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우리가 마련해야 할 혼인 예복
십여 년 전 위령의 날 미사에 참례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에게 인사를 더 잘하고 싶어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거울 보고 웃는 연습도 하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반갑게 신자들을 만날 생각을 하며 식당 쪽으로 갔는데,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복잡해서인지 막상 인사를 건네는 분이 없었습니다.
어깨를 부딪혀도 가벼운 눈인사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길을 내려와 마당에 이르니 저쪽에서 큰 가마솥을 걸어 놓고 국밥을 퍼 주고 있던 몇몇 신자가 국자를 내팽개치고 달려와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제 딸이 시집을 갔어요.”
“신부님, 남편이 냉담 중이에요.” 하며 제 어깨를 쓰다듬고 손을 잡고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건넵니다.
그러고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다시 국밥을 퍼 주러 뛰어갑니다. 그분들은 첫 본당 신부 시절에 만난 신자들이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어깨를 스친 신자들은 고개만 끄덕하고, 국밥을 퍼 주던 신자들은 멀리까지 달려와 인사를 하는가?’ 그러다가 ‘아, 사람과 사람이 맺은 인격적 관계의 깊이 때문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신부라도 서로 인격적 관계가 맺어져 있지 않으면 데면데면하지만, 아픔과 기쁨을 함께한 사람을, 그런 신부를 만나면 그리 반가운 것이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혼인 예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힘들 때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 뒤 그분에게서 힘과 지혜와 용기를 얻어 하나하나 극복해 나갔던 일. 내어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닮고자 나 또한 내 것을 내어 주고, 그래서 그 사랑이 되고자 한 노력들 …….
그러한 노고의 땀방울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하느님과의 친교의 깊이가 바로 우리가 마련해야 할 혼인 예복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굴러들어온 복 걷어차는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초대에 응하지 않거나 예복을 입지 않아 벌 받는다는 비유얘깁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탁 들은 생각이 우리말에 있듯이 <굴러 들어온 복을 제 발로 걷어차는구먼!>입니다.
그러면서 불행한 사람이란 행복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듯 지옥에 가는 사람은 천국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비유를 볼 때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천국 가는 길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지 않았습니다. 천국은 열려있었고 적극적인 초대까지 받았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렇게까지 초대 받았는데 안 갈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천국을 선택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 이들에게는 그곳이 천국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요.
천국을 천국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환락의 삶이 행복한 삶보다 더 행복해보이기에 참 행복을 행복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정확히 같습니다.
어리석음이 고통과 불행의 원인인 것이 바로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초대에 응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아서 쫓겨납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다 초대 받았다는 것과 예복을 입지 않아 쫓겨났다는 것은 우리의 사려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그렇다면 악한 사람이란 말일까요? 그런데 복음을 보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길거리에서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아무나 불러오라고 하였으니 악한 사람이 한 사람만 불려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복이란 회개의 옷일까요? 악한 사람이지만 임금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얼른 회개자의 옷, 선한 사람의 옷으로 바꿔 입은 것일까요?
그런 뜻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혼인 예복이란 사랑의 옷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혼인잔치는 사랑의 잔치이니 사랑이 예복이겠지요.
여기에 놀라운 영성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죄인도 사랑하고 천국에 초대하고, 죄인도 당신을 사랑하도록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아무나 불러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아무나가 실제로는 아무나가 아니고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 끝까지 선한 사람도 없듯이 처음부터 악한 사람으로 태어나 끝까지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선한 사람이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 같이 햇빛을 내리시니 선한 사람, 악한 사람 할 것 없이 다 사랑하시고 죄와 악의 사람일지라도 당신을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더 큰 죄이고, 우리의 작은 악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더 큰 죄일 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이 하느님임을 모를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드님의 혼인 잔치를 위해 많은 이들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돈을 버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임금의 사랑을 거부한 것에는 ‘사랑’을 자기 마음대로 정의한 원인이 큽니다. 자기 기준으로 임금의 사랑을 정의한 것입니다.
