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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3.2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by 평화다방 2026.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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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2026년 3월 20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지혜 2,1ㄱ.12-22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복음
    요한 7,1-2.10.25-30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지혜 2,1ㄱ.12-22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악인들은

1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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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성경 말씀
요한 7,1-2.10.25-30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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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0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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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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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형 베드로 신부

멈춘 자리에서 다시 걷기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기품이 배어 나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기품은 단순히 외적인 고상함이나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인격에서 마치 향기처럼 은은하게 흘러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기품 있으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란을 일으키시지 않고 조용히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자, 성전 한가운데에서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담대히 선언하십니다.

그분을 붙잡으려는 손길이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다가서지 못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드러나는 침착함과 신중함, 강한 자신감과 독립성,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이신 절대적 당당함이 그 누구도 그분께 경솔히 접근할 수 없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힘 앞에서 사람의 손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발걸음에는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방향을 정하시고, 스스로 걸음을 내딛으시며, 스스로 마침을 선택하실 수 있었던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쉬운 길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도 저마다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때로는 침착함으로, 때로는 신중함과 자신감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저하고 멈추어 서서 혼란 속에서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장 먼저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삶의 의미입니다.

무엇을 향하여 걷고 있는지, 무엇을 위하여 견디는지, 그 의미를 찾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미 있는 발걸음을 기억하고, 우리도 의미 있는 길을 걸어갑시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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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고통과 모욕으로 시험 받을 때

오늘 지혜서는 의인을 죽이려는 악인과 그 악인에 의해 시련을 겪는 의인의 관계를 얘기하고, 복음에서는 지혜서가 얘기하는 의인이 주님임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악인이란 어떤 자인지 보려고 하는데 국어사전을 보면 ‘남을 해치려 하거나 미워하는 악한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남을 해치거나 미워하는 사람은 무조건 악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을 해치거나 미워하는 사람도 악한 사람인가? 예를 들어 요즘 전쟁을 일으키는 더 악한 자들을 미워하며 망하기를 바라는 저는 악한 사람입니까? 다르게 얘기하면 악을 미워하는 것도 악이고 같은 맥락에서 악을 미워하는 사람도 악인입니까?

악은 선과 반대되는 것이고 선을 해치는 것이 악이지 남을 해치고 미워하는 것이 뭐든지 다 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은 물리쳐야 하고 그럴 때 저는 악인이 아니지만 선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선들을 해치고 미워할 때 저는 악인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제 저는 악인일지라도 그리 나쁜 악인은 아닐 것입니다.

솔직히 요즘 저는 미워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도 가련하고 하느님 자비가 필요한 사람인 것처럼 이웃도 저와 같은 존재입니다. 요즘 제 입에서 ‘나쁜 놈!’이라고 하는 것은 트럼프나 네타냐휴 같은 자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의인을 거꾸러트리려고 하는 악에 대한 반성보다는 누군가에게 고통과 시련을 받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 그것입니다.

오늘 지혜서에서 악인들의 말이지만 다음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도 권고 13에서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종은 자기가 만족스러워할 때는 자기에게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겸손이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만족스럽게 해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때 지니고있는 만큼의 인내와 겸손을 지니고있는 것이지 그 이상을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고통과 모욕이라는 시련은 우리의 인내와 겸손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하기에 유익하지만 또 우리가 시련을 통해 단련되게 하는 측면에서도 유익합니다. 그리고 악인들은 이런 뜻으로도 의인에게 시련을 주고 시험도 합니다.

“의인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주실 것이다.”

악인들의 말대로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아들인데도 같은 뜻에서 시련을 주십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시련을 받을 때 인간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통해 주신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설사 하느님이 아니라 그가 준 것일지라도 주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 없이 시련받지 않을 것이고, 하느님이 주신 시련을 값없이 낭비하지 않고 단련의 기회로 달게 받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새로운 파스카를 향한 믿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을 때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

