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8월 12일 (목)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8. 12.
반응형

 

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

 

 

21년 8월 12일 (목)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계약 궤를 앞세우고 요르단을 건너라고 하시며, 온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강을 건너게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시며 빚을 탕감받은 악한 종의 비유를 드시고는,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8월 12일 (목)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여호 3장 7-10ㄱㄴㄹ절, 11절, 13-17절

 

주님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그 무렵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내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너를 높여 주기 시작하겠다. 그러면 내가 모세와 함께 있어 준 것처럼 너와도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너는 계약 궤를 멘 사제들에게, ‘요르단 강 물가에 다다르거든 그 요르단 강에 들어가 서 있어라.’ 하고 명령하여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였다. “이리 가까이 와서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10 
여호수아가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 일어날 이 일로써,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가나안족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1 
자,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13 
온 땅의 주인이신 주님의 궤를 멘 사제들의 발바닥이 요르단 강 물에 닿으면, 위에서 내려오던 요르단 강 물이 끊어져 둑처럼 멈추어 설 것이다.” 

14 
백성이 요르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천막에서 떠날 때에,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백성 앞에 섰다. 

15 
드디어 궤를 멘 이들이 요르단에 다다랐다. 수확기 내내 강 언덕까지 물이 차 있었는데,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물가에 발을 담그자, 

16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 아주 멀리 차르탄 곁에 있는 성읍 아담에 둑이 생겨, 아라바 바다, 곧 ‘소금 바다’로 내려가던 물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백성은 예리코 맞은쪽으로 건너갔다. 

17 
주님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한복판 마른땅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건너서, 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알렐루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야곱 집안이 낯선 말 하는 민족을 떠날 때, 유다는 그분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나라가 되었네. 알렐루야.

바다가 보고 달아났으며, 요르단이 뒤로 돌아섰네. 산들은 숫양처럼 뛰어다니고, 언덕들은 어린양처럼 뛰놀았네. 알렐루야.

바다야, 너 어찌 달아나느냐? 요르단아, 어찌 뒤로 돌아서느냐? 산들아, 어찌 숫양처럼 뛰어다니고, 언덕들아, 어찌 어린양처럼 뛰노느냐?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8장 21-35절, 19장 1절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저희를 구원하시고 진리의 빛으로 저희를 굳세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12일 (목)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12일 (목)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12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인간이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

 

베드로 사도가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예수님께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한 번도 어려운데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니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지 예수님께서는 다음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어떤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합니다. 임금은 일만 탈렌트(1탈렌트=6천 데나리온)라는 엄청난 빚을 진 종의 부채를 탕감해 주고 그를 놓아줍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자마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1데나리온=당시 노동자의 일당)을 빚진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며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임금이 이 종을 불러들여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

이 비유는 우리 각자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줍니다.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것일 뿐 아니라, 참된 하느님 자녀의 식별 기준이 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9항). 이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실재입니다. 이는 부모가 자기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녕 애끊는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온유한 배려와 너그러운 용서가 넘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사랑입니다”(「자비의 얼굴」, 6항).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살아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받은 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때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인간이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무자비의 장애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은 베드로 사도의 용서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몇 번을 용서해야 하는지? 일곱 번이면 되는지? 

이에 주님께서는 용서는 횟수를 따지며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그리고 용서는 끝이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횟수를 따지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또는 마지못해 하는 마음과 자세의 표시이기 때문이고 사랑의 용서가 아니라 의무의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한 다시 말해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한 매번 용서하고 끝까지 용서하지요. 부모가 자식을 용서하는데 횟수를 정해놓고 용서합니까? 눈감을 때까지 용서하지요. 

우리는 무한히 큰 사랑의 용서의 예로 부모의 용서를 드는데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용서를 예로 드시며 자비한 임금과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드십니다. 

자비한 임금은 무자비한 종의 만 탈렌트 빚을 면해 주는데 무자비한 종은 백 데나리온 빚 때문에 동료를 감옥에 처넣습니다. 한 탈렌트가 육천 데라리온이니 큰 용서를 받고 작은 용서도 하지 못하는 종이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하느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로 이어지지 않는 문제에 주목할 수도 있겠지만 하느님 자비가 우리의 자비로 이어지지 않는 것에, 그러니까 단절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무자비한 종은 용서받고도 왜 무자비하였는가? 

그것은 용서는 받았지만 자비는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용서만 받고 자비는 받지 못하는 장애인이었던 것입니다. 

신체장애인이 아니라 자비 장애인이랄까 사랑 장애인입니다. 그것은 아홉 명의 이스라엘 나병환자와 한 명의 이방인 나병환자가 같이 치유받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돌아온 것은 이방인 나병환자의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이방인은 치유와 함께 사랑을 체험한 데 비해 이스라엘은 치유와 사랑이 당연한 것이었기에 자기가 원하는 것만 취하였고 그래서 사랑과 구원은 체험치 못햇던 겁니다. 

자식들이 종종 그러하지요. 부모가 밥해 주는 것 당연하게 여기고, 사랑도 당연하고 용서도 당연하게 여깁니다. 

아무튼, 무한히 자비하신 하느님으로부터 그렇게 큰 용서를 받고도 작은 용서도 실천치 못하는 무자비의 장애를 부끄러워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고해성사 수천 번을 해도 죄가 용서되지 않는 경우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주제입니다. 임금이 일만 탈렌트, 곧 수조 원의 돈을 탕감해 주었지만, 그 종은 백 데나리온, 곧 수백만 원의 돈 때문에 친구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임금은 돈을 탕감해 준 것을 다시 물립니다. 그러니까 한 번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서 그 용서가 영원히 지속하는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나의 자세에 따라 용서가 번복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언제일까요? 내가 타인을 용서하지 않을 때입니다. 용서는 마치 내가 통로가 되어 받은 용서가 타인에게 흘러갈 때 나의 것이 되는 것이지 받기만 해서는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받는 모든 것을 똑같이 그것을 흘려보낼 때 비로소 나의 것이 됩니다. 

