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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8월 16일 (월)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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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

 

 

21년 8월 16일 (월)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을 섬겼지만,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약탈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8월 16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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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판관 2장 11-19절

 

주님께서 판관들을 세우셨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무렵 

11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2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 

13 
그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겼다. 

14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어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겨 버리시고 약탈당하게 하셨다. 또한 그들을 주위의 원수들에게 팔아넘기셨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원수들에게 맞설 수 없었다. 

15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들이 싸우러 나갈 때마다 주님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심한 곤경에 빠졌다. 

16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17 
그런데도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이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빨리도 벗어났다. 그들은 조상들의 본을 따르지 않았다. 

18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판관들을 세우실 때마다 그 판관과 함께 계시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억압하는 자들과 학대하는 자들 앞에서 터져 나오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19 
그러나 판관이 죽으면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완악한 행실과 길을 버리지 않았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백성들은 주님이 없애라 하신 민족들을 없애지 않고, 오히려 그 민족들과 어울리면서, 그 행실을 따라 배웠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그 우상들을 섬기니, 제 스스로 덫에 걸렸네. 자기네 아들딸을 마귀에게 바쳤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자기네 행실로 더러워지고. 자기네 행위로 불륜을 저질렀네. 주님은 당신 백성을 향하여 분노를 태우시고. 당신 소유를 역겨워하셨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그분은 거듭거듭 구출해 주셨건만, 자기네 뜻만 좇아 그분을 거슬렀네. 그래도 그분은 그들의 외침을 들으시고, 그들의 곤경을 굽어보셨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9장 16-22절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16일 (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16일 (월)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16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어떤 청년이 질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부자 청년이 이미 그런 것들은 잘 지켜 왔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준 뒤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이라는 형용사는 네 복음서 가운데 오직 마태오 복음에만 세 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제자들과 군중을 대상으로 이웃 사랑을 넘어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고 이미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43-48 참조). 

유다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때 완전하게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완전은 전심전력을 다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몸과 마음을 전적으로 다 바치는 데 있습니다”(박영식, 『마태오 복음 해설』, 157면).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뛰어넘는 훨씬 더 큰 사랑이 요구된다고 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은 ‘수도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입니다. 성인은 어느 날 이 말씀을 듣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을 닮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것이 수도 생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안토니오 성인과 똑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웃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써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허를 찔리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찾으려고 주님께 온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하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십계명에 해당되는 그런 것들은 다 지켜왔다고 청년이 대답하고,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는지 다시 여쭈었을 때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그래서 완전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님께서는 또 일러주십니다. 

완전하게 되고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우선 이웃 사랑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들 그러니까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같은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최소한 남을 해치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하지 말아야 할 사랑'은 다 실천해왔고 더 나아가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과 같은 '해야 할 사랑'도 실천해왔다고 답하며 이것 말고도 더 해야 할 것이 있는지 젊은이는 묻습니다. 

그러니까 완전을 위해 또는 완전한 사랑을 위해 더 나아가야 할 것이 있냐는 질문인데 이에 주님께서 완전한 사랑을 위한 마지막 퍼즐을 말씀해주십니다.


- 가진 것을 다 파는 것

-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

-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했다고 자신있게 답했는데 정말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했는지 의문을 제기하시는 것이고, 정말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이웃을 위해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가진 것을 파는 부분에서 주님께서 다 팔아서 주라는 말씀은 없어도 제 생각에 다 팔아 다 주라는 말씀일 것 같은데 이 <다>가 걸리는 겁니다. 

다 팔지 못하고 일부만 팔고, 다 주지 못하고 일부만 주는 삶을 일생 살아왔는데 이것이 그러니까 아직도 제가 불완전한 부분입니다. 

오늘 부자 청년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다 실천해왔다고 하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하고 여쭙는데 주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자신이 다 실천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만 허를 찔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 부자 청년처럼 오늘 주님 말씀에서 제가 허를 찔린 겁니다. 

그런데 완전한 사랑의 관점에서 더 큰 '허'가 있습니다. 곧 주님을 따름입니다. 

사실 주님을 따름이 완전한 사랑의 가장 마지막 퍼즐입니다. 아니 가진 것을 다 팔아 이웃에게 주는 것도 다 이것, 주님을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런 허를 찔렸는데 여러분도 이런 허를 찔리는 오늘이 되시길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영원한 생명에 관해 묻습니다. 그런데 묻는 방식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그는 선한 일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사랑’에 관한 율법입니다. 그가 ‘행동’에 관해 물었기에, ‘행동 지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행동으로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완전함을 추구하는 그 사람에게 가진 것을 팔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팔아야 합니다. 

