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에제 47,1-9.12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 - 복음
요한 5,1-16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에제 47,1-9.12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3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가는데, 그의 손에는 줄자가 들려 있었다. 그가 천 암마를 재고서는 나에게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발목까지 찼다.
4 그가 또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무릎까지 찼다. 그가 다시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허리까지 찼다.
5 그가 또 천 암마를 재었는데, 그곳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치기 전에는 건널 수 없었다.
6 그는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잘 보았느냐?”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요한 5,1-16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3월 17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4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형 베드로 신부
세례의 물이 기억하게 하는 것
‘물’은 우리의 일상에서 생명을 지탱하는 필수 요소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차원에서도 깊은 상징을 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전에 들어설 때마다 성수를 찍고 십자 성호를 그으며, 두 양식의 성수 기도 가운데 하나를 바칩니다.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주님, 이 성수로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보호하시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이 기도는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세례 때 받은 은총을 기억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전례 안에서 정화와 축복의 의미로 성수 예식을 거행합니다.
에제키엘서의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부활 시기 성수 예식 때 부르는 성가 ‘성전 오른편에서’는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이가 구원을 받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물에 관한 가장 중요한 상징은 특별히 세례 때 우리에게 부어지는 물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탄생의 문을 열어 줍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 여정은 늘 생명의 물 가까이에서 이루어집니다.
조용하지만 쉼 없이 흐름으로써 생명을 전달하는 물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은총이 흐르는 자리에서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생명을 건네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벳자타 못 주변에 앉아 있던 많은 병자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생명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에게 우리가 먼저 생명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하느님께 청해 봅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흐름 안에서 서로를 일으켜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멈추어 서 있던 이들이 삶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건네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물이 흘러야 하듯 사랑도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문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려갔다.”
물은 흘러야 한다. 사랑도 흐르게 해야 한다. 잘 아시다시피 모든 살아있는 물은 흐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흐르지 않는 물은 죽고 죽은 물은 흐르지 않고 괴어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것은 물이고, 여기서 물은 사랑이자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흐르지 않으면 생명은 죽고 사랑이 괴이지 않고 흐를 때 생명은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흐르게 해야 하지만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나에게 흘러들게 해야 하고 특히 하느님의 사랑이 나에게 흘러들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물은 거꾸로 흐르지 않고 사랑도 내리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내게 흘러들게 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사랑이 내게 흐르도록 낮은 곳에 위치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고 당신 사랑이 필요 없다는 그런 교만함이 우리에게 있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다음엔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앞서 봤듯이 괸 물은 썩듯 사랑도 흐르지 않으면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고 나도 죽고 너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 사랑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도 사랑도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니 위에 있어야 하나요? 예, 제 생각에 내 사랑이 위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사랑이 위에 있어도 그것이 교만은 아니어야 합니다. 제 사랑이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제가 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밑에 있지만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게 해야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하느님 사랑이 곧 제 사랑이게 하는 겁니다. 그것은 보답할 수 없어도 사랑하는 사랑이고,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어 보여도 사랑하고, 원수여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어쨌거나 물은 흘러야 하고 사랑도 흘러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내게 흘러들고, 내 안에 있는 하느님 사랑이 이웃에게 흘러가게 나는 하느님 사랑의 통로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주는 오늘 독서와 복음이고, 이런 가르침 대로 실천키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치유 받는 다는 것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들은 왕실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두 번째 표징’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표징’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안식일에 ‘벳자타 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과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광야생활에 찌들고 문드러진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그가 있는 ‘벳자타 못’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집’인 여기 ‘벳자타 올리베따노 수도원’에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약함과 무능력을 한 아름 보듬고서 말입니다. 벗어나지 못한 질병과 악습과 상처를 부둥켜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라고 즉각적인 믿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를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하면서 구실과 변명을 들이대며 투덜대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들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들것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얹어놓았던 들것을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말씀의 물을 마시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들것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들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사랑의 표지로 들고 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시로 지니신 오상처럼, 그 상처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 그 사랑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에서 십자가를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구원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무기력한 사순이 아니라, 파스카를 향한 희망과 기쁨의 사순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면서 말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5,8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들것에 들고 다니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욕망의 침상을 들고 일어나 참된 안식으로 가라.
