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1사무 16,1ㄱㄹㅁㅂ.6-7.10-13ㄴ
다윗이 이스라엘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다. - 제2독서
에페 5,8-14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 복음
요한 9,1.6-9.13-17.34-38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1사무 16,1ㄱㄹㅁㅂ.6-7.10-13ㄴ

다윗이 이스라엘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다.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이
6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10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에페 5,8-14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형제 여러분,
8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9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10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11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
12 사실 그들이 은밀히 저지르는 일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입니다.
13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14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요한 9,1.6-9.13-17.34-38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6 예수님께서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7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 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8 이웃 사람들이, 그리고 그가 전에 거지였던 것을 보아 온 이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이가 아닌가?”
9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오.”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니오. 그와 닮은 사람이오.” 하였다.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3 그들은 전에 눈이 멀었던 그 사람을 바리사이들에게 데리고 갔다.
14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었다.
15 그래서 바리사이들도 그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는 “그분이 제 눈에 진흙을 붙여 주신 다음, 제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6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
17 그리하여 그들이 눈이 멀었던 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가 당신 눈을 뜨게 해 주었는데,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34 그러자 그들은 “당신은 완전히 죄 중에 태어났으면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오?” 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35 그가 밖으로 내쫓겼다는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만나시자,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그 사람이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
38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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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형 베드로 신부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를 낫게 하신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에는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웃 사람들, 바리사이들, 유다인들, 심지어 눈먼 이의 부모까지 예수님의 능력과 그 기적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눈먼 이가 볼 수 있게 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는데, 정작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왜 진실 앞에서 그들의 시야가 가려졌을까요? 그 까닭은 그들이 신앙인의 눈으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눈에는 사랑과 연민이 깃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치유의 기적 앞에서 사랑의 눈길 대신 냉소적인 눈길을 보냈고, 누구 하나 기쁨으로 축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는 앞을 보게 된 이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가 눈을 뜨고 처음으로 바라보게 된 세상은 축복이 아니라 상처투성이였습니다. 기쁨의 눈물이 흘러야 할 눈에서 슬픔의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다가오십니다. 보지 못하는 순간에 보게 해 주시고,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해 주시는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또한 대부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눈을 뜬 이가 될 수도 있고, 신앙인의 눈으로 보지 못한 채 편견과 왜곡의 눈길에 사로잡힌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기억합시다. 사랑과 연민이 깃든 신앙인의 눈으로 주님을, 가족을, 이웃을 바라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혹 눈뜬장님은 아닐까?
오늘 에페소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 에페소서의 태생 소경이 바로 이런 존재였습니다. 중도 장애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기에 그것이 어둠인 줄도 몰랐고, 그래서 공관복음의 다른 소경들처럼 절망도 없었고, 벗어나고 싶은 갈망도 없었으며 그래서 주님께 보게 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순시기의 요한복음은 이런 인물들을 계속 들려줍니다. 지난주에는 우물가의 여인을 소개했는데 사랑의 갈증이 있는 여인에게, 다섯 남자와 결혼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던 여인에게 주님은 청하지 않았는데도 다가가시어 그의 갈증이 영적인 갈증이란 것을 일깨워 주신 얘기를 들려줬지요.
오늘도 주님께서는 보게 해달라고 청하지 않는 그에게 다가가시고, 또 묻지도 않고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인지도 모르고 청해도 되는 건지도 몰라 우리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에게도 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한때 어둠이었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기에 이제는 에페소 말씀처럼 ‘주님 안에 있는 빛’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빛 안에 있지 않고, 그래서 육신의 눈이 멀쩡해도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주님의 빛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눈이 멀쩡해도 또 아무리 기를 쓰고 보려 해도 볼 수 없습니다. 빛이 한줄기도 없다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아무리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나는 보지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빛이 있어야 보이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눈만 뜨고 있으면 당연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빛이 있어야 보이는 것이니 사실은 빛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에 그대로 적용하면 빛이신 주님께서 볼 수 없었던 소경을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이고, 반대로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은 빛이신 주님 없이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 없이 보려고 했던 것은 한 편으로는 주님을 빛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주님 없이도 잘 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이렇게 결론 지으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말에 ‘눈뜬장님’이라는 말이 있지요. 진정 그들이야말로 영적으로 눈뜬장님이고, 육의 눈이 멀쩡한 것이 영의 눈을 멀게 한 셈이며, 그것이 그들의 불행인데 우리도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참된 기쁨은 빛을 보는 데서 온다.
