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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
21년 8월 18일 (수)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스켐의 지주와 벳 밀로의 주민이 모여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우자 요탐은 가시나무의 우화를 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준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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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판관 9장 6-15절
주님께서 여러분의 임금이신데도
“임금이 우리를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소.
그 무렵
6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스켐에 있는 기념 기둥 곁 참나무 아래로 가서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
7
사람들이 이 소식을 요탐에게 전하자, 그는 그리짐 산 꼭대기에 가 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스켐의 지주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그대들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오.
8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을 세우려고 나무들이 길을 나섰다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였네.
9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0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이 달콤한 것, 이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2
그래서 그들은 포도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4
그래서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5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대답하였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화답송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당신 구원으로 얼마나 즐거워하나이까! 당신은 그 마음의 소원 이루어 주시고, 그 입술의 소망 내치지 않으셨나이다.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은혜로운 복으로 그를 맞이하시고, 그 머리에 순금 왕관을 씌우셨나이다. 그가 당신께 살려 달라 빌었더니, 영영 세세 긴긴날을 주셨나이다.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당신 구원으로 그 영광 크오며, 당신이 존귀와 영화를 내리시나이다. 그를 영원한 복이 되게 하시고, 당신 앞에서 기쁨이 넘치게 하시나이다.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복음
마태 20장 1-16절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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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18일 (수) 매일미사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18일 (수) 매일미사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그분을 알고 그분을 닮고자 내어 주는 삶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한 시간 일한 일꾼과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된 맨 먼저 온 일꾼들이 자비한 포도밭 주인에게 투덜거리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하늘 나라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포도밭 주인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시며, 품삯은 하느님을 믿고 따른 신앙생활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투덜거리는 일꾼들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불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 마음에 드는 신앙인이 되고자 평생을 얼마나 조심하며 살았는데, 죽기 바로 전에 세례 받았다고 똑같이 천국에 간다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물로 받게 되는 ‘영원한 생명은 관계의 문제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생명이신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통해 살아 있는 이가 될 뿐 아니라,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2』, 114면 참조).
따라서 죽기 바로 전에 하느님의 이름만 알고 죽은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와, 한평생 하느님 안에서 울고 웃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는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과의 친교로 이루어진, 그분을 알고 그분을 닮고자 내어 주는 삶을 통하여 맛보게 되는 행복의 크기와, 마침내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나서서 그분과의 일치로 얻게 되는 영원한 행복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선물의 크기와 깊이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 시간의 양이 아니라,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누구를 어떻게 뽑을 것인가?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로서 주님 포도밭, 곧 하느님 나라에서는 일찍 일한 사람이나 늦게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상급을 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게 일했음에도 똑같은 상급을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 인간의 공정인 데 비해 하느님의 공정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사랑의 공정이기에 옛날에도 이것은 문제고 지금은 더더욱 예민한 문제입니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정의나 평화나 사랑보다도 공정에 더 예민하기에 이 문제를 가지고 복음 나누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지금까지 오늘 독서에 대한 강론은 한 적이 없기에 오늘은 판관기의 말씀을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얘기는 왕이 다스리지 않고 판관들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이 왕이 있는 주변 나라들과 비교하며 왕을 세우려는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느 집단이든지 안정과 질서를 위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필요하기는 한데 문제는 그 필요한 지도자가 악인 경우가 많지요.
가끔 아버지가 없는 사람과 아버지가 폭군인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불행한지 비교하는 얘기를 하곤 합니다.
아버지가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자기가 더 불행하다고 하고, 아버지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자기가 더 불행하다고, 차라리 아버지가 없는 것이 낫다고 하지요.
제 생각에도 아버지가 필요하긴 하지만 폭군인 경우에는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왕들도 마찬가지로 필요악입니다.
그래서 오늘 판관기는 아주 재미있는 비유를 듭니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왕이 되기를 거부하는데 가시나무만 자기가 왕이 되기에 합당하다고 하며 수락합니다.
그런데 재미있지 않습니까? 가시나무는 남을 찌르고 아프게하는 나무잖습니까?
우리의 현실에서도 남을 이롭게 할 것같은 사람은 장의 자리를 피하고, 남을 아프게 할 사람들이 장이 되고자 하며, 사람들은 속아서 그런 사람을 자기들의 장으로 뽑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대선 후보들이 출마를 하고 누가 적합한지 많은 분이 저에게 묻습니다.
제가 대답할 리 없지만 신자들이라면 신앙의 눈과 복음의 눈으로 식별해야 한다는 정도는 얘기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식별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정파성에 따라 보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겁니다.
