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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
21년 8월 21일 (토)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갈릴래아 카나 출신입니다. 필립보 사도가 인도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타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요한 1,45-51 참조).
예수님께서는 바르톨로메오 사도를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인도와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순교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모압 여자 룻은 보아즈의 아내가 되어 오벳을 낳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입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며,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고,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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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룻기 2장 1-3절, 8-11절 / 4장 13-17절
주님께서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엘리멜렉의 아내
1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 가문으로 재산가였는데 이름은 보아즈였다.
2
모압 여자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들로 나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그래 가거라, 내 딸아.” 하고 말하였다.
3
그래서 룻은 들로 나가 수확꾼들 뒤를 따르며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 가문인 보아즈의 밭에 이르게 되었다.
8
보아즈가 룻에게 말하였다. “내 딸아, 들어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갈 것 없다. 여기에서 멀리 가지 말고 내 여종들 곁에 있어라.
9
수확하는 밭에서 눈을 떼지 말고 있다가 여종들 뒤를 따라가거라. 내가 종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였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 있는 데로 가서 종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셔라.”
10
그러자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11
보아즈가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
4,13
이렇게 보아즈가 룻을 맞이하여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가 룻과 한자리에 드니, 주님께서 점지해 주시어 룻이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오늘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15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 아기가 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나오미가 그 아기의 양육자가 된 것이다.
17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화답송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복음
마태 23장 1-12절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복된 비오 교황을 기리며 간절히 비오니 저희가 천상 음식의 힘으로 주님을 굳게 믿으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화목하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8월 21일 (토)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8월 21일 (토)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8월 21일 (토)
매일미사
서철 바오로 신부
섬기는 사람이 되는 방법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사랑은 놀랍기만 합니다. 양피지에 구약 성경의 핵심 구절(탈출 13,1-16; 신명 6,4-9; 11,13-21)을 적어 양피지로 만든 작은 갑에 넣습니다.
이것이 ‘성구갑’입니다. 이를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는데, 머리로 율법을 생각하고 왼팔 윗부분이 맞닿는 심장으로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또 겉옷의 네 귀퉁이에 흰 실과 푸른 실을 꼬아 술을 만들어 달았는데, 그것을 볼 때마다 주님의 모든 명령을 기억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하라는 말씀(민수 15,38-39 참조)에 따른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왜 심판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는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입법자인 모세는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신 하느님을 만났고, 백성이 그분의 뜻을 법으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나는 ……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 그래서 내가 …… 내려왔다”(탈출 3,7-8).
유다인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께서 백성의 울부짖음을 듣고 내려오셨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이는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보아야 합니다.
장 바니에는 “하느님은 ‘파라클리토’라고 합니다”(『눈물샘』, 159면). 그리스 말인 ‘파라클리토’(Paracletos)는 ‘곁에’(para)와 ‘부르다’(kleo)가 합쳐진 단어로 일반적으로 보호자, 변호자로 번역되며 ‘곁으로 불려 온 이’, ‘부름에 응답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도움을 청하는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마치 아이가 엄마를 부를 때 이에 응답하여 파라클리토 엄마가 되듯이, 우리도 다른 이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기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 그리스도의 품성.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 합당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다만 모세가 했던 말을 되풀이할 뿐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은 없었습니다. 대리자에게 중요한 것은 가르침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대리자의 자질 중 가르침보다 행실이 더 중요합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제에게 기대하는 것은 좋은 강론일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성품일까요? 성품이 그리스도답지 않다면 가르침은 따르기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품만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았다면 가르침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조사에서 신자들이 사제에게 바라는 사제상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강론 잘하는 신부, 기도 잘하는 신부, 겸손한 신부 중 어느 것이 1위였을까요? 1위는 겸손한 신부, 2위는 기도하는 신부, 3위는 강론 잘하는 신부였습니다. 가르침이 꼴찌이고 성품이 1위입니다.
신자들은 사제들에게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우선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더니 신학생들은 강론 잘하는 신부를 가장 바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않으면 말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말을 가장 잘하는 사제와 이태석 신부님이 살아계신다면 이태석 신부님을 만나러 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위치에 서면 신자들이 강론 잘하는 사제를 더 좋아할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교구 사제의 주보 성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강론을 엄청나게 못 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공부 자체를 못 한 분입니다. 라틴어 때문에 사제가 못 될 뻔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 서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항상 일주일 전부터 주일미사 강론을 글로 써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이미 써 놓은 강론 원고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미사 시작할 때부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강론시간이 다가오자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만 하고 앉았습니다. 더는 말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람들은 이 강론을 최고의 강론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 거의 냉담하던 시골 마을에 온 비안네 신부는 하루에 17시간 정도를 고해소에 앉아있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인품을 보았기 때문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하지만 인품이 바탕이 되지 않은 강론은 어떨까요? 아무리 멋진 강론이라도 신자들은 “신부님 말 잘하시네!” 정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나 스승으로 불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를 ‘대리’하는 것이 아닌 ‘대치’하려 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인품을 먼저 닮으려 하지 않으면 그것은 대리자가 아니라 모세를 대치하려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 모세만큼 겸손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고 나옵니다.
