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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
21년 8월 9일 (월)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모세는 백성에게, 주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은 성전 세를 면제받지만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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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주님, 당신의 계약을 돌아보소서! 가련한 이들의 생명을 저버리지 마소서. 일어나소서, 주님, 당신의 소송을 친히 이끄소서. 당신을 찾는 이들이 외치는 소리를 잊지 마소서.
제1독서
신명 10장 12-22절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라.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2
“이제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섬기는 것,
13
그리고 너희가 잘되도록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키는 것이다.
14
보라,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 그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것이다.
15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에게만 마음을 주시어 그들을 사랑하셨으며, 오늘 이처럼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자손들인 너희만을 선택하셨다.
16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
17
주 너희 하느님은 신들의 신이시고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하느님이시다.
18
또한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19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20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께만 매달리고 그분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한다.
21
그분은 너희가 찬양을 드려야 할 분이시고, 너희가 두 눈으로 본 대로, 너희를 위하여 이렇게 크고 두려운 일을 하신 너희 하느님이시다.
22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로 내려갈 때에는 일흔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셨다.”
화답송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시온아, 네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은 네 성문의 빗장을 튼튼하게 하시고, 네 안에 사는 아들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네 강토에 평화를 주시고,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당신 말씀 세상에 보내시니, 그 말씀 빠르게도 달려가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당신 말씀 야곱에게, 규칙과 계명 이스라엘에게 알리신다. 어느 민족에게 이같이 하셨던가? 그들은 계명을 알지 못하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하느님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네.
알렐루야!
복음
마태 17장 22-27절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되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는다.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영성체송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저희를 구원하시고 진리의 빛으로 저희를 굳세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9일 (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9일 (월)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9일 (월)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돌아가심으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오늘 복음은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와 성전 세를 바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왜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함께 들려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지만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베드로가 납득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지만(마태 16,21-23 참조), 두 번째 수난 예고 때에는 제자들이 몹시 슬퍼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올 부활과, 그로 말미암은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슬퍼합니다.
성전 세는 스무 살 이상의 모든 유다인 남자가 주님께 드리던 예물입니다. 성전은 유다인들의 삶과 신앙의 중심이었고, 그 성전을 유지 관리, 보수하고 전반적인 운용을 하는 데에 성전 세가 쓰였습니다. 그런데 서기 70년 8월 29일 로마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서기 80-90년 무렵 복음을 쓸 때, 성전이 파괴된 것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성전 세 이야기를 할까요? 유다인의 삶과 신앙의 중심인 성전이 여러 상품을 사고파는 장사의 소굴이 되고,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성전 세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사의 소굴이 된 성전을 정화하시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마태 21,12; 26,61; 27,40 참조). 마태오 복음사가는 ‘여러분이 믿고 의지하는 그 성전은 허물어졌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심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라고 강조합니다.
목숨까지 다 바치신 그 사랑은 영원하며,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물건이나 세상의 것을 기대할 것인지 아니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사랑, 곧 목숨까지 바치신 그 험난하고 지극한 사랑을 믿을 것인지를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을 은총으로 받았다면
오늘 신명기의 모세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백성 가운데에서도 너희만을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마라."
그런데 모세는 왜 굳이 이런 말을 합니까? 왜 마음의 할례를 얘기하는 것입니까? 더 이상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유대인들에게 선민 의식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민 의식이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의식인 것이지요. 여기에 자기들만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의식도 있고요.
그런데 이것이 자기들은 특별하다는 의식으로, 그리고 자기들은 우월하다는 의식으로 발전하며 그래서 마침내 그들은 목이 뻣뻣한 사람들이 됩니다.
이렇게 된 그들에게 모세는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하고, '더 이상' 목이 뻣뻣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목이 뻣뻣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은 지금까지 목이 뻣뻣했다는 얘기이고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건데 그렇다면 마음의 할례란 또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요?
제 생각에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것도 육신의 할례만 받지 말고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는 뜻이요, 겉의 할례만 받지 말고 속의 할례까지 받으라는 뜻입니다.
