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이사 49,8-15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 복음
요한 5,17-30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이사 49,8-15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오늘 복음 성경 말씀
요한 5,17-30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실시간 시청

2026년 3월 18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2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와 함께해 보세요.
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재형 베드로 신부
안식일에 숨겨진 진짜 의미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기셨다는 이유로, 또 하느님을 ‘내 아버지’라 부르며 당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다는 이유로 그분을 죽이려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인간의 입에 올리는 것조차 죄로 여겨지던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며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신 일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성 모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복음에 자주 나오는 안식일 논쟁을 떠올리면, 왜 예수님께서 굳이 충돌을 받아들이시면서까지 안식일에 치유하셨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마치 ‘일부러’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신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이 전하는 안식일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구원 사업입니다. 병자를 일으키시는 치유의 행위는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창조이며, 고통에서 해방하는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은 안식일이야말로 하느님의 일, 곧 창조와 구원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치유 행위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와 이루는 깊은 일치를 드러내는 표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분은 율법을 어기는 이,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모욕하는 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안식일이 지닌 창조와 구원의 의미는 이제 ‘주일’ 안에서 더욱 충만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주일을 지낼 때마다 우리도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구원 사업에 초대받음을 기억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엇박자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한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위의 말씀은 당신과 시온의 관계에 대해 이사야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도와달라고 할 때 하느님께서 그에 맞춰 기껏 응답하시고 도와주셨는데 시온은 하느님께서 자기를 버리셨고 잊으셨다고 투덜거린다고 하시면서 인간의 사랑 가운데 최고의 사랑인 어미의 사랑과 당신 사랑을 비교하시며 여인은 자식을 혹 잊을지라도 당신은 결코 시온을 잊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온이 아니라고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도 이렇게 엇박자 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곧 우리도 시온처럼 하느님께서 도와주셨지만, 도와주지 않으셨다고, 은혜를 베풀어주셨지만, 그것이 은혜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엇박자란 무엇입니까? 쿵짝이 안 맞는 걸까요? 엇박자란 도움을 주실 때 도움받으면 엇박자가 아닌데, 또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면 엇박자가 아닌데 주실 때 안 받고 물 들어올 때 노 안 젓거나 물 빠지고 난 뒤에 노 저으면 그것이 엇박자지요.
우리에게 그런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해가 떴는데 잠자거나 집구석에 처박혀있고, 봄이 왔는데 꽃구경하지 않고 TV나 보고 정성 들여 밥을 차려놨는데 그때 집을 나가곤 하지요.
그런데 이것은 주님께서 주실 때가 우리가 받을 때가 되지 못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그것이 도움이고 은혜라는 것을 몰라보고 무시한 것의 문제입니다. 또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늘 보고 계시는데 우리는 다른 것을 보는 곧 시선의 엇박자인지도 모릅니다.
엄마와 어린아이는 시선의 엇박자가 없습니다. 엄마는 늘 아이를 보고 아이도 엄마를 놓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보신 대로 하시고 보시는 대로 하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 그래서 주님께서 보신 것은 살리는 일이며, 그래서 주님께서 어제 삼십팔 년을 앓았던 병자를 고치신 것은 살리는 일이고, 이제 당신이 하실 일도 심판하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도 문제지만 일을 하면 하는 일마다 죽이는 일이면 그것이 더 문제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하시는 주님을 문제적 인간이라고 보며 주님을 단죄하고 이내 죽일 텐데 실은 그렇게 심판만 해대는 바리사이들이 더 문제적 인간들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우리 사랑 사이에 엇박자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은혜와 우리 갈망 사이에 엇박자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시는 일마다 살리는 일만 하시는데 우리는 심판만 해대는 그런 엇박자도 없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세 가지 중요한 말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의 정당함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며, 세 가지 중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아버지께서 행하신 것을 아들도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을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니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의 아버지와의 연합은 사랑의 연합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일할 때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하시듯이, 저희도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일하게 하소서.
<둘째>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하느님께서 ‘신적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 하느님의 사랑에서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미래형이 아닌 ‘얻는다.’는 현재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이를 믿게 됩니다.
그러니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믿음의 결과로 생명이 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신 생명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는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되며, 그 믿음으로써 생명의 체험을 깊이 하게 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고,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믿는 이가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렇게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하오니, 주님! 저희가 그 거룩한 본성에 참여시킴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희 안에서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그 거룩하고 고귀한 생명을 저희의 삶으로 찬미하게 하소서.
