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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8월 20일 (금)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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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21년 8월 20일 (금)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1090년 프랑스 디종 근교에서 태어난 베르나르도 성인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시토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후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되었습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몸소 모범을 보이며 수도자들을 덕행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또한 베르나르도 성인은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저서도 많이 남겼습니다. 

1153년에 선종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1174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이 시성했습니다. 1830년 비오 8세 교황은 성인을 ‘교회 학자’로 선포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들자, 나오미는 모압 출신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8월 2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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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룻기 1장1절, 3-6절, 14ㄴ-16절, 22절

 

나오미는 모압 출신 룻과
함께 돌아와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려고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어서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파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룻이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십 년쯤 살았다. 


그러다가 두 사람도 죽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두 자식과 남편을 여읜 채 혼자 남게 되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과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나 돌아가기로 하였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시어 그들에게 양식을 베푸셨다는 소식을 모압 지방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14 
오르파는 시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며 입 맞추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15 
나오미가 말하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제 겨레와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그러자 룻이 말하였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22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모압 출신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은 보리 수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행복하여라, 야곱의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 주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네.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22장 34-40절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복된 베르나르도를 기리며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이 성사의 힘으로 그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강생하신 말씀을 열렬히 사랑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20일 (금)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20일 (금)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20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잊은 이유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율법은 모세가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에서 시작됩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 약속하시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 충실하라.’고 율법을 내려 주십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율법 조항이 613개로 늘어나게 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점점 법의 준수 여부에 더 큰 의미를 둡니다. 

기본 정신은 잊고 법의 준수에만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하십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유다인들은 날마다 두 번씩 ‘쉐마 기도문’을 낭송하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그럼에도 이들은 왜 하느님을 잊었을까요? 

이는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는 말씀처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잊어버리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 각성, 정신차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은 복음은 물론 신구약을 통틀은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 분석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데 정신 없는 율법과 예언서의 준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당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문제를 삼았던 것이지요. 

정신 없는 율법이라! 

사랑 없는 율법이라! 

살다 보면 '정신 없이 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고, 그런 느낌이 들 때 또한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정신이 없이 살면 안 되고, 나간 정신은 바짝 다시 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했으니 나간 정신을 다시 차린다는 것은 사랑을 되찾는 것입니다. 

사실 올해 들어서 전보다 더 자주 지난 일을 돌아보게 되고 요즘 들어서 무슨 일을 하다가도 문득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케 되는데 왜 이런 생각을 할까 생각해 보면 사랑을 놓치고 제가 무엇을 할 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선교 협동조합 일이나 여기밥상을 할 때 문득 이거 지금 사업으로 하는 건가, 아니면 사랑으로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재미로 하는 건가, 의미로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살짝 괴로워지며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하지만 이내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각성을 하게도 되면서 다시 사랑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신 없이 무엇을 하다가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그 일에 다시 사랑을 불어넣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의미 있는 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성사와 기도가 이런 사랑 각성제가 되고 정신차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현대인이 묵상을 못 하는 이유는 내가 요리를 못하는 이유와 같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묻습니다. 율법은 613개뿐만 아니라 관습법까지 합치면 수만 가지가 넘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라도 대답하십니다. 

많은 율법 가운데 ‘정신’이 되는 율법이 두 개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과 관련된 수많은 율법 조항이 생기게 만들어 정작 중요한 정신을 잃게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사람이 되신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범죄까지 저지르게 했습니다. 

현 시대는 이런 사탄의 계략이 바뀌었을까요? 똑같습니다. 워낙 잘 먹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그것이 소화되어 내 삶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알아서 좋은 정보들이 소화되지 않도록 엄청나게 쏟아붓습니다. 사람들은 정보만 수집할 뿐 그것의 정신을 뽑아내어 내 것으로 삼지 못합니다.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먹고 소화하고 배출하는 것처럼, 입력하고 이해하고 표출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히고 시험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정보만 입력하는 것을 공부라고 여기면 그 정보들은 결국 내가 생각 없이 살게 만드는 독이 됩니다. 

묵상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뇌의 앞부분을 이용하여 생각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 작업은 마치 소가 풀을 뜯고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가 요리를 못하는 것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해보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요리하지 않아도 항상 남이 해 놓은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실력을 쌓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묵상기도’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이미 정리된 정보들이 너무 많아서 굳이 생각하는 노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 가장 큰 일조를 하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생각 없는 인간을 만들기 가장 좋은 사탄의 도구입니다. 저는 현대의 ‘666’(그리스도의 적)이 ‘스마트폰’이라 생각합니다. 스마트폰은 정보를 소화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이미 정리된 정보를 홍수처럼 쏟아부어 사람이 전두엽을 사용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게 만드는 전두엽을 퇴화시켜버립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자기가 눈으로 보는 정보는 곧바로 후두엽으로 갑니다. 머리 뒤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정보가 나의 것이 되어 행동으로 표출이 되려면 전두엽으로 와서 분해되고 소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생각하면 늦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습득된 몸의 반응으로 바로 총을 쏘거나 총알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입력-숙고-표출’의 단계에서 ‘입력-표출’의 단계로 간소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가정해봅시다. 

영화의 화면은 너무 빠릅니다. 그래서 한 화면의 내용을 깊이 숙고할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다음 화면의 정보를 입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영화만 보고 산다면 머리가 텅 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랬습니다. 너무 정보가 많아서 하나도 소화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신도 에너지입니다. 에너지가 여러 곳에 분산되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야구를 할 때나 테니스를 칠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공을 끝까지 봐!”입니다. 보는 것이 어떻게 그 복잡한 동작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끝까지 보지 않으면 헛스윙하거나 빗맞습니다. 지금까지 연습한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말은 “공을 끝까지 보자!”입니다. 