초대에 응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임금이 그들을 사랑하여 초대하였지만, 그는 자기가 와 줘야 잔치가 잔치다워지니 임금이 자기가 필요해서 초대했다고 믿었습니다. 이 사람도 임금의 순수한 사랑을 자기 변질된 사랑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순수한 사랑 자체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우리 자아에서 나오는 독, 곧 세속-육신-마귀의 욕구 때문에 변질됩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 기준으로 사랑을 정의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 결국은 다 자기 행복을 위한 거야!”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도 다 이기적인 사랑으로 여기고 그래서 자기를 초대하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해줌이 하느님께 이용당해 준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규정한다는 말은 하느님을 내 기준으로 심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리와 선함, 그리고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기준으로 규정할 때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이 만든 수준의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초대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순수한 사랑이 우리 변질된 사랑을 심판하고 규정할 수 있지, 우리 변질된 사랑이 그분의 순수한 사랑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쉰 포도주만 먹은 사람이 어떻게 값진 포도주를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조금씩 덜 쉰 포도주를 마시며 참 포도주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초대에 온전하게 응답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무척 가난한 사람이 소금장수를 해서 먹고살았습니다. 그는 벚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아녔는데 하도 오랫동안 쓰다 보니 무슨 나무인지 모를 정도로 반들반들 닳았습니다.
하루는 무거운 소금 짐을 짊어지고 지팡이에 의지해 산을 오르다가 중턱에서 휴식도 취할 겸 주먹밥을 먹는데 그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뭔가 살펴보니 무덤 주변에서 하얀 여유가 웬 해골을 닥닥 긁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그걸 뒤집어쓰는 순간 할머니로 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상하게 여긴 소금장수는 지팡이를 들고 몰래 여우 뒤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여우가 큰 마을의 혼인 잔치하는 집으로 들어가자 소금장수도 밥을 빌어먹을 핑계로 따라 들어갔습니다.
얼마 뒤 가마를 타고 도착한 신부가 안방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후 안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비명소리가 났습니다. 소금 장수가 안을 들여다보니 할머니가 신부의 배를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말릴 틈도 없이 작대기로 할머니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 말리는데도 소금장수는 계속해서 할머니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잠시후 할머니가 쓰러져 죽으면서 꼬리가 희끗희끗한 여우로 변했습니다. 여우가 죽고 신부가 살아나자 사람들은 소금장수를 칭찬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은 어떻게 저 할머니가 여우인 것을 알았소.”
그러자 소금장수가 대답했습니다.
“다 몇 대째 내려온 이 지팡이 덕분이지요.”
그러자 동네에서 크게 농사를 짓는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지팡이 내게 파시오. 값은 후하게 쳐 드리겠소.”
소금장수는 이것으로 먹고산다며 안 팔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물러서지 않고 큰돈을 쥐여주며 뺏다시피 소금 장수에게 지팡이를 샀습니다.
부자 농부는 지팡이를 써먹을 길을 찾는데 마침 어디서 혼인 잔치를 한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그 집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방에서 신부가 배 아프다고 야단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가 병을 볼 줄 안다면서 들어가 보니 신부 옆에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앉아있었습니다. 농부는 “이놈의 여우 죽어봐라!” 하면서 할머니를 마구 쳤습니다.
잠시 후 할머니가 죽었는데 보니까 여우가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생사람을 잡은 부자 농부는 한순간에 홀랑 망하고 말았습니다.
[출처: ‘옛이야기로부터 배우는 성공법칙’, 유튜브 채널, ‘북올림’]
사실 ‘지팡이’가 없었다면 소금장수는 그 산 위까지 오를 수 없었고 해골을 뒤집어쓰는 여우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소금장수가 할머니가 여우인 것을 알게 된 것은 지팡이 때문인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지팡이는 소금장수가 사용할 때만 효과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역사와 존재가 다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부자 농부는 단지 지팡이를 자기 관점에서 규정하여 자신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소금장수까지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용하실 때야만 온전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규정한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 수준 안에서 그것을 휘두르기 때문에 결국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 사랑도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그 초대에 응하지도 않고 응했더라도 그분에게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있습니까? 아이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다 그 근본 에너지는 자신들이 규정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규정할 수 없기에 자기 마음대로 규정하면 된다는 식의 교만이 세상을 망치는 것입니다. 일단 규정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겸손하게 배우는 자세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순수한 사랑이나 진리, 선함이라 여기고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워나가는 처지에서 궁금해해야 합니다. 사랑이고 선함이고 진리이신 분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몸에서 빛이라도 나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물고기가 바다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선생님!’이라고 부른 막달라 마리아처럼, 사랑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맛보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좋은 포도주를 먹을수록 나쁜 포도주는 맛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사랑하시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 사랑의 전문가가 되는 길입니다. 소금장수와 지팡이가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와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토끼와 거북이 경주 이야기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이야기를 아십니까? 토끼와 거북이 중에 누가 이겼을까요? 거북이입니다. 분명 토끼가 훨씬 더 빨라도 중간에 잠들어서 결국 거북이에게 승리를 빼앗긴다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먼 훗날, 이 토끼의 후손이 거북이에게 이겨서 역사를 바꾸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문제는 토끼는 금세 피곤함을 느껴서 중간에 잠들어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끼는 잠이 오지 않는 약초를 구해서 경기 직전에 먹었습니다.