오늘은 사순 4 주일이며, 기쁨주일 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기쁨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를 밝혀줍니다. 곧 참된 기쁨은 ‘빛을 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기쁨은 ‘빛이신 주님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모두 눈을 지니고 있고, 눈으로 타인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바라본다고 해서 모두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가 있는가 하면,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심미안’이 있고, 보아도 보여 지는 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는 대로만 고집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제1독서>는 눈이 빛나는 다윗이 선별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제2독서>는 빛의 자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말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리라.”(에페 5,8-14)
그리고 <복음>은 태생소경이 눈을 뜨고 빛을 보는 이야기 입니다. 제자들은 태생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죄든, 부모의 죄든, 죄 탓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이다.”(요한 9,3)
그렇습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소경인 그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곧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대변해 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눈을 뜨게 되는가? 어떻게 그에게 빛이 생기게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침을 묻힌 진흙을 눈에 발라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요한 9,7)하고 하셨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도 못했지만, 말씀에 순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었던 것입니다. 그의 살이 예수님의 신성과 결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도유된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친히 소경의 눈을 만지시고, 그의 가슴 속에 당신의 빛을 부어주시어 그가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남들처럼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혹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도 아직 눈 먼 존재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를 주님을 계시하는 장소로 알아 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을 떠난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학자라 불리는 보나벤뚜라는 인간에게는 3중의 눈이 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눈과 지성의 눈과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의 눈으로써 영혼과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며, 관조의 눈으로써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인간 밖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지성의 눈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관조의 눈으로써 인간 위의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이’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분명, 우리는 이미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면, 완고하여 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은 어둠을 보고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서나 타인에게서 어둠이 보인다면, 얼른 그 어둠을 비추고 있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세상과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바로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가 누리는 참된 기쁨일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깊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9,37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주님!
분명, 이미 당신을 보았습니다.
보고도 아직 보지 못함은
완고하여 인정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오히려 어둠을 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항상 저를 향하여 계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주님! 빛을 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누가 진짜 소경일까?
교우 여러분, 사순 제4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며 "누구 죄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불행의 원인을 과거의 잘못에서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요한 9,3)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하느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그저 기적을 일으켜 안 보이던 눈을 뜨게 하는 신기한 마술이 하느님의 일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진짜 일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곧 새로운 '하느님'으로 재창조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고 하는 게 듣기 거북합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새로 재창조된 태생 소경은 ‘나는 곧 나다’라고 고백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일반 사람이 하느님의 이름, 곧 ‘에고 에이미’(I AM)으로 자신을 고백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만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의 일이 무엇입니까? 자녀에게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는 생존의 보조자가 전부가 아닙니다. 부모의 가장 큰 과업은 자녀에게 "너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인간답게 사회에서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라는 믿음을 주어 자녀를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들어갈 때 아이는 비로소 네발로 기던 짐승의 본성을 버리고, 두 발로 걷는 법을 배우며 인간의 언어로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살 수 있는 존재로 재창조하는 것, 즉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하여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로부터 벗어나 오직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렇게 재창조된 이는 눈이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육신의 눈이 안 보이는 것을 큰 비극으로 여기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짜 실명은 영혼의 시력이 마비된 상태입니다. 이런 자매님을 생각해 봅니다. 남편의 외도로 평생을 배신감 속에 살다 암에 걸린 아내가 있습니다.
세상은 그녀를 불쌍하다 하고 남편을 나쁘다고 말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녀 역시 깊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남편보다 구원받기 더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인다고 말하는 바리사이들처럼.
왜 남편이 미워 죽겠을까요? 그것은 아내 안에도 남편이 탐닉하는 그 '음란의 욕구'가 여전히 행복을 줄 것이라는 오류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도 간음이라 하셨습니다. 내 안에 그 욕구가 살아있기에, 그것을 마음껏 행하는 상대방을 보며 화가 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주인이 되고 창조주가 되며 심판관이 되려는 '삼구(三求)'의 욕망이 곧 고통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진짜 눈먼 상태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믿으면 이 욕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죄를 짓는 사람 때문에 내가 화가 나거나 암에 걸리는 일이 없습니다.
제가 외도하는 남편을 둔 어떤 자매에게 매일 성체조배 한 시간을 시켰습니다. 성체조배하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과 성체가 하나가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매는 1년 동안 성체조배를 하고 나니 밉던 남편이 ‘불쌍해’ 보이더랍니다. 눈이 뜨인 것입니다. 재창조된 것입니다.