오늘은 사순 제4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 있는 38년 된 병자를 만납니다. 38년이라니, 참으로 기나긴 세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베데스다 못가의 풍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천사가 내려와 물을 출렁거리게 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만 나을 수 있는 곳입니다.
말이 좋아 '자비의 집'이지, 실상은 선착순 한 명만 행복하고 나머지는 모두 들러리가 되어야 하는 지옥입니다. 옆에 누운 형제가 경쟁자이고, 내가 살기 위해 저 사람을 밀쳐내야만 하는 곳, 그것이 베데스다의 실체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왜 그토록 피곤한지, 왜 우리 인생에 참된 안식이 없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저 역시 학생 때는 학교에서 경쟁을 해야 했고, 여자를 좋아할 때도 그랬으며, 사제가 되어서도 남들보다 더 좋은 성과를 보이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보니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에덴동산의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하느님처럼 되리라'는 탐욕을 품은 순간부터 겪어야 했던 그 피로를 저도 똑같이 겪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안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안의 '욕망'입니다. 소유욕은 스스로 주님이 되려는 마음이고, 육욕은 스스로 창조자가 되려는 마음이며, 교만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려는 마음입니다. 이 '삼구(三求)'라는 마귀를 내 안에 모시고 사는 한, 우리는 억만금을 가져도 베데스다의 환자처럼 늘 목마르고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안식에 이르는 길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욕망은 채울수록 더 커지는 바닷물과 같습니다.
에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소설 속 노인 산티아고는 마침내 바다 먼 곳에서 거대한 청새치를 만납니다. 노인은 며칠 밤낮을 죽음과 사투하며 그 물고기를 잡으려 고생합니다.
"나는 저놈을 꼭 잡아야 해! 그래야 내가 최고의 어부임을 증명할 수 있어!"
그의 온 신경은 오직 그 거대한 물고기라는 욕망에 고착됩니다.
결국 물고기를 잡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의 공격을 받아 물고기는 뼈만 남게 됩니다. 노인은 그 앙상한 뼈를 끌고 항구로 돌아와 지쳐 쓰러집니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함뿐이었습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이 소설을 쓴 작가 헤밍웨이 자신의 인생입니다.
그는 노벨상과 풀리처상을 받으며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욕망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점에서 그는 안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더 보여줄 것이 없다"라는 강박과 허무에 짓눌린 그는, 결국 노인처럼 지쳐버린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그의 비참한 노력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참된 안식은 가장 훌륭한 작품을 내놓으려 고군분투한 뒤에 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안식은 내가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그럴 필요가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욕망을 채워 증명하려는 시도가 멈추지 않는 한, 우리 인생은 뼈만 남은 물고기를 끌고 돌아오는 노인의 고된 항해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가 "건강해지고 싶으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너는 아직도 1등으로 못에 들어가는 것만이 행복이라 믿느냐?"라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8) 이제 더 이상 그 욕망의 근거에 의지하지 말고, 그런 욕망을 추구할 필요가 없는, 침상이 필요 없는 존재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을 때 참 안식이 시작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느님 아버지가 우주의 주인이신데 자녀가 무엇을 뺏기 위해 싸우겠습니까? 내가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이 들어오면, 스스로 주님이 되려는 소유욕도, 창조자가 되려는 육욕도, 심판자가 되려는 교만도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미 다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안식입니다.
이 안식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누군가 전해주는 진리를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욕망의 침상을 버리고 참 정체성을 회복하여 안식을 얻은 대표적인 사례를 보겠습니다.
세계적인 동기부여 강연가 닉 부이치치는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었습니다. 15세 이전의 그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밤 "내게 손과 발이 생기게 해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남들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 1등은커녕 평범한 사람만이라도 되고 싶다는 그 간절한 욕망이 오히려 그를 38년 된 병자보다 더 깊은 절망의 침상에 묶어두었습니다. 그는 8세와 10세 때 욕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결핍에 대한 욕망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15세의 어느 날, 그는 요한복음 9장의 태생 소경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요한 9,3)
이 말씀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손발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몰라서 불행했구나!'