이 약효 때문인지 토끼는 거북이보다 여유 있게 먼저 결승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토끼는 너무 기뻐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한참 뒤에 거북이도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도착하자마자 또 이겼다면서 만세를 외치는 것이 아닙니까? 토끼는 “내가 이렇게 먼저 와 있는 것이 안 보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거북이는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너는 약물 복용으로 실격패야!”
맞습니다. 약물 복용으로 실격패가 맞습니다. 사실 우리는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승리가 진정한 승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얻은 승리가 아니라면, 큰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승리 자체보다 승리를 위한 과정을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지를 말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임금이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초대받은 이들이 각종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않고, 그것도 부족해서 부르러 간 종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당연히 임금이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살인자를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립니다. 당연한 조치로 보이지 않습니까?
사실 성경에서 혼인 잔치는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기쁘고 결정적인 일치의 상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초대에 응답하지 않고, 거부의 표시로 임금의 종을 죽이기까지 하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랑의 삶으로의 초대를 거부하는 모습, 그리고 거부의 표시로 하느님께서 싫어하는 죄를 범하는 모든 것이 바로 커다란 폭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아무런 조건이 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이들은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혼인 예복을 차려입지 않는 사람들이 쫓겨나는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실천이 바로 혼인 예복입니다.
각종 죄를 범하면서 세상에서 첫째 자리만을 차지하려 한다면, 하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실격패 당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탐욕스럽지 않은 사람은 세계를 모두 자기의 부로 삼지만, 탐욕스럽고 인색한 사람은 아주 작은 것도 모두 가지려 한다.
- 성 예로니모
공식의 중요성.
학창 시절에 제가 좋아했던 과목은 수학이었습니다. 대부분이 싫어하는 과목을 저는 이상하게도 좋았습니다. 문제 푸는 것이 싫다고 친구들은 말하지만, 저에게는 다른 과목과 달리 몇 개의 공식만 외워서 적용하면 정확하게 풀리는 이 수학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수학이라는 과목이 ‘암기과목’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공식을 외워야 하니까요.
수학에서 공식을 외우고, 이 공식을 잘 응용할 수 있는 사람의 성적이 잘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공식도 못 외우고 응용도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고 어려운 과목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을 따르는 공식을 외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공식을 잘 응용해서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의 관계가 멀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공식은 주님께서 직접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나의 입장이 아닌, 상대방이 원하는대로 해줄 수 있는 황금률로,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공식을 잘 응용하는 사람이 주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행복이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부르심과 선택으로 빛과 소금은 구체화된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 22, 14)
하느님 사랑은 어느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 하늘 나라가 있고 초대하시는 잔치가 있다. 가장 좋은 잔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모두를 잔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모두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시다. 부르심을 통해 하늘 나라를 보게되고 선택을 통해 하느님 사랑에 우리자신을 맡기게된다. 믿음의 예복은 잔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우리의 일상이 바로 잔치이다. 깨어나야 할 우리의 신앙이다. 신앙은 선택이다. 그냥 선택이 아니라 당장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선택이다. 부르심은 화려하지만 선택은 실천을 동반하는 은총이다.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도우심이 선택이다. 부르심과 선택으로 빛과 소금은 구체화된다. 오늘도 선택의 잔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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