제 생각에 할례란 우리로 말하면 세례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이제부터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것처럼 이들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겠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가 겉으로는 세례를 받았지만 속을 보면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것처럼 이들도 겉으로는 할례를 받아 유대인이 되었지만 특권적인 선민 의식만 있고 전혀 유대인답지 않은 겁니다.
이런 그들에게 모세는 그래서 이렇게 또 얘기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하느님이시다. 또한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신다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이유도 이방인을 차별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요, 그들에게 우월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옛날에 맏아들에게 상속 재산을 많이 또는 다 준 것은 부모를 잘 모시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재산을 다른 형제들과 잘 나누라는 뜻도 있는데 재산만 싹 챙기고 맏자식으로서 해야 할 본분은 하나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할례자나 세례자는 선택만 받고 본분은 하지 않는 사람이고, 특권만 받고 은총은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참으로 은총으로 받았다면 그 은총을 독점치 않고 이웃 사랑을 위해 쓰는 사람임을 오늘 신명기를 통해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열등감, 불완전한 겸손, 완전한 겸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성전세’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 둘은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당시 한 사람당 두 드라크마를 성전세로 바쳐야 했는데, 이는 이틀 치 노동 품삯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느냐고 베드로에게 따지자 베드로는 내신다 말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예수님께서 당신은 성전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안 내도 되지만 물고기를 잡아 그냥 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집에 오셨는데 그 하인들에게 집세를 내고 당신 일을 함께하는 동료인 베드로에게도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도 큰 겸손입니다. 인간이 개가 되어 개들에게 인사하고 그들을 위해 잡아먹혀 죽는 것보다 더한 겸손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참다운 겸손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십니다. 오늘은 겸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겸손처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열등감’입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열등감일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라고 하면 “저는 능력이 없어서 못 해요.”라고 하던가, 큰 꿈을 가지라고 할 때 “제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 안에는 하느님이 사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큰일을 하려고 할 때, “당신은 교만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그렇고 남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열등감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며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과 같습니다.
저도 괜히 위대한 신학자들이 한 말을 반박하다가 이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당신은 교만합니다. 그분들은 고위 성직자이시고 위대한 학자신데 나이도 어린 당신이 어떻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
하지만 이런 말들은 다 열등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살 때 예루살렘 학자들과 토론을 하셨습니다. 그건 예수님이니까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제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돼요. 말도 안 돼요.”라고 대답하셨다면 그건 겸손이 아니라 열등감이었을 것입니다. 겸손하다고 결코 위대한 일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불완전한 겸손’입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고 큰 상을 받을 때 이렇게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다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왜 불완전한 겸손이냐면 ‘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녀가 아버지가 다른 형제에게는 많은 것을 해 주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겸손하게 ‘저는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겨 무엇을 청하는 것은 물론 겸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가 살아있어서 자신의 영광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경우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조금이라도 주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완전한 겸손’은 무엇일까요? 오늘 베드로가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더는 내려가실 곳이 없습니다. 마치 물고기와 같은 신세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물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나온 한 스타테르를 예수님과 자신을 위한 성전세로 봉헌합니다.