‘이방원의 난’이란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개국공신인 정도전을 죽이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방번, 방석을 모두 죽이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오른 사건을 말합니다. 이방원에게 이런 힘을 실어주었던 것은 부인 민씨의 가문이었습니다. 민씨 가문은 이방원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권력을 쥐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민씨에게는 얼굴이 어여쁜 김씨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민씨는 장차 임금이 될 이방원이 여종에게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얼굴을 싸매고 다니도록 하였습니다. 민씨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권력이 또 양분되어 형제간에 칼부림이 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집에 살면서 여종의 그러한 행색을 보지 못할 리 없는 이방원은 그 여인에게 푹 빠지게 됩니다. 

민씨는 여종을 죽이는 대신 내쫓아 사라지게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을 안 이방원은 아내에 대한 분노로 가득합니다. 어쨌든 이방원은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태종 임금이 됩니다. 그리고 민씨는 원경왕후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때 태종은 한 사람을 부르는데 아기를 안고 나타난 김씨입니다. 태종은 이미 김씨를 찾아 아기를 출산한 것입니다. 그리고 효빈 김씨로 후궁으로 삼습니다. 분노하는 민씨 세력에 태종은 후궁들을 더 들여 권력을 분산하여 민씨 세력의 휘둘림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출처: ‘태종 이방원이 아내 원경왕후의 눈을 피해 취했던 미모의 여종’, 유튜브, ‘야사TV’] 

김씨는 권력을 쥐기 위해 태종을 독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결과는 그 시샘 때문에 오히려 태종의 마음을 잃게 된 것입니다. 만약 태종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물론 후궁을 두기는 하였을지라도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만든 민씨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접지 않았을 것입니다. 흘려보내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내가 소유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 생명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흘려보내는 것만 내 것이 됩니다. 

만약 돈을 엄청나게 벌어놓고 하나도 쓰지 않고 죽었다면 그 사람은 돈은 소유했던 것일까요? 돈은 쓰는 것만 나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휴짓조각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모기가 태어나서 피를 좋아하는 욕구를 받았는데 이것을 쓰지 않았다면 그 욕구는 자신의 것일까요? 굶어 죽습니다. 무엇이든 쓰는 것이 나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두 커다란 호수가 있습니다. 흘려보내는 갈릴래아 호수이고 모아들이기만 하는 사해라는 호수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생명의 바다이고 사해는 죽은 바다입니다. 이 큰 상징적인 지형만으로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흘려보내지 않는 용서는 나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수천 번 고해성사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 고해성사로는 용서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처럼 내가 받은 용서를 흘려보내 주지 않으면 다시 용서받지 못한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을 믿는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까?

 

아기를 보면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밝게 웃는 모습을 보면 세상의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천사로 생각해서 그럴까요? 아기가 자신의 불편함을 표시하는 울음도 예뻐 보입니다. 
 
언젠가 아이를 데리고 성지를 방문한 어느 젊은 부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너무 예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리키며 이 부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랑 사니 얼마나 행복하세요?” 
 
이 질문에 남편은 웃으면서 제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말을 합니다. 
 
“신부님, 잘 때만 천사에요.” 
 
제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해보니 거의 모든 부모가 공감하시더군요. 그렇다면 아이도 죄를 짓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천사 같은 아이이지만, 이 아이도 잘못을 하고 때로는 죄를 짓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 아이들을 닮으라고 하셨을까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철저하게 부모에게 의탁하는 모습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죄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을 믿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주님과 맺어야 하는데,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주님을 믿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 질문합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무한정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흔일곱이라는 숫자를 말씀하신 것은 하나부터 일흔일곱까지 숫자를 세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에 대해서는 용서하는 횟수도 세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매정한 종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나옵니다. ‘만’이라는 숫자는 고대 근동에서 계산할 때 가장 높은 단위의 수이고, ‘탈렌트’는 가장 큰 화폐 단위입니다. 엄청난 액수로서 이만큼 빚을 진 종은 갚을 가망이 전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오로지 주인의 자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즉, 우리 인간도 이런 상황에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 우리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내 이웃에게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조금의 잘못에도 용서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복수하려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의도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까? 믿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따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간보다 소중한 단 하나는 바로 그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이다.

- 리오 크리스토퍼

 

 

감탄할 일이 많아야 합니다.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감탄할 일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삶이 힘든 건 감탄사가 사라져서다. 자판기 앞에서 혹은 식사 때 ‘와’, ‘이야~~’를 연발한다면 함께 하는 사람들과 정서적 자아실현을 이루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우리는 감탄하려고 산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와~~”하고 감탄하고, 운전하다가도 안전 운전과 모범운전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와~~”하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책을 보다가도 얼마나 많은 감탄을 쏟을 수 있습니까? 
 
생각해보니 감탄하지 못해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감탄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용서의 장애물은 기대감이다.

 

"몇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 21) 

용서의 현주소를 다시금 보게된다. 용서로 완성되는 우리들 삶이다. 함께 나누어야 할 용서의 본질이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길을 끊임없이 용서하시며 걸어가신다. 용서는 용서 자체로 아름답고 고귀하다. 

용서의 장애물은 기대감이다. 용서란 용서의 기대감과 용서의 손익계산마저 내려놓는 것이다. 용서가 우리의 인격을 고양시킨다. 용서는 실천하지 않으면 원한과 보복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구원은 용서의 승리이다. 매일매일 용서가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용서로 얻게되는 부활의 삶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