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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8월 13일 (금)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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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

 

 

21년 8월 13일 (금)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모이게 하고 온 백성에게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일을 말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아내를 버려도 되냐는 바리사이의 질문에,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8월 1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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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여호 24장 1-13절

 

나는 너희 조상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왔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된 땅으로 데려갔다.

 

그 무렵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 아브라함의 아버지이며 나호르의 아버지인 테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들은 강 건너편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런데 나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편에서 데려다가, 온 가나안 땅을 돌아다니게 하고 그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사악을 주고, 


이사악에게는 야곱과 에사우를 주었다. 그리고 에사우에게는 세이르 산을 주어 차지하게 하였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이집트로 내려갔지만, 


나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집트 가운데에서 그 모든 일을 하여 그곳을 친 다음, 너희를 이끌어 내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렇게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다. 그 뒤에 너희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이 병거와 기병을 거느리고 갈대 바다까지 너희 조상들의 뒤를 쫓아왔다. 


그래서 너희 조상들이 주님에게 부르짖자, 주님이 너희와 이집트인 사이에 암흑을 갖다 놓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그들을 덮쳐 버렸다. 이렇게 내가 이집트에서 한 일을 너희는 두 눈으로 보았다. 너희가 광야에서 오랫동안 머무른 뒤에, 


나는 너희를 요르단 건너편에 사는 아모리인들의 땅으로 데려갔다. 그때에 그들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으나,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어, 너희가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패망시킨 것이다. 

9 그 뒤에 모압 임금, 치포르의 아들 발락이 나서서 이스라엘에게 맞서 싸웠다. 그는 너희를 저주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을 불러왔다. 

10 
그러나 나는 발라암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해 주었다. 나는 이렇게 너희를 발락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11 
너희가 요르단을 건너서 예리코에 이르렀을 때에는, 예리코의 지주들, 곧 아모리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기르가스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너희에게 맞서 싸웠다. 나는 그들도 너희 손에 넘겨주었다. 

12 
나는 또 너희보다 앞서 말벌을 보내어, 아모리족의 두 임금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었다. 그렇게 한 것은 너희의 칼도 너희의 화살도 아니다. 

13 
그러고 나서 나는 너희에게 너희가 일구지 않은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않은 성읍들을 주었다. 그래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또 직접 가꾸지도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게 되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신들의 하느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인들의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사막에서 당신 백성을 인도하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힘센 임금들을 내리치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뛰어난 임금들을 죽이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그들 땅을 재산으로 물려주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당신 종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주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원수에게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하느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9장 3-12절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저희를 구원하시고 진리의 빛으로 저희를 굳세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13일 (금)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13일 (금)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13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주는 이는 받는 이를 필요로 한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당시 유다인들은 모세 율법을 근거로 하여 이혼을 쉽게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에는 ‘아내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거나 눈에 들지 않는 경우, 남편은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4 참조)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철저히 남성 중심의 법이었습니다. 

당시 어떤 이들은 이를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에만 이혼할 수 있다고 엄격하게 해석하기도 하였으나, 또 다른 이들은 사소한 이유라도 이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논란 가운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뜻을 밝히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에 따라 방종주의자 또는 엄격주의자로 비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의도를 아시고 더욱 근본적인 혼인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세 1,27 참조)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게”(창세 2,24)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으로, 곧 사랑의 구조로 만드셨습니다. 

사랑의 구조란 ‘주는 이는 받는 이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졌기에 사랑을 주고자 할 때 받는 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내어 주고 받아들여 한 몸을 이루고, 죽기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혼인이 부부간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는 것이라면, 사제나 수도자들처럼 독신으로 사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헌신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좋아하는 것은 꼭 좋은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유를 좋아하고 자유로워야 합니다. 인간이 자유로워야 하는 이유는 자유가 우선 인간의 기본권이기 때문인데, 그런데 기본권이라고 함은 자유가 남이 주거나 뺏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침범할 수 없도록 누구에게나 주어진 권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유로워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자유가 사랑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사랑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지요. 

내가 만일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면 사랑받고 싶은 그에게 자유를 줘야 합니다. 사랑을 강요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자유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전근대를 지나 근대에 들어서면서 개인이 탄생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개인이 탄생하였다고 함은 없던 개인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집단에 의해 무시되고 희생된 개인이 개인으로 있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전근대 시대에는 집단만 있고 개인과 개인의 자유는 무시되고 없었습니다. 무시라는 말이 없을 無에 볼 視니 있는데도 없다고 보는 거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집단에 의해 개인이 무시된다는 것은 엄연히 개인이 있는데 개인은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 자유를 박탈한다는 뜻이지요. 