이처럼 그것에 통달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모든 것이 다 따라올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말 하나를 찾아내고 오직 그 생각만 합니다. 그렇게 내 전두엽의 작용으로 묵상이 된 것을 단순하게 가르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멀티태스킹이 원래 불가능하게 되어있기에 주의를 동시에 여러 곳에 분산시킬 수는 없습니다. 멀티태스킹을 한다는 말은 주위를 빠르게 여기에서 저기로 옮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이것에도, 저것에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뇌도 다른 것에 할당한 주의를 하나로 끌어오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을 쓸 때, “하나, 둘, 셋!” 하는 것과 같습니다. “셋!”에 힘을 줄 때까지 “하나, 둘!”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을 이것, 저것 분산해서 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에너지 낭비입니다. 

우리는 사탄이 어떻게 우리의 머리가 텅 비게 만들어 심지어 묵상도 하지 못하는 뇌로 만드는지 그 계략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에 주의력을 가장 분산하게 만드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사용하지 않고 옆에만 두어도 뇌가 힘들어합니다. 그것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게 에너지를 쓰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기가 물지 않고 윙윙거리기만 해도 신경이 쓰이는 것과 같습니다. 스마트폰은 일할 때는 다른 방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카톡에 답을 하는 것도 시간을 정해놓고 한꺼번에 하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생각 없이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스마트폰이나 게임, 유튜브 동영상 등을 많이 보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파묻혀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도 못 하는 그런 자녀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반면 책을 읽으면 한 주제에 오래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에 전두엽이 활성화되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사탄이 이 세상에서 생각 없이 인생을 허비하며 살게 만들기 위해 쓰는 가장 악랄한 방법이 정보의 홍수에 빠져 멀티태스킹 하며 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힘들지만 책을 읽으며 천천히 그 주제를 묵상하는 연습을 합시다. 나의 묵상이 단순한 가르침으로 표출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원교구 꾸르실료의 지도를 맡고 있습니다. 꾸르실료는 본래 온전한 교리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던 당시 스페인 교회를 바로잡으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육 안에는 교리를 가르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이미 남이 써 놓은 강의를 그대로 외워서 하지 말고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에 강의를 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반응은 ‘우리가 어떻게?’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다들 잘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입력된 것만 그대로 반복하는 패턴이었다면 이제 ‘묵상’이라는 것을 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한 주제로 한 시간 이상 생각할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체험과 연결될 수 있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 율법이나 교리가 비로소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 수많은 정보의 공격들을 꼭 끊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비의 블랙홀

 

신학생 때, 신학교에서는 1주일에 한 편의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영화 상영을 담당하는 신학생이 몇 편의 영화 목록을 신부님께 제출하면 그중에서 한 편을 선택해주십니다. 그런데 그때 담당 신학생이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제목 그대로 올리면 ‘미성년자 관람 불가’의 영화로 생각해서 거절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비의 블랙홀’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했고, 그 결과 저를 포함한 신학생 모두가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일기예보 진행자인 주인공이 어느 마을에 취재를 하러 갔다가 2월 2일 성촉절(Groundhog Day)이 계속 반복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2월 2일이 지겹고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지만, 다음날 다시 살아나 똑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변하는데 비로소 다음날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블랙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아 블랙홀에 빠진 것 같은 상황이 어쩌면 지금의 우리 삶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의 삶이 아닐 때, 미래의 희망을 간직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사랑은 바로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을 보면 자그마치 613개나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어떤 조항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딱 두 가지의 계명으로 정리하십니다.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율법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으로, 성경에 보면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정리해주셨습니다. 사랑에 비추어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똑바로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것이 곧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맨 앞자리에 둘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으로 사랑의 실천을 주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의 행동을 할 때 비로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삶만이 미래에 하느님 나라라는 커다란 희망을 둘 수 있으며, 그 희망을 통해 지금을 더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누군가에게 어두운 생각, 화, 두려움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 사람 안의 좋은 씨앗에 물을 줘야 한다. 그러면 좋은 씨앗에서 튼 싹이 나쁜 심리 현상을 대신한다.

- 틱 낫한

 

 

숨바꼭질

 

어렸을 때 친구들과 모여서 숨바꼭질을 많이 했습니다. 술래는 숨어있는 친구를 열심히 찾아야 했고, 우리는 술래가 찾지 못하도록 꼭꼭 숨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술래가 찾지 못해서 한 사람만 계속 술래를 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몇 번의 차례를 넘다 보면 숨는 곳이 뻔해지고, 그래서 술래 교대를 자주 하게 됩니다. 
 
만약 꼭꼭 잘 숨어서 술래가 도저히 찾지 못한다면 어떨까요? 정말로 재미가 없을 것이고, 이런 숨바꼭질은 다신 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놀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구를 하는데 아웃이 되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축구를 하는데, 골키퍼가 전혀 막지 못해서 계속 골을 준다면 재미있을까요? 
 
삶이 재미있는 것은 실패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실패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 실패를 받아들이고 있기에, 실패로 즐거움도 얻습니다. 실패를 무조건 거부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랑은 하느님의 것이다.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태 22, 36) 

하느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계명은 사랑의 길을 우리들에게 일깨워준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사랑을 알게 되는 우리들 시간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통해 참된 자유와 참된 감사를 배우게된다. 

사랑은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뿐이다. 사랑을 반성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사랑해야 할 우리들 삶이다. 참된 사랑이 빠져버리면 우리는 더더욱 비참한 존재가 된다. 더 잘 살다 가기위해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사랑하는 오늘의 의미이다. 오늘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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