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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8월 11일 (수)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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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

 

 

21년 8월 11일 (수)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아 수도 생활에 대한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습니다. 

수도 생활에 대한 집안의 반대도 심하였으나, 오히려 동생 아녜스마저 언니인 클라라 성녀의 뒤를 따라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철저하게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계속하였습니다. 

1253년 클라라 성녀가 선종했고 2년 뒤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이 시성하였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자 이스라엘 자손들은 삼십 일 동안 애곡한 뒤에, 모세에게 안수받은 여호수아의 말을 따릅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타이르라고 하시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청하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8월 1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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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이 슬기롭고 지혜로운 동정녀는 등불을 밝혀 들고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갔네.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신명 34장 1-12절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무렵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그분께서 그를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히게 하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 그런 뒤에 모세를 애도하는 애곡 기간이 끝났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 

10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11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1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제 영혼에 생명을 주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그 이름, 그 영광을 노래하여라. 영광과 찬양을 드려라. 하느님께 아뢰어라. “당신이 하신 일들 놀랍기도 하옵니다!” 제 영혼에 생명을 주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그 위업을.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찬양 노래 울려 퍼지게 하여라. 제 영혼에 생명을 주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모두 와서 들어라.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을 들려주리라. 내 입으로 그분께 부르짖었으나, 내 혀 밑에는 찬미 노래 있었네. 제 영혼에 생명을 주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8장 15-20절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보라, 신랑이 오신다. 주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천상 선물을 나누어 받고 비오니 저희가 복된 클라라를 본받아 예수님의 수난을 깊이 새기며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11일 (수)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11일 (수)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11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클라라 수녀가 가장 좋아한 일

 

클라라 성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에 감동받아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고, 사부인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아 가난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지금도 아시시의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가보면 당시 수도 생활이 얼마나 단순 소박하며 가난과 기도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클라라 성녀의 침실은 맨바닥에 약간의 풀을 모아 침대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성녀가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가난함을 얼마나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녀가 숨을 거둔 자리에 있는 장식 없는 십자가는 그녀가 한평생 얼마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닮고자 노력하였는지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십자가를 바탕으로 한 예수님에 대한 관상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이어집니다. 1240-1241년 사라센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심한 병 중에 있던 클라라는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 시민들과 수도원을 구하고자 성광에 성체를 모시고 나가 적군 앞에 섭니다. 성녀가 기도를 마치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흘러 나와 사라센 군대는 그만 두려움에 도망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성녀의 가장 큰 미덕은 겸손한 생활입니다. 40년을 수도원장으로 지낸 그녀가 가장 좋아한 일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료 수녀들의 발을 씻어 주고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고 그 안에 있는 당신의 얼굴을 단장하십시오.” 매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라는 성녀의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되시어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극히 놀라운 겸손과 비할 수 없는 가난을 배웁니다.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바라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거울 삼아 우리를 비추어 보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뿐 아니라 모두가 주님 정배되도록

 

오늘은 성녀 클라라의 축일을 준비하는 9일 기도 중 여섯 번째 날로 주제는 그리스도의 정배인 성녀 클라라이고, 그의 정결에 대해서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얘기하면 저는 성녀 클라라가 그리스도의 정배였다는 것과 그래서 정결에서 뛰어난 성녀였다는 것에 대해 별로 강조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것은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정배보다 더 중요하고, 그래서 정결보다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녀 클라라가 그리스도의 정배로서 정결을 잘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고 그래서 이 점을 강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녀 클라라도 자신은 물론 클라라의 자매들이 그리스도의 정배로서 주님께 온전한 사랑을 드려야 함을 강조하였고 그래서 온전한 사랑을 강조하며 편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대는 이 거짓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눈먼 자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그대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 전부를 내어 주신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십시오." 