<셋째>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무덤 너머에는 두 존재의 양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과의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니 바로 지금이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바로 그때입니다. 오늘 <독서>에는 예고된 “은혜의 때”(이사 49,8)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5,30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순종하지 않는 자는 진리를 말할 수 없다.
오늘은 사순 제4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가장 날카롭고도 본질적인 원리를 선포하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한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예수님은 당신의 판단이 올바른 이유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순종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뒤집어 보면 참으로 무섭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는 결코 진리를 말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순종하지 않는 입술에는 반드시 자기 이익과 자아의 욕망이 섞이게 되고, 그 말은 결국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주인이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는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내 안의 자아, 곧 뱀에게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뱀은 언제나 '네 판단이 옳다'고 속삭이지만, 그 끝은 파멸입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도 파멸로 이끕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형제가 하는 말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부모의 생명이 아니라 자기 자아의 이익을 위해 당신을 이용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포장된 학문적 탐욕 - 지니 위그먼(Genie Wiggman)의 비극」
197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3년 동안 방안에 갇혀 지냈던 이른바 야생아 지니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아이를 구하겠다고 나선 학자들과 치료사들은 처음엔 세상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지니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것처럼 보였고, 자신들이 지니에게 언어와 인간성을 되찾아줄 '구원자'라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에는 하느님의 질서에 대한 순종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문가라는 자신의 '자아'에 순종했습니다. 학자들은 지니를 한 인격체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논문을 증명할 '연구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그 연구 대상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의 사랑이라고 자신들을 설득시켰습니다.
결국 지원금이 끊기고 연구가 한계에 부딪히자, 그들은 지니를 차가운 위탁 시설로 내던졌습니다. 지니는 다시 벙어리가 되었고, 구원받기 전보다 더 비참한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출처: 수전 커티스, 『지니: 야생아의 언어 습득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 1977)
자아에게 순종하는 이들이 말하는 '치료와 사랑'은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영혼을 자아라는 뱀의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 잔인한 유괴였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의 말끝에는 창조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자아’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라는 뜻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몇 년 동안 부정하였습니다. 그렇게 만약 제가 결혼을 해서 제가 사제가 되는 대신 아이들을 사제로 만들고 수녀로 만들려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저의 말은 아이들에게 참으로 진리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제가 사제가 되지 못한 것을 저 스스로 위로하는 데 이용당하였을 것입니다.
진리와 옳은 말은 다릅니다. 옳다고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창조자가 줍니다. 그러니 창조자에게 순명하지 않는 자는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의 질서에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죽음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거창한 선교 계획을 접고 '순종의 고해소'에 자신을 가두었던 성 레오폴도 만디치(St. Leopold Mandić)가 그 좋은 모델입니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레오폴도 신부님은 평생의 숙원이 있었습니다. 바로 갈라진 동방 교회(정교회)의 일치를 위해 동방으로 가서 선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하느님이 주신 일생일대의 소명이자 진리라고 믿었습니다. 매일 밤 지도를 보며 동방으로 떠날 날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장상들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레오폴도 신부, 당신은 몸이 약하고 키도 작으니 이탈리아 파도바의 고해소에서 신자들의 고해나 들어주시오."
신부님은 처음엔 큰 내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내 지식과 열정은 동방을 향해 있는데, 왜 나를 이 좁은 상자 속에 가두는가?'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옳은 판단'을 접고 순명했습니다.
그는 2평 남짓한 낡은 고해소에서 하루 12시간 이상을 40년 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성인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의 동방은 바로 여기입니다. 장상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진리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그렇게 자아를 죽이고 순종의 자리를 지켰을 때, 성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하느님의 진리가 되었습니다.
「성 레오폴도 만디치의 예언적 진리: 파도바 대공습의 기적」
성인이 선종하기 전인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파도바는 연합군의 극심한 폭격 대상이었습니다. 성인은 동료 수도자들에게 놀라운 예언을 남깁니다.