사람들은 우왕좌왕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로, 그분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의혹과 믿음, 신뢰와 불신 사이에서 우왕좌왕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들 삶의 중심적이고 공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참조). 여기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희년선포 때처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곧 아버지에게서 오신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아십니다.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려 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7-8)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믿음’으로 새로운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7,29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주님!
위로부터 새로 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고,
당신이 흘러들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흐르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오늘, 보내신 분의 생명이
제 안에서 피어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 묵상 한눈에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인간관계에 발전이 없다면 이것이 멈췄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상반된 의견을 내놓습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유다인들에게는 구원자, 곧 메시아는 알 수 없는 분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기에게 메시아는 어머니입니다. 아기가 어머니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기는 엄마를 알아가며, 세상을 알아갑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나자렛 출신임을 안다고 다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까지 알아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메시아에 대해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저는 고해성사를 듣다 보면 “나는 그 사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혹은 더 심하면, “저는 그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용서’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이 든 총과 같습니다. 총이 없으면 죽습니다. 용서를 할 줄 모르면 세상에서 제대로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용서란 그 사람에 대한 ‘이해’와 같습니다. 상대를 이해하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격언에도 “모든 것을 이해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된다(Tout comprendre, c'est tout pardonner)”라는 말이 있습니다.

1981년 5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에 총성이 울렸습니다. 피로 물든 흰 수의를 입고 쓰러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구급차 안에서 이미 “나의 형제”를 용서한다고 나지막이 읊조렸습니다. 하지만 성인의 용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병상에서 회복하는 동안 교황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큼 집요하게 한 질문에 매달렸습니다.

“도대체 그 청년은 왜 나를 쏜 것입니까? 그가 누구이며,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교황은 단순히 관념적인 용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는 로마 경찰과 바티칸 정보국이 수집한 알리 아자에 관한 모든 보고서를 꼼꼼히 읽었습니다. 그가 터키의 극우 무장단체인 「회색 늑대」 소속이었다는 사실, 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그가 냉전 시대의 복잡한 정치적 음모 속에 이용당하고 있던 ‘영혼 없는 도구’였음을 파악해 나갔습니다. 성인은 알리 아자가 보낸 짧은 편지들의 행간을 읽으며, 그 안에서 ‘암살자의 당당함’이 아닌 ‘알 수 없는 힘에 대한 공포’를 발견했습니다.

1983년 12월 27일, 레비비아 감옥의 차가운 시멘트벽 사이에서 마침내 두 사람이 마주 앉았습니다. 교황이 알리 아자를 이해하기 위해 내민 첫 번째 손길은 그의 ‘언어’였습니다. 교황은 서툰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시도하며, 그를 범죄자가 아닌 한 명의 인격체로 대우했습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알리 아자는 교황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첫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왜 죽지 않았습니까? 나는 당신의 배를 정확히 조준했습니다. 전문 킬러인 내가 실패할 리가 없는데, 대체 당신을 살린 그 힘이 무엇입니까?”

이 순간 교황은 전율했습니다. 알리 아자가 궁금해한 것은 ‘용서’가 아니라 ‘파티마의 신비’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이지 못한 이 노인이 혹시 ‘강력한 신적 마법’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황은 그 짧은 대화를 통해 알리 아자의 내면이 얼마나 황폐한 지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는 신념에 찬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섭리 앞에서 겁에 질린 한 마리 가련한 짐승과 같았습니다.

면회를 마치고 나온 교황은 비서였던 스타니스와프 지비치 추기경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두려움이 어디서 오는지 이해하게 되니, 내 마음속에 그에 대한 무한한 가련함이 샘솟았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용서란, 상대가 회개했기에 베푸는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상대의 비참한 영적 무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자신의 확신으로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출처: 안드레아 리카르디, 『요한 바오로 2세: 성자의 삶』; 루이지 아카톨리, 『요한 바오로 2세의 사과』).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총을 맞는 순간부터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용서하기 위해 그를 알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용서는 사실 ‘어머니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합니다. 어머니를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에서 세상 사람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길러집니다.

사실 요한 바오로 2세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심장과 신장 질환으로 고통받던 어머니 에밀리아는 겨우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 아들에게 어머니의 부재는 단순한 슬픔을 넘어,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고 홀로 남겨졌다는 무의식적인 ‘원망’과 ‘상처’로 남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상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을 떠난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그가 겪었던 고통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 집요하리만큼 성찰했습니다. 교황은 어머니를 기억하는 고향 와도비체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어머니의 사소한 습관 하나까지 수집했습니다. 어머니가 생전에 “나의 어린 아들은 장차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며 아들의 사제직을 예견하고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성인은 어머니의 죽음을 ‘방치’가 아닌 ‘사명을 위한 희생’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인은 교황이 된 후에도 집무실 책상 위에 어머니의 사진을 항상 놓아두었습니다. 그는 자서전적 대담집인 『선물과 신비』(1996)에서 “어머니의 죽음은 내 삶의 모든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그분은 죽어서도 나에게 하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알려주셨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어머니 에밀리아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가르쳐준 기도와 신앙의 태도를 복기하며, 어머니가 자신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중개자’가 되기 위해 먼저 가셨음을 영적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를 알려고 노력합니다.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많은 질문을 해 댑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버지와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관계를 배워갑니다. 아이는 엄마를 더 알기 위해 아버지에 대해 알려고 합니다. 아버지가 세상에서 어떻게 힘들게 일하는지 이해하게 되면 엄마의 행동이 조금은 더 이해됩니다.