이는 성 프란치스코의 영향이 역력합니다. 프란치스코나 클라라 모두 정결을 갈림 없는 사랑 또는 나뉨 없는 사랑으로 생각하고 우리에게 자신을 전부 주신 분에게 전부를 내어드리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같은 내용의 권고를 합니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께서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남겨 두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 클라라도 프란치스코처럼 세상 것을 멸시하라고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마음의 정결과 주님 관상에 대한 권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의 것들을 멸시하고 천상의 것들을 찾으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정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세상 것에 대한 염세주의적인 멸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것과 이 세상 것들은 그 급이 다르고,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그 급이 달라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클라라는 정결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언급을 하는데 프라하의 아네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을 사랑할 때 그대는 정결하고, 그분을 만질 때 그대는 더욱 깨끗해지며, 그분을 맞아들일 때 그대는 동정녀입니다.“ 

이 말은 클라라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동정녀 아네스 축일 찬가에 나오는 것이지만 클라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정결이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기 위한 정배이기는 하지만 정결하기에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었기에 정결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결혼하지 않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정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정배가 아닌 독신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결을 살더라도 클라라가 얘기한 것처럼 주님의 정배가 되기 위하여 정결해야 할 것이며 주님의 정배가 됨으로써 참으로 정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결과 관련하여 더 중요한 언급을 클라라는 합니다. 오늘 읽은 성녀 아네스에게 보낸 셋째 편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동정녀께서 그분을 낳으셨고, 낳으신 다음에도 동정녀로 남으셨습니다. 동정녀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태중인 작은 봉쇄 안에 그분을 모셨고, 처녀의 품으로 안으셨습니다." 

이 얘기를 통해 마리아는 동정녀일 뿐 아니라 어머니었고, 주님의 정배일 뿐 아니라 주님의 어머니셨음을 얘기합니다. 

내가 주님의 정배가 되는 것 뿐 아니라 주님의 어머니가 되어 주님을 세상에 낳아주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권고한 내용과 일치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실한 영혼이 주님께 결합될 때 우리는 정배들입니다. 신성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우리의 마음과 몸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표양으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하는 거룩한 행위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클라라 축일을 지내며 우리는 나만 주님을 사랑하고 나만 주님의 정배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어 이웃을 위해 주님을 낳아주고 이웃도 주님의 정배가 되도록 정결한 사랑을 더욱 확장시켜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의 공동체에 꼭 머물러야 하는 이유 : 사귐에 원한이 없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둘이나 셋, 그것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개인적으로 말할 자신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잘못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래서 죄가 됩니다. 개인적으로 말해줄 용기가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 잘못을 이야기해주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상대와의 감정이 상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내면에는 나의 감정도 다치기 싫고 상대도 잃기 싫은 복합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잘못을 개인적으로 이야기해 줄 용기가 없다면 어차피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집착이고 무관심입니다. 

집착과 무관심은 반대 같지만 실상 같은 심리입니다. 애인이 없을 때는 결혼 안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애인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목을 맵니다. 그러나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좋습니까? 매우 무섭습니다. 내가 떠나려고 할 때 어떤 일을 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떠날까 봐 나에게 잘못을 해도 그 잘못을 절대 말하지 못합니다. 

이렇듯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상처 입지 않기 위해 상대가 나에게 잘못하는데도 그냥 참아내고 있는 것은 다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내가 속한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삼위일체 하느님 공동체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 공동체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가족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살 수 없다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또 상처받기 싫어서 아예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혹은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집착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아니면 더는 갈 곳이 없기 때문이고, 자기 안에 고립되는 이유는 더는 아프기 싫어서입니다. 두 가지 이유를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못해도 그냥 혼자 끙끙 앓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던가를 선택합니다. 

김창옥 강사가 ‘어쩌다 어른’에 나와서 ‘학창시절 많이 놀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강의한 것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학교 다닐 때 놀던 여자들이 시집을 잘 갈까요? 시집을 잘 간다는 것을 세속적으로 표현해 볼게요. 첫 번째 남편이 경제력이 매우 좋습니다. 둘째 남편과 너무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셋째 그 여성은 이제 놀지 않습니다. 교회 권사님이 되셨습니다.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회개했습니다. 많이 놀아봐서 원이 없습니다. 오빠들도 너무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러니 더는 한이 없습니다. 이제 만날 오빠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넷째 항상 감사합니다. 이것을 자족(自足)이라 합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이 사람들은 원(願)이 없습니다.