돈에 대한 욕구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기에, 그리스도를 따름은 곧 욕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율법은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그분의 법이 내 안에서 실현되게 만들어야 완성됩니다. 자기 힘만으로 지키려는 율법은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행동으로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인의 힘으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한계에 부딪힙니다. 왜냐하면, 자기 욕구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가 입에 뼈다귀를 물고 주인이 주는 밥을 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소유욕이 살아있는데 내어주려고 사랑하려 하니, 결국 이도 저도 안 됩니다. 

영화 ‘싱글라이더’(2017)는 일밖에 모르던 한 가장이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삶을 무겁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증권회사의 지점장 강재훈은 회사가 부실채권을 팔아 피해자가 많이 생기고 회사가 와해하자 죄책감과 상실감을 느낍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와서 서재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호주로 유학 보낸 아내와 아들의 집 주소를 손에 적고는 술을 마십니다. 그러다 아내와 아들이 보고 싶어 무작정 호주로 떠납니다. 

호주에 도착하고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찾아가지만, 집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 슬쩍 들어가 살펴봅니다. 그러다 아내와 아들이 돌아오는 소리에 급히 집을 나가서 목격한 건 아내 이수진과 아들, 옆집 아저씨 크리스와 그의 딸 일행이 가족처럼 들어와 놀고 저녁을 먹는 모습입니다. 수진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고 그만두었다던 바이올린도 다시 연주를 시작한 상태입니다.
 
다음 날 그는 아내의 애인으로 의심되는 크리스를 미행합니다. 계속 미행하다가 크리스가 한 병원의 병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보고 본인도 들어가는데 거기에는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있는 크리스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재훈은 복잡한 표정으로 병원을 나오고 다시 집으로 간 재훈은 수진이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려고 오디션을 준비하는 걸 몰래 지켜보고 아내가 주체적인 삶을 찾은 모습을 봅니다. 지금까지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 때문에 아주 오스트리아에 남기로 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수진이 오케스트라 면접을 보는 동안 재훈은 수진의 집에 돌아와서는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동네 노인의 목격에 의하면 재훈의 아들이 통증으로 쓰러져 크리스가 들어와 발견하고 재훈의 아들을 안고 맨발로 뛰어서 병원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재훈은 수진과 크리스 몰래 병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만납니다. 아들을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아빠 맞냐며 기뻐하고 재훈은 아들에게 괜찮냐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그동안 자신이 아내와 아들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재훈은 크리스와 수진의 불륜 광경을 목격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자리를 떠납니다.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집에 몰래 들어온 재훈은 수진이 작성한 영주권 신청서를 보고 아직도 자신을 남편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트립니다. 재훈은 잠자는 아들 옆에 누워서 아내와 아들이 매일 즐겁게 지내길 빌고는 집 밖에 나와 오열합니다.

아들은 수진에게 아빠가 와서 자신과 얘기했다고 하고, 수진은 그럴 리 없다 하지만 의아해하며 한국 집으로 전화를 하니 벨만 울립니다. 아내 수진은 크리스에게 사과하고 이성으로서의 관계를 거절하고 영주권 신청서를 준비하고 재훈에게 알리려 한국 집에 전화하지만, 통화가 되지 않자 한국 집의 관리소장에게 전화해 비밀번호를 알려줄 테니 남편이 잘 있나 확인해달라 부탁합니다. 

남편의 회사가 망한 것을 안 수진은 한국에 있을 재훈을 걱정해 열쇠수리공까지 불러 한국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건 컴퓨터 앞에 조용히 자는 듯 죽어있는 재훈이었습니다. 

재훈은 가정을 위해 일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정에 무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랑의 일환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일도 잃고 가정도 잃었습니다. 다 사랑 때문에 한 일이었지만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내가 하는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지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진도 남편을 사랑했지만, 자신에게 무심한 재훈보다는 옆에 있으며 자신과 아들을 챙겨주는 크리스에게 더 끌립니다. 불륜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죽었습니다. 수진도 사랑은 했지만, 자기 욕심을 버릴 수 없어서 불륜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내가 하려는 사랑엔 반드시 ‘나’가 살아있어서 그 나의 소유욕, 성욕, 이기심이 발동하기 때문에 항상 이런 결말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부자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마음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승님, 제가 사랑을 쟁취하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해서 사랑이 된다면 나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 자아가 하느님처럼 살아있기 때문에 사랑으로 소유하려던 것을 잃으면 그 절망감에 견딜 수 없게 됩니다. 