그 대표적인 것이 혼인입니다. 결혼하는 것은 나인데 결혼 상대를 내가 아니라 집안끼리 정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개인의 자유와 사랑의 자유를 더 중대하고 심각하게 무시하고 침해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근대에 들어 결혼 풍습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결혼, 사랑으로 인연을 맺는 결혼으로 바뀐 것은 바람직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반드시 사랑의 자유여야만 바람직하지 그렇지 않은 자유는 바람직하다 할 것이 못되고 특히 결혼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렇지요. 

근대를 지나 탈근대 시대에 접어든 지금 개인주의와 자유는 타락을 하여 사랑과 일치는 사라지고, 이기주의적이고 배타적인 개인주의가 되었고 개인은 고립을 살게 되었지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듯이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좋으면 결혼하고 싫어지면 이혼하게 되었으며 이마저도 싫은 사람은 아예 결혼하지 않고 혼족과 혼밥과 혼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자주 지적하듯이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말버릇도 이상합니다. 사랑한다고 해야 할 것을 '나 너 좋아해'라고 합니다. 좋아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실은 싫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다 자기중심적이고 소유적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좋을 때는 소유하고 싫어지면 물건 버리듯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놀랍게도 그 옛날 바리사이들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며 마치 물건 버리듯 아내를 버려도 되는지 묻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같이 살 생각을 하지 않고 버릴 이유만 찾는 겁니다. 놀랍게도 자유연애를 하는 지금이든 그 옛날이든 사랑하지 않으면 사람을 사물화하여 좋을 때는 소유하고 싫어지면 버리게 되는 거지요.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인간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며, 사랑하라고 짝지어주신 것이며 마음대로 소유했다가 마음대로 버려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의 선택이 아닌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저에게 들리는 오늘 이 아침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배우자만을 위한 그런 사랑은 없다.

 

오늘 복음은 결혼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혼의 가장 많은 이유가 ‘성격 차이’라고 합니다. 성격의 차이로 이혼이 가능한 것일까요? 성격이 똑같으면 더 못 살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는 질문에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혼이 많은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배우자를 위해 결혼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배우자만을 위한 사랑이 가능할까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아름다운 사랑의 비극이 있습니다. 둘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하려다가 로미오도 죽고 줄리엣도 따라서 죽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상대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약을 먹고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는 줄리엣을 발견한 로미오는 자신도 자살합니다. 줄리엣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깨어나서 자기 때문에 로미오가 죽은 것을 보고 줄리엣도 자살합니다. 

이것이 정말 아름다운 사랑일까요? 상대가 없으면 죽어야만 하는 사랑은 그것 자체로 ‘상대를 위한 사랑’이 아닌 ‘나를 위한 사랑’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없어져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죽겠다는 말은 상대를 이용해 나의 행복을 채우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사실 그런 마음으로 결혼을 했어도 그 결혼에 실패합니다. 사랑은 결코 이기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가족들이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사랑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것이 제 부모를 떠나 새로운 사람과 결합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도 부모를 떠나 사랑을 완성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부모를 떠나서는 절대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더는 행복을 주지 못하면 그런 사랑은 곧 비극으로 끝나고 맙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거짓으로 나의 행복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아를 버리는 순종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아를 통제할 줄 알도록 나를 교육해 준 분들은 부모님입니다. 따라서 부모에게 순종하여 결혼하는 것이 혼자 결정하여 결혼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가는 결혼보다 훨씬 오래갑니다. 

부모를 위한 결혼처럼 보일 수 있어도 누군가를 위한 결혼을 하며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결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부모 앞에서만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애라도 씁니다. 

그렇게 부모를 위해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 정도만 해도 부모와 상관없이 혼자 사랑하겠다는 이기심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혼도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를 위한 결혼을 해도 자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바라기에 부모의 마음을 따르다가는 자신도 그런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칫 ‘정략결혼’처럼 됩니다. 