놀아봤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원(願)이 한(恨)으로 바뀝니다. 원과 한의 합성어가 무엇입니까? 원 + 한 = 원한. 원한이 있는 귀신은 어디를 떠돕니까? 구천! 현대 사회의 구천이 어디예요. 백화점. 아무것도 안 사고 그냥 걸어 다닙니다.”

웃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사람은 언제 원한이 쌓일까요? 사랑받지 못할 때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의 공동체에 속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 원한으로 귀신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안에 고립되거나 사람들에게 두려워 말도 못 하는 집착으로 휘둘리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마치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물건도 사지 않으면서 백화점을 계속 걷는 사람의 모습과 같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이별의 아픔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더 나은 사람을 사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의 아픔이 감사함이 됩니다. 그 사람과 계속 사귀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누군가 사귀고 있는 사람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사람이 돌아갈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무슨 자신감 때문인지 자신에게 잘못된 것을 말해주고 충고도 해 줍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자신을 떠나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쁜 남자가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표상입니다. 그 안에 머물면 더는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습니다. 원도 없고 한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에 꼭 속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용기 있게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꼭 교회 공동체에 머물러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둘이나 셋이 당신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체에 머무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용기 있고 당당하고 또 이타적인 사랑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는 공동체에게 있다.

 

몇 달 전에, 하나의 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였습니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한 남성이 담배를 피우자, 한 시민이 담배를 피우면 어떻게 하냐면서 말렸습니다. 그래도 계속 담배를 피우자, 손에 든 담배를 빼앗았습니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말립니다. 그 뒤, 이 남성이 했던 말들입니다.
 
“그건 제 마음이잖아요.”

“솔직히 연기 마신다고 피해 많이 가요?”

“** 꼰대 같아.”…. 
 
술에 취해서 했던 행동도 아니었습니다. 맨정신에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에 그러한 행동을 했고 또 떳떳하다고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만 살고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자기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함께 살아야 해서 당연히 공동의 선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살 수 없으며,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종종 착각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하면서 사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함께 살기에 그 많은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지금 머무는 집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기 혼자서 만들 수 있나요? 아마 많은 이가 누가 만들어 준 집에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먹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이 직접 생산해서 만든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생산한 것을 가지고 또 누가 요리해준 것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따져봐도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아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많이 들어본 구절 같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마태 16,19에 나오는 베드로에게 주어진 ‘열쇠의 권한’이었습니다. 그 구절과 이 구절이 똑같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베드로에게 주어졌었던 권한이 이 말씀을 듣는 청중, 곧 공동체에게 부여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에게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동체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만 사는 것처럼,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을 내세워야 할까요? 아닙니다. 나의 구원이 공동체에 주어졌기 때문에, 이 공동체를 위한 나의 모습 자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시지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바로 교회의 최소 구성원입니다. 모든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우리는 자산을 이김으로써 자신을 양성시킵니다. 자신과 싸움은 반드시 존재하고 거에서 이겨야 한다.

- 에드워드 기번

 

 

행복한 방법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지금은 행복하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아직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삶에서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솔직히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높은 곳에 올라야 행복할 것 같지만 이는 늘 순간의 행복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만족일 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래서 영속적이고 자신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 자신을 비난하지도 않고, 누가 훔쳐 갈 수 없는 그런 대상을 원해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 대상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소유해야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려면 내면의 일치가 필요합니다. 
 
사랑이 그 해답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내면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난한 마음안에 탄생하시는 하느님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가난 속에 참된 행복이 있고 가난 속에 참된 기쁨이 있다. 가난 안에서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루어주시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 가난이다. 

가난이 회개의 삶이다. 가난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받쳐주는 영적인 가난이다. 

가난이 하늘이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열릴 수 없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난한 영혼이 된다는 것이다. 

가난이 복음이다. 가난한 마음안에 탄생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가난한 인격들이다. 

성녀 클라라는 하느님의 가난으로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셨다. 온갖 기쁨은 가난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주어지는 선물이며 은총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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