구약에서 왕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판관도 이스라엘을 다스리지만 그 차이점이 판관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데 비해 왕은 자신이 바로 왕들의 왕인 하느님인 양, 다시 말해서 하느님 밑이 아니라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다스리는 자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복음에서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Servant Leadership, 곧 섬김의 다스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복음적인 시각이란 정파와 나의 이익을 떠나서 이 복음 말씀에 비추어 현재의 지도자들도 판단하고 미래의 지도자도 식별하는 것입니다. 부디 어느 정치가의 똘마니가 되지 마시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복음을 가지고 정치가들을 판단하고 식별하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고 행복일 수 있다면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가 첫째가 되고 누가 꼴찌가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사람은 이 지상에서 맡겨진 일을 즐겁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란 육체적으로는 고된 노동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에 따르면 오후 5시에 와서 6시까지 한 시간 일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이 맡겨주신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일거리가 없어서 아침부터 5시까지 걱정만 하며 서성였던 그 시간이 고통이었습니다.
반면 꼴찌가 되는 사람들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죽도록 고생한 이들입니다. 그만큼 일을 고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마음은 편했으니 몸은 좀 힘들어도 자신을 써 준 포도밭 주인에게 감사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늘 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사람은 ‘마음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꼴찌가 되는 사람은 ‘육체의 행복’을 추구한 사람입니다. 일꾼인데도 노는 게 더 행복해 보인 사람들이라면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몸은 좀 힘들지만, 마음이 편한 것을 원합니까, 아니면 마음은 좀 불편해도 몸이 편한 것을 원합니까? 몸도 마음도 다 편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두 의자에 동시에 앉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만 택해야 합니다. 내가 어디에 집중하느냐가 하느님 나라의 위치를 결정합니다. 육체를 괴롭힐수록 성령께서 마음의 평화를 증가시켜 주십니다. 반면 육체를 편하게 두면 마음의 평화를 잃습니다.
리오넬 메시가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했습니다. 이적하자마자 그의 새 유니폼이 하루에 800억 원어치 팔렸다고 합니다. 많은 나이에도 아직도 건재한 그는 최대한 오래 운동장에서 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리오넬 메시보다 바르샤 1군에 더 빠르게 데뷔했고 메시보다 더 뛰어나리라 예측되었던 선수가 있습니다. 스페인 출신 보얀 크르키치입니다. 메시가 17세에 데뷔해 17세 10개월 만에 첫 골을 넣었다면 보얀은 메시의 기록을 더 단축합니다. 그가 첫 골을 넣은 것은 17세 53일이었습니다. 17세 때 31경기에 출전에 10골을 넣은 것은 17세에 대뷔한 라울 곤잘레스의 9골을 경신한 신기록이었습니다.
문제는 정신력이었습니다. 메시보다 기록 면에서 앞섰던 그는 부감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매 경기가 메시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경기는 어느 정도 즐겨야 하는데, 그는 불안함에 발작 증세까지 일으켰고 승승장구하던 그의 행복에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그 이후 그는 그저 평범한 선수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중입니다.
도대체 ‘적어도 메시’라고 불리는 재능을 가지고 그는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메시는 부담을 이겨냈고, 그는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메시는 골을 넣을 때마다 항상 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이 말은 자기 영광이 아닌 주님 영광을 위해 뛴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메시를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을 가진 보얀은 자기 영광을 위해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자기 영광은 이기심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갈등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은 축구 경기장 같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자기를 고용해 준 주인에게 감사하는 사람과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일하는 게 고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써주지 않는 자신을 써 준 주인에게 고마운 사람들은 온종일 일해도 한 시간밖에 일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에서 살게 될 위치를 결정합니다.
독일의 고백 교회를 창설했던 ‘마틴 니묄러’(1892∼1984)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하에서 목사들로 구성된 긴급동맹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또 나치가 무고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도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의해서 체포당했습니다. 8년 동안 감옥 속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다 1945년 세계 제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합군에 의해서 가까스로 구출을 받았습니다.
이때 밤에 잠을 자면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꾼 것이 아니고, 똑같은 꿈을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꿈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니묄러 목사가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줄을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니묄러 목사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뒤에서 나지막하면서도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 니묄러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선가 귀에 익은 듯한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해서 믿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되었습니다. 목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그는 아찔했습니다. 자기는 사실 지금까지 히틀러를 엄청나게 미워했습니다. 조직적으로 항거했습니다. 심지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까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똑같은 꿈을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꾸던 날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니묄러야! 너는 목사로서 히틀러를 미워하고 손가락질하기만 했지, 한 번이라도 그를 위해서 기도하며 또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했었느냐? 너는 어찌 그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너의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느냐? 왜 사랑으로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고 생각하지 못했느냐?”
니묄러 목사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렇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목사로서 그를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해 주지 못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못한 나에게 더 큰 책임이 있구나!”