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위한 특별한 계획이 있음을 믿기로 했습니다. 손발을 가지고 싶다는 그 처절한 욕망을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참된 안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장애라는 '들것'을 부끄러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들것을 들고 전 세계를 다니며 희망을 전하는 사명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네 아이의 아버지로서, 누구보다 행복한 안식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욕망에서의 자유는 "내가 그럴 필요가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이 주신 사명이라는 침상을 들고 걸어갈 때 완성됩니다.
나 스스로 안식하려고 하면 누구도 평화를 보지 못합니다. 더 큰 힘에 나를 내어맡기고,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고백할 때만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안식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교부들의 말씀을 가슴에 새깁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했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된 영혼은 기둥에 묶인 개와 같아서 결코 안식을 누릴 수 없다."
또한 성 에프렘은 "하느님은 우리 마음에 안식의 집을 지으려 하시는데, 우리는 그곳을 욕망의 오물로 채우고 있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이제 우리를 옥죄던 욕망의 침상을 들고 일어납시다. 주님을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과 자존감으로 살아갑시다. 대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합시다. 그분 계명에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 인생은 베데스다의 수용소가 아니라 영원한 안식의 잔칫집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어느 작가가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단어라며, ‘본느’를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본드’인가? 아니면 예전 영화 007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를 말하는가 했는데, ‘본느’라고 합니다. 그 단어는 줄임말이었습니다.
‘본느는 본 대로 느낀 대로의 줄임말’
이렇게 풀이를 보니 꽤 멋진 말입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산다는 것은 정말 멋집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보고서도 모른척하고, 느낀 것을 감추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식적인 삶도 많이 보입니다. 솔직하지 못하고, 보이기 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솔직하게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거짓과 위선의 삶이 아닌 진실된 삶이 필요합니다. 남 눈치 보는 삶이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쁘게 살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뜻에 늘 집중하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외의 것은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벳자타는 ‘자비의 집’, ‘은총의 집’을 뜻합니다. 즉, 물이 철렁거릴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는 한 사람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자비가 없는 경쟁의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서로를 짓밟고 먼저 못에 들어가려는 심한 경쟁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희망을 잃고 체념하기에 충분한 시간일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라고 물으십니다. 보통 환자가 의사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가십니다. 이렇게 늘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질문에 병자는 “저를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요한 5,7)라고 말합니다. 타인과 환경을 원망할 뿐입니다. 생명의 주관자가 앞에 계시는데도, 단순히 물이 출렁이는 그 순간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라고 하십니다. 어떤 행동도, 심지어 신체적 접촉도 없었습니다. 오직 말씀만으로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난리가 납니다.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이유입니다. 안식일에는 물건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이 불법이었기 때문입니다(들것을 옮김).
38년 만에 한 생명이 회복된 엄청난 기적과 기쁨은 보지 못하고, 오직 ‘규정 위반’이라는 종교적 잣대만 들이댑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중요할까요? 지금도 주님께서 먼저 다가오십니다. 그런데 엉뚱한 것만 바라보고, 또 엉뚱한 것만 청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세상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서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죽음과 세금뿐이다(벤자민 프랭클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창조의 힘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일으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병자를 찾아가십니다. 병자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셨습니다. 상처를 먼저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향한 마음을 먼저 깨우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깨어나는 순간 우리의 삶에도 다시 일어나는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몸이 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이 어디를 향해 가는가입니다. 우리는 상처 속에 살아가지만 언제든지 다시 일어나 삶의 의미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과거의 상태에 묶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지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병자가 붙잡고 있던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을 열어 줍니다. 병자는 치유된 후 그 자리에서 계속 머무르지 않고 들것을 들고 일상의 길을 걸어갑니다.
병자의 치유도 자신의 힘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치유 이후의 삶은 은총을 깨닫고 바른 삶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와 생명의 길을 다시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 대신 살아 줄 수 없듯이 삶은 결국 스스로 바로 세워 가야 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멈추어 있던 우리의 삶이 조용히 일어나기 시작하는 사순입니다.
오늘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에제키엘서 47장 9절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03.1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1) | 2026.03.16 |
|---|---|
| 2026.03.1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5 |
| 2026.03.1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4 |
| 2026.03.1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3 |
| 2026.03.1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2 |
| 2026.03.1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1 |
| 2026.03.1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