부모를 위한 결혼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모의 마음에 안 들면 자신도 배우자를 마음에 안 들어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모가 반대하면 결혼도 못 하고 이혼도 못 하고 때에 따라서는 이혼을 해야만 합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부모의 반대로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흔들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기적인 사랑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모도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자기 생존을 위해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이타적인 분은 창조자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위한 사랑은 그분의 뜻에 따라 이타적인 사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에게 결혼을 허락받을 줄은 알면서도 왜 하느님께 허락받는 것은 생각하지 못할까요? 

팔다리가 없었던 닉 부이치치는 8살 때 이미 자살 시도를 했고 아내의 손을 잡고 걸을 수도 없는 자신과 누가 결혼해 주겠느냐는 걱정을 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닉 부이치치’는 일본계 미국인 ‘카나에 미야하라’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미야하라에게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지만, 미야하라는 평생을 그 사람과 함께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닉 부이치치는 자신들의 사랑을 하느님께 맡겨보자고 합니다. 1년 동안 만나지 말고 1년 뒤에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사랑이 더 증가하였다면 그것을 하느님께서 사랑을 허락해 주신 표징으로 믿자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미야하라는 단 몇 번 본 그 팔다리 없는 사람을 1년 뒤 더 사랑하게 될 것이란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년 뒤 그녀는 하루하루 닉에 대한 사랑이 더 증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을 위한 사랑은 하느님을 위하는 마음 때문에 자아의 이기심이 죽으며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하느님 사랑을 닮은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온전히 부모로부터 떠나게 됩니다. 부모가 주는 이기적인 뜻으로부터 떠나게 되어 더는 부부의 사랑이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랑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랑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은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맺어주시지 않는 사랑은 항상 이기적이고 그래서 한계를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함께 하는 우리

 

미국의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대통령으로 있을 때는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소리도 들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퇴임 후의 왕성한 활동 특히 국제적 분쟁 조정과 인권 신장에 공을 세워 노벨 평화상까지 받게 됩니다. 그리고 부부 관계의 모범은 많은 이의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몇 년 전의 결혼 70주년을 맞은 해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결혼 초기에 서로의 공간을 허용하기로 약속했어요. 아내에게는 그녀만의 생각, 목표가 있죠. 어떤 부분은 나와 다릅니다. 나는 아내가 자기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부부로 함께 잘 살아가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개인의 영역을 없애고 ‘우리’의 영역만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만들려고 하는 개인의 영역을 철저하게 부수려고 하고, 이를 위해 커다란 싸움까지도 불사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영역보다 ‘나’의 영역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의 영역을 인정할 때, ‘나’라는 개인 고유의 영역이 존중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며 이혼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남편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이혼’이었습니다. 사실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라면 혼인을 해소하는 법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전혀 갖지 못했고, 그래서 아내의 영역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만 있으면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뿐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마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말씀도 하지 않고, 또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합니다. 주님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영역 안에 주님의 영역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각자 서로의 영역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둘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애초의 존엄성을 복구하는 오늘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면서 함께 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통과하기 전에는 지금 지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밟아서 통과해야 발자국이 남고 그것이 쌓여야 길이 된다.

- 오소희

 

 

올바른 사랑

 

지금이야 단 한 명도 없지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만 해도 저를 좋다고 쫓아다니는 분이 있었습니다. 콩깍지가 낀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 볼 게 뭐가 있다고 말이지요. 지금이야 이렇게 웃어넘기지만, 솔직히 당시에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계셨고, 계속 전화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분은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진짜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입니다. 사랑이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잘못된 사랑을 하곤 합니다. 아이에게 자기 뜻을 강요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이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요.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올바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며,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상대방에게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만이 올바른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 12)

결혼도 독신도 추구해야 할 것은 우리의 행복이다. 너무도 빠른 인생의 시간이다. 정직한 행복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속이지 않기 위해서는 성장이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행복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을 향해 나가야한다. 

행복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정직한 여정이다. 존중이 동반되어야 할 여정이다. 의무와 책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중과 지혜이다. 갈등과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독신의 삶도 결혼생활도 십자가와 함께한다.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점도 함께한다. 그 어떤 것도 완벽하거나 완전할 수 없다. 십자가 없이는 은총도 없다. 은총의 부르심은 이와같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마다의 결혼과 독신의 기초는 어리석음에 벗어나는 믿음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맞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결혼과 독신이다.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 저마다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행복은 다채로운 감사이다. 저마다의 행복을 위해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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