내가 하려는 사랑은 ‘소유’하려는 마음이기에 항상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소유함은 창조자의 속성입니다. 피조물은 서로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끼리 서로 너는 내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끼리 서로 “너는 내 거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들 모두의 주인은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예수님의 충고처럼 ‘가진 것을 버리고’, 곧 ‘내가 창조자가 아닌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참 창조자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부모 밑에서는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죽었다고 할 때 나의 생명까지 끊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것이고, 나까지 잘못돼 버리면 부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소유’가 되지 않고 적정한 ‘분리’ 안에서 성취됩니다. 

따라서 사랑은 부모가 있는 형제 안에서 더 완전하게 성취되듯,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이시고 나를 창조하신 주님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할 때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느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가 되고 나는 부모의 뜻만 따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할 때 모든 것은 하느님 것이 되고 그래서 나의 모든 소유욕이 사라져 마치 태양이 지구를 사랑하듯 상대가 있거나 없거나 그저 사랑의 빛을 보낼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실천하지 않는다면 또 의지를 세워 실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신부님, 이곳에서 피정을 하면 기도가 정말 잘 되겠어요.” 
 
갑곶성지에는 피정의 집이 있는데 워낙 조용하고 또 분위기가 좋아서 기도가 저절로 될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기도가 잘 안 되는 것이 정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 안에 있으면 볼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피정의 집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스마트폰도 꺼놓고, 단순하게 침묵 속에서 머무를 뿐입니다. 이때 보이는 것이 바로 자기 마음속에 있던 어두운 것들입니다. 이 어두운 것들이 계속 보이는데 과연 기도가 잘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많은 피정 프로그램의 시작은 거의 모두가 자기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보게 하는 죄 묵상입니다. 
 
피정은 쉽지 않습니다. 그냥 쉬기만을 바란다면 좋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내면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이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30일 동안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지요. 또 옛날 성화를 보면 수도자들이 사막에서 마귀들로부터 시달림을 받는 모습 모두가 내면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이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단순히 피정 자체에 참석했다는 것만으로 하느님을 잘 따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는 과거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부자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가 말하는 선한 일은 곧 율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훌륭한 삶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한 이는 아무도 없고 오직 하느님만이 선하신 분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젊은이가 기대한 대답을 하는 대신 율법을 일러 주기만 하십니다. 이는 율법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가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다 지켜왔다고 자랑하자,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전한 사랑의 실천을 할 것을 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의 정신에 따라 온전하게 사는 것입니다. 
 
부자 젊은이가 슬퍼하며 떠나간 것은 그가 나쁜 뜻을 품고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의지가 너무 나약했음을 말해 줍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의지를 세워보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영적 생활이 있지만, 실천하지 않는다면 또 의지를 세워 실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은 고난으로 가득하지만, 고난의 극복으로도 가득차다.

- 헬렌켈러

 

 

아픔을 맞이했을 때 ...

 

노르웨이의 한 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열세 살에는 자신을 어머니처럼 돌봐주었던 누나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뿐인 여동생도 몇 년 뒤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계속된 가족의 불행은 그를 신경쇠약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양이 붉게 물든 하늘을 보다가 마치 자연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느낌을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혼자서 불안에 떨며 자연을 관통하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느꼈다.” 
 
이 사람은 에드바르 뭉크이며, 그의 작품이 바로 ‘절규’입니다. 
 
아픔을 딛고 삶을 새롭게 보려는 그의 노력이 이런 명작을 그릴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아픔을 맞이했을 때 다르게 보는 사람만이 아픔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아픔 자체에 매립되는 사람은 슬픔과 절망 외에 그 어떤 것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물질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마태 19, 21)

여름이 멈추어야 가을이다. 멈추는 것이 성숙이다. 많은 물질로 하느님을 만날 시간이 없는 애처로운 우리들 삶이다. 매순간 하느님을 놓치며 살고있는 우리들 시간이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아픈 현실이다. 

복음의 토대는 나눔과 감사에 있다. 감사는 가난한 이들에게 참된 나눔을 실천하는 기쁨에 있다. 우리가 가진 재산이 우리의 인격이 될 순 없다. 우리의 재산과 우리의 인격을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을 멈추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물질에 지배당하는 삶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물질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물질의 충만함은 관계의 충만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욕심과 욕망을 멈추는 것이 삶의 참된 변화이다. 

복음은 우리 자신을 보게한다. 우리의 걱정과 우리의 뜻이 하느님을 앞서갈 수는 없다. 물질도 생명도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죽는 것이 잘 따르는 삶이다. 물질에 죽고 욕심에 죽고 넓은 길에서 죽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가 작아지는 길이 주님을 따르는 복음의 길이다. 복음은 비우고 나누고 감사하는 기쁨의 좁은 길이다. 욕심을 버린 이들만이 통과하는 좁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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