여러분, 아기가 걷지 못하고 네발로 기어 다니는 게 화가 납니까? 불쌍해 보여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새로 태어난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그 욕구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욕구가 더는 행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급한 본성이 쫓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사제인데, 사제직을 하다 예쁜 여자를 만나 옷을 벗고 그 여인과 혼인하는 신부를 보면 어떤 마음일까요? 부러울까요? 화가 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쌍해 보일 뿐입니다. 결혼에서 오는 기쁨보다는 사제로 사는 기쁨이 언제나 더 큼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제라는 정체성을 가지면 거기서 오는 행복 때문에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이들은 불쌍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유다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율법으로 남을 심판하는 삼구의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자신들은 눈이 보인다고 자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보인다.' 하고 말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요한 9,41)
하느님이 되려는 욕망을 품고 살면서도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모른 채 인간의 욕구에 갇혀 있는 것, 그 교만이 그들을 영원한 어둠 속에 가둡니다.
교부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비로소 사랑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욕망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새 창조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전해주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보듯, 진짜 태양 빛을 본 사람은 다시 동굴로 돌아가 동료들을 빛으로 인도합니다. 만약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면, 이미 '보이는 사람'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사제의 직무에 대해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 또한 다른 사람을 하느님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은 '사제의 백성'으로서의 소명입니다.
이를 위해 그분이 당신의 손으로 빚은 진흙을 우리 눈에 바르시도록 허락합시다. 우리의 비참함과 나약함이라는 진흙이, 주님의 손길 안에서 진짜 눈이 될 수 있음을 믿고 실로암으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이 정체성의 걸음을 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바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림자에 연연하지 않고, 이 위대한 진리를 온 세상에 전하는 빛의 자녀, 진정한 실로암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다.
당신은 운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는 ‘뽑기’에 단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고, 또 자기가 응원하는 팀은 반드시 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운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운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말하면 진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신문을 나눠주고는 이 신문안에 사진이 몇 장 들어 있는지를 세어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문안의 사진 중 한 장에 이런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 사진을 진행자에게 가져다주면 상금을 받습니다.”
이 글자를 본 사람은 곧바로 진행자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진행자에게 달려간 이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전에 운이 좋은가, 운이 좋지 않은가를 물어봤는데, 글자를 본 사람은 모두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운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주위를 잘 살피는 사람이었고, 자기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찾아온 행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운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주의 깊게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침과 흙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 치유 방법이 어떻습니까?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아닐까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그는 사람들의 냉대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는 자신의 죄, 부모의 죄로 앞을 못 보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포자기의 상태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봤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요구가 담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 결과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호칭의 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라는 분’에서, 바리사이들의 추궁에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나중에는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3)라고 말하고, 마지막에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라며 경배합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앞을 볼 수 있었지만, 영적으로도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바리사이들은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문제를 내세워 “그는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요한 9,16)라고 판단합니다. 편견과 교만 속에서 영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모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운이 정말로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진짜 운이 좋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곁에 늘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 진짜 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또 다른 목표를 세우거나 새로운 꿈을 꾸기에 절대 늦은 때란 없다(레스 브라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마음이 닫히면 눈이 있어도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보고 싶지 않아서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감출 수 없는 우리의 약함이 바로 은총의 통로입니다. 단순히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을 보게 하는 계시의 사건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왜 일어났는가보다 그것을 통해 무엇이 드러났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고통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가 태어나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진정한 삶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이렇듯이 이론보다 살아 본 경험을 통해 더 깊이 형성됩니다. 우리가 경험한 진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치유는 단순히 눈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고집과 두려움을 내려놓지 못하는 어리석은 마음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은 빛을 보게 되지만 빛 속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보지 못합니다. 눈을 뜨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이 아니라 집착을 내려놓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본다는 것은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진실을 삶으로 살아낼 용기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진리는 밖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열릴 때 드러나는 내면의 빛입니다.
우리의 만남이 지식만을 주는 만남이 아니라 눈을 열어 주는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눈이 열린 사람은 하느님의 빛으로 보는 사람입니다. 사순의 빛은 우리가 잃어버린 하느님을 다시 보게 하는 은총의 빛입니다. 우리가 바로 눈먼 자입니다. 그래서 사순은 마음의 눈을 열어 가는 은총의 참된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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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서 5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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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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