미국 한 개신교 예배 시작 30분 전에 아주 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한 거지가 교회에 나타나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먹을 것을 사기 위해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오직 세 명만이 그 사람에게 간단하게 인사했을 뿐 어느 사람도 그 사람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사람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당신은 앞에 앉을 수 없다면서 맨 뒤 자석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찬양이 끝나고 교회 장로님이 나와 새로 오신 담임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목사님은 예레미야 스피크입니다. 나오셔서 설교해주시겠습니다.”
모든 성도는 일제히 일어나 새로 오신 목사님을 환영하는 손뼉을 쳤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강대상에 없었습니다. 맨 뒤에서 정말 냄새나며 주변을 돌아다니며 돈을 달라고 했던 그 거지가 강대상으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으로부터 마이크를 건네받았습니다. 박수 소리는 조금씩 사그라들고 웅성거렸습니다.
예레미야 목사님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내용은 마태오 복음 25장 34~40절 말씀이었습니다. 심판 때에 주님 오른쪽에 서게 될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성도들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곳곳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오늘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모임을 보았지만, 하느님 자녀가 모인 교회는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성도라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으면 말씀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품이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면 가르침도 변질합니다. 그리스도처럼 살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처럼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이 자기 삶을 합리화하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품 중 닮아야 하는 것은 온유함과 겸손입니다. 이 안에 가난도 포함됩니다. 마음이 인품입니다. 이것이 먼저 드러나지 못하는 강론이란 음식을 더러운 그릇에 주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에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거짓 모세의 대리자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제는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그분을 보여주고 그런 다음 말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신자들도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지 그분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은 말을 듣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다면 차라리 그 순간에는 입을 다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대리자들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기대하는 유일한 것은 유창한 말이 아닌 그분의 성품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오로지 겸손만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
밥때가 되면 식사 준비를 합니다. 제일 먼저 살피는 것은 냉장고 안입니다. 무엇이 있는지를 보고서, 찌개나 국을 만들고 또 여러 반찬을 직접 만듭니다. 사실 처음 직접 해 먹어야 할 때는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인스턴트 음식만 해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랫동안 혼자서 하다보니 자유롭게 음식을 하게 됩니다.
처음 요리책을 보고서 요리할 때, 책에 적혀 있는 재료가 다 있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또 요리 순서를 어기면 큰일이 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리를 계속하다 보니 이런 틀에서 자유롭게 됩니다(물론 맛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 맛있다고 하지 않더군요).
저만의 방식이 생긴 것입니다. 저만의 방식으로 뚝딱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겼습니다. 이런 저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방식도 자기만의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주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할 때, 자기만의 방식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주님과 기쁨의 만남을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문제는 자기 방식만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방식대로 상대방이 하지 않는다고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방식 역시 주님께 다가가는 또 다른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물론 이단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일입니다. 신부님께서도 신부님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자기만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딱 1년 간의 사제 생활이었지만,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충실하게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자주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사람들에게 보이는 행동만 하려 하고, 진심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옳고 남은 옳지 않다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옳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장 올바른 사람인 척하면서 살았던 것이지요.
이런 위선을 주님께서는 절대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착한 목자의 모습으로 짧은 이 세상의 삶을 사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떠올리면서,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의 뜻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기만의 방식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기심이 들어가면 주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로지 겸손만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진실로 현명한 생각은 모두 이미 많은 사람이 몇 천 번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진실로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면, 깊이 숙고해서 개인적 경험에 뿌리를 내리게 만들어야 한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긍정적 버튼, 부정적 버튼
백화점에 가서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8층에 자신이 사려는 가전제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몇 층 버튼을 눌러야 할까요? 당연히 8층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그런데 지하 1층을 누르고서는 왜 가전제품을 팔지 않느냐고 항의한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원하는 층수를 눌러야 정확하게 자신이 가려는 층에 도착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긍정적 버튼’을 누르면, 긍정의 층으로, ‘부정적 버튼’을 누르면 부정의 층으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부정적 버튼’을 누르고는 긍정의 층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이상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불행한 이유만을 찾아내면서 이 세상에 살 이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부정적 버튼을 누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에 살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즉, 긍정적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나의 인생을 긍정의 삶으로 이동시켜 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실천이 구원이고 실천이 회개이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2)
때 묻지 않은 가을이 우리에게 오고있다. 실천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시간이다. 생명의 참모습은 자신을 낮추는 사랑의 실천에 있다. 실천하는 삶이 섬기는 삶이다. 낮추고 비워야 기쁘게 실천할 수 있다.
삶의 아름다움은 바로 노력과 실천에 있다. 실천이 구원이고 실천이 회개이다. 사랑의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참된 실천은 우리의 뉘우침에서 시작되며 참된 실천은 낮추고 섬기는 우리의 사랑에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천의 뜨거운 가르침이다. 하느님을 높이는 실천의 하루이다. 실천이 참된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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