"우리 수도원도 폭격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고해소만큼은 하느님께서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곳은 수많은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선종한 뒤인 1944년 5월 14일, 실제로 파도바에 대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카푸친 수도원은 직격탄을 맞아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성당의 지붕이 날아가고 벽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런데 먼지가 가라앉은 뒤 사람들이 목격한 광경은 전율 그 자체였습니다. 거대한 수도원 건물 전체가 폐허가 되었는데, 오직 성 레오폴도 신부님이 40년 동안 순종하며 지켰던 그 좁은 고해소 '나무 상자'와 그 곁에 있던 성모상만이 유리창 하나 깨지지 않은 채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을 버리고 장상의 명령에 무작정 순종했던 성인의 삶이, 그 공간을 진리의 요새로 만들었습니다. 순종하는 자가 내뱉은 말이 '진리'였음이 하느님의 손가락에 의해 증명된 사건입니다. (출처: 파도바 성 레오폴도 만디치 성지 기록)
혼자서는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생명에 순종하는 자여야 진리를 말하고, 올바른 판단과 심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기에 진리이십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자신의 사목 표어를 "순명과 평화(Oboedientia et Pax)"로 정하였습니다. 그는 외교관 시절이나 주교 시절, 자신의 뜻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발령을 자주 받았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왜 나를 이런 험지로 보내는가?"라고 따질 법도 했지만,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교회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 그것이 내가 가장 안전하게 진리의 길을 걷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 요한 23세, 『영혼의 일기』 참조)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지식이나 고집으로 교회를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령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많은 이가 반대했지만 그는 교회의 전통과 성령의 인도에 철저히 순명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공의회를 해야 할 이유조차 없었지만, 결국 끝나고 나서는 역대 가장 필요하고 완전했던 공의회가 되어 교회 쇄신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교부 성 이레네오는 『이단 반박』에서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이며, 그분께 불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죽음이다." 또한 성 베르나르두스는 "순명은 자신의 의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의지 안에 나를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며 생존 본능을 죽여가는 아이가 진짜 어른으로 성장하듯, 우리도 교회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우리 안의 뱀을 죽입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과 나를 따르는 누군가에게 올바른 판단과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의 소유자가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중국의 분서갱유, 나치의 책 화형식, 기원전 3세기 세상의 모든 책을 모았다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탄 것 등등…. 이렇게 책이 사라진 것은 이야기가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도 거의 100년 동안 불온서적의 역사가 있습니다. 권력자들이 각종 명목으로 특정한 책 판매와 유통은 물론이고 읽기까지 금지한 것입니다. 예전에는 공산주의적 견해와 사상을 지적하면서 책을 없앴다면, 지금은 ‘젠더’와 ‘페미니즘’이 공동체를 위협하는 ‘불온사상’ 취급을 받습니다.
혐오를 통해 특정한 생명을 공격하고 취약한 이들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면서 세상을 바로 잡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이를 판단할 수 있을까요? 자기의 판단을 무조건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책을 경기도의 중학교 두 군데에서 학생들 열람을 제한했고, 한 여고는 음란한 묘사라며 책을 폐기했습니다. 청소년들의 유익하지 않다는 보수단체의 낙인찍기 민원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문학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문학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예수님을 판단하는 경우가 정말로 많았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자기 위주로 무조건 판단하고 단죄하는 마음이 어쩌면 우리 인간의 모습일까요?
당시 유다교 랍비들은 하느님의 생명과 심판의 일은 안식일에도 계속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도 동일하게 안식일에도 일할 수밖에 없음을,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분노합니다.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여기는 신성모독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라고 하시면서 두 분은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일치 속에 있다고 하십니다.
이 일치는 사랑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드러나며, 아들은 그 사랑에 순명하여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세상에 그대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거부하면서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명확하게 답하십니다. 단순한 예언자나 도덕 교사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심판하실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 옳다는 교만으로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끊임없는 교만 속에 사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마음 속으로만 하는 감사는 누구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르푸드 스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모든 사랑이 마지막에 만나는 지점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생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먼 미래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시작되는 생명입니다. 심판은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상태입니다.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 존재가 더 이상 평가와 비교의 틀에 갇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믿음은 이미 주어진 생명 안에 머무는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음은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내면의 신뢰를 회복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밖에서 답을 찾으려 하고, 남의 기준 속에서 자신을 판단합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 있는 이가 이미 생명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순간, 우리는 이미 죽음을 넘어 생명 안에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믿음으로 이미 주어진 생명 안으로 돌아가는 은총의 사순 되십시오.
오늘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이사야서 49장 15절
오늘 성경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03.1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7 |
|---|---|
| 2026.03.16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1) | 2026.03.16 |
| 2026.03.1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5 |
| 2026.03.1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4 |
| 2026.03.13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3 |
| 2026.03.1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2 |
| 2026.03.1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0) | 2026.03.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