그렇게 해서 니묄러 목사는 참회하는 심정으로 『전쟁 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써서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목사인 나에게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독일은 물론이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목사로 있으면서 내 생각이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 히틀러에 저항했을 뿐 진정 하느님을 위해 히틀러에게 무엇을 해야 했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지막 심판 때, 평생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편한 자리를 택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힘겨워했는가, 아니면 차라리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삶보다 더 가치가 있어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는가로 심판받게 됩니다. 포도밭 밖에서 놀고 있는 것보다 비록 힘은 들지만, 복음전파의 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여길 때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래서 온종일 복음을 전하고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시간이 항상 부족해야 합니다. 그 일터로 불러주신 분께 충분히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기 위해서는 나를 위한 일이 아닌 주인에게 보답하기 위한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높이 올라갑니다. 이것이 어디에서건 나를 죽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을 만나 대화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제게 “신부님, 아저씨 같아요.”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서 순간적으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판단이 되지 않더군요. 제가 스스로 잘 꾸미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제가 하는 말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 같다’라고 말이 그렇게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할아버지로 본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아저씨로 봐야 합니다. 50대 중반을 향하는 저는 생물학적으로 분명히 아저씨입니다. 이 학생은 신부니까 다른 아저씨처럼 고리타분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별 차이가 없으니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한 말에 기분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당연한 말에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고, 이 말에 나를 변화시켜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렇게 노력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모습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역시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리고 나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하면 그만입니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 말씀입니다.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에 불린 일꾼들이 똑같은 품삯을 받는다는 비유이지요. 이에 대한 많은 교부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나 의롭게 산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는 역사 전체를 뜻하며, 아담의 죄 이후 예수님께서는 그 ‘하루’의 저마다 다른 때 의로운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실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시며 그들을 훌륭한 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정하게 성령의 은총을 주심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하느님과 완전하게 하나 되게 하시고 그들의 영혼에 하늘 나라의 인장을 찍으시며 그들을 생명과 불멸로 인도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때를 채우지도 않았는데 하느님 나라에 들게 하시니 하느님의 정의가 잘못되었다고 투덜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관대함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편견에 빠져서 자신이 불공평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로 하느님의 선하심은 엄청납니다(자신이 오후 다섯 시에 불림을 받은 일꾼이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똑같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공평하지 않으십니까?).
결국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모습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우리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원칙에 맞춰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베풀어주기를 기뻐하면서 죽음을 근심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남이 네게 구할 때, 네가 줄 수 있다면 주고, 줄 수 없다면 그 까닭을 알려 주어라. 그렇게 하면 주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성내지 않을 것이다. 교활한 꾀를 피워 거절해서는 안 된다.
- 성 예로니모
아이들은 사는 것을 배운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된, 도로시 론 론트의 글입니다.
- 만약 아이가 나무람 속에서 자라면 비난을 배운다.
- 만약 아이가 적개심 속에서 자라면 싸우는 것을 배운다.
- 만약 아이가 비웃음 속에서 자라면 부끄러움을 배운다.
- 만약 아이가 수치 속에서 자라면 죄의식을 배운다.
- 만약 아이가 관대 속에서 자라면 신뢰를 배운다.
- 만약 아이가 격려 속에서 자라면 고마움을 배운다.
- 만약 아이가 공평함 속에서 자라면 정의를 배운다.
- 만약 아이가 보호 속에서 자라면 믿음을 배운다.
- 만약 아이가 인정 속에서 자라면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배운다.
- 만약 아이가 받아들임과 우정 속에서 자라면 세상에서 사랑을 배운다.
우리 아이가 잘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환경을 어른이 만들어 줘야 할까요? 그리고 이를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는 거두어들이시고 우리는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 20,15)
가장 비참했던 그 때를 기억해본다. 하느님의 도움과 위로가 간절했던 그 때를 떠올려본다. 그럴만한 사연과 사정이 있는 우리들 아픔이다. 아픈 모든 이들에게 후하게 구원의 문을 열어젖히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지나치는 모든 시간이 은총이고 선물이었다.
후하신 하느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 하나도 버리지 않으신다. 인간은 가혹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끝내 후하시다. 연민의 길을 걸어가신다. 조건과 무조건 사이에 하느님과 우리가 있다. 우리에게 삶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삶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다. 우리를 찾기 위해 직접 길을 나서시는 주님의 조건없는 사랑이시다.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갈 곳 없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
욕심과 시기를 내려놓고 감사와 찬미를 배워야 할 우리들 삶이다. 허망한 삶이 아니라 보시니 참 좋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두어들이시고 우리는 내려놓아야 한다. 한순간도 은총 아닌 것이 없었다. 한없이 주시는 하느님 앞에 시기와 원망을 내려놓는다. 가장 좋은 하느님의 때를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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