한 스타테르는 네 드라크마와 같은 액수인데 곧 두 명의 성전세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겸손에 하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의 겸손이 나의 겸손이 된 것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지 않으면 이 겸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씨름을 배운지 3개월 만에 전국 대회에서 1위를 휩쓸어 ‘영재발굴단’에 나왔던 이신이란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탈북자 2세입니다. 엄마가 임신한 채 탈북하여 중국에서 갖은 고난을 겪으며 결국엔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신이는 종일 고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허리가 아픈 엄마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합니다. 정말 중학생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신이는 자신을 데리고 살아온 엄마의 고달픈 삶을 잘 압니다. 쌍둥이를 임신한 몸으로 목숨을 걸고 탈북했지만 그 이후의 삶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기름을 짜는 일을 종일 하였고 기름을 짜고 남은 것으로는 돼지 사료를 끓여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밤에 하는 일이었고, 낮에는 고물을 주워 고물상을 하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몸이 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간신히 한국에 들어온 지 두 달 만에 몸이 안 좋아 여러 번 수술해야만 했고 이후에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신이는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 아이들에게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욕도 많이 들었고 북한으로 돌아가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 때문에 비뚤어질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씨름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눈 뜨고 눈 감을 때까지 운동하였습니다. 그래서 석 달 만에 중학교 씨름 1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국 체전에서 발목을 다쳤습니다. 재활을 하는중에 보디빌딩도 겸해서 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집중하여 4개월 만에 고등부 1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몰아붙인 이유는 오로지 어머니의 고생에 자신도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참다운 겸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의 뜻에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그리스도의 겸손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위해 돈을 직접 주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당신 뜻에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아 입을 벌리면 돈이 나온다는 말에 순종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은 나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의 뜻이 내 안에서 실현되게 하는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그리스도의 겸손과 하나 되는 것, 이것이 완전한 겸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비행기가 다른 어떤 교통수단보다 사고가 적은 이유
비행기 사고가 나면 많은 인명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교통수단보다 가장 사고가 적은 것이 바로 비행기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고가 나면 워낙 피해가 크다 보니, 더 꼼꼼하게 정비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비행기 이륙 전에 확인하는 검사 항목이 너무 많고 귀찮다면서 확인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사고가 끊이지 않을 것이고, 아마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비행기 이용하는 사람이 적지만, 그래도 많은 이가 비행기라는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이유는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특히 사랑 실천에 대해 하지 못할 이유를 붙이며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의 말과 행동은 하느님 나라로 안전하게 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이고,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 모범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면서 사랑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너무 힘들다면서 사랑을 미뤄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지금 당장, 그리고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스무 살 이상 된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나라 안에 살든지 밖에 살든지 간에, 예루살렘 성전유지를 위해 일 년에 성전 세로 ‘반 세켈’(복음에 나오는 스타테르 한 닢은 그리스 은화로 두 사람 몫의 성전 세에 해당합니다)을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셔야 하냐는 것이었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성전 세를 굳이 내지 않으셔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적과 같은 행동을 통해 성전 세를 베드로의 몫과 함께 내게 하십니다.
이 역시 커다란 배려입니다. 성전 세를 내지 않으면, ‘네가 뭔데?’라는 생각으로 주님을 함부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해해서 죄짓지 않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직접 성전 세를 마련해서 내십니다.
이렇게 배려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역시 나의 이웃에 대한 배려하는 사랑을 갖춰야 합니다. 어떻게든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 우리는 멋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씨앗은 땅을, 뿌리는 비를, 꽃봉오리는 터짐을 견뎌야 한다.
- 헤르만 헤세
저는 그저 주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미사 후 성당 입구에서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다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신부님, 묵상 글 잘 보고 있어요. 늘 고맙습니다.”
묵상 글에 대한 감사 인사를 많이 받지만, 그때마다 어색합니다. 그렇게 잘 쓴 묵상 글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너무 급하게 써서 내용이 형편없었을 때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들로 어색해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런 부족한 묵상 글을 계속 봐주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 감사에 보답하는 길은 더 좋은 묵상 글을 쓰는 것인데 솔직히 어려운 일입니다. 단순히 지식만 전하는 것이라면 열심히 공부하면 되겠지만, 묵상 글은 깊은 묵상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 ‘나’만 할 수 있는 것이라 부담감도 큽니다.
그런데 이를 벌써 20년 넘게 해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해주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큰 감사의 대상은 주님이십니다. 저는 그저 주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면제와 공짜 사이에 살고있는 우리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마태 17,26)
세상의 가치와 신앙의 두 가치가 번번히 충돌하는 우리들 삶이다. 가치의 충돌을 통해 진짜 우리가 누군지를 제대로 알게하여 주시는 은총의 주님이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이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결핍을 채워주시는 분은 오직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용서받고 면제받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에서 삶의 의미와 삶의 방향성을 다시 찾게된다. 우리의 의무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더 크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더욱 우리답게 살게하는 바탕이 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우리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다. 가치의 회복이야말로 질서의 회복이며 참된 관계의 지혜이다. 면제와 공짜 사이에 살고있는 은총의 우리들이다. 면제가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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