이것을 넘어서 아이는 엄마의 엄마, 그 가족을 이해하려 합니다. 저의 외가댁은 부산이고 저희는 평택에서 살아서 부산을 갈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갈 때마다 엄마의 가족을 알아갑니다. 그러면 엄마의 말과 행동이 조금 더 이해됩니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친할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어머니는 고아로 길을 잃었고 그 집에 살게 되었으며, 다른 집으로 또 옮겨 다니면서 무수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연세가 많이 드셨는데도 어머니가 자꾸 부산에 가려고 하시는 것도 이미 돌아가시고 없을 친어머니가 그립기 때문입니다.

사실 앞으로도 알아가야 할 것이 많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나면 성당에서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신자들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어머니를 더 알려고 노력해 온 과정의 결과입니다.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면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의 이해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살려면 천국에 살도록 나를 낳으러 오신 그리스도를 알고 이해하려 해야 합니다. 더 알려는 마음이 사라질 때 그만큼 천국에 살 자격이 사라집니다. 한 인간도 평생 노력해도 제대로 알 수 없는데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이미 다 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톨릭 신자들이 범하는 가장 큰 오류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노력을 하루에 다만 5분이라도 해 봅시다. 이 세상은 천국에 살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알려는 노력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한 준비인 것과 같습니다. 알려는 마음이 사라지면 친밀한 관계도 사라지고, 그러면 기쁨도 행복도 없는 삶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교만에 빠지지 맙시다. 우리는 아직 자신을 낳고 키워준 엄마 한 사람도 온전히 알고 이해하고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모든 말씀 묵상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걱정 많은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걱정 없는 것이 좋을까요? 당연히 걱정 없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가톨릭대학교 후리 시리크 교수의 연구를 통해 걱정에 관해 새로운 앎을 얻게 됩니다.

그는 로스쿨에 다니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스스로 걱정 많은 사람인지를 먼저 평가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최종 시험의 연관성을 조사했습니다. 즉, 걱정 많은 사람과 걱정 없는 사람의 성적 비교입니다. 누가 더 좋았을까요? 걱정 없는 사람이 더 좋은 성적을 맞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 성적은 걱정 많은 사람이 더 높았습니다.

걱정 많은 사람이 훨씬 우수했습니다. 걱정이 많은 사람일수록 미래를 불안하게 느끼고 그 불안을 피하려고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걱정 많다는 것이 그리 나쁜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미래를 불안하게 느끼고 그 불안을 없애기 위해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유형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걱정 많은 사람을 나쁜 성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의 커다란 한계를 드러냅니다. 걱정 많은 사람도 우수함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주민들도 예수님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당시에 메시아는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갑자기 등장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인지를 알고 있다면서 믿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표면적 지식이 영적인 눈을 멀게 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요한 7,28)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의 뜻에 의해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참되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를 꾸짖으십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하느님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알려고 해도 전부를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계속해서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참되신 분을 조금씩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이 태어났을 때, 당신은 울었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행복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이 죽을 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울고 있을 그 순간에, 당신은 행복할 것인가?’(토니 캠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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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 때, 우리는 누구인지 알게 되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도 분명해집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우리가 왔음을 받아들이고, 그분으로부터 보내졌음을 믿고 믿음으로 우리가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앎은 하느님과 하나됨에서 나오는 일치의 앎입니다. 예수님님께서는 단순히 하느님을 전하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존재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곧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무엇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앎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깨닫고 그에 맞게 살아가는 삶의 실천입니다.

존재하는 우리와 살아가는 우리 이 둘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보내졌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을 향해 살며, 하느님의 뜻을 세상 안에서 드러내도록 보내진 존재입니다.

하느님을 잊지 않는 사순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정체성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관계와 부름 안에서 발견되는 삶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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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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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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