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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1.2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by 평화다방 2026.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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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2026년 1월 27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2사무 6,12ㄴ-15.17-19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 복음
    마르 3,31-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2사무 6,12ㄴ-15.17-19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그 무렵

12 다윗은 기뻐하며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3 주님의 궤를 멘 이들이 여섯 걸음을 옮기자, 다윗은 황소와 살진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다.

14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집안은 함성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17 그들은 다윗이 미리 쳐 둔 천막 안 제자리에 주님의 궤를 옮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윗은 주님 앞에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쳤다.

18 다윗은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다 바친 다음에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였다.

19 그는 온 백성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모든 군중에게 빵 과자 하나와 대추야자 과자 하나, 그리고 건포도 과자 한 뭉치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 뒤 온 백성은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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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르 3,31-35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예수님께서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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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27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32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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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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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철구 요셉 신부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

참으로 냉정하십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을 어머니와 형제들이 들었다면 많이 서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끊으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35)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알지만, 사제의 삶은 직접 부모님께 보답하는 삶이 아님을 또한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자리에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방법으로 주님의 뜻이 제 삶을 통하여 이루어질 때, 부모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도 미사를 드리는 가운데 부모님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넓어지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우리의 발걸음 안에서 열매 맺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모두 한 가족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실천하여 모두 한 가족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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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춤 기도

“다윗은 기뻐하며 다윗 성으로 하느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

오늘 이 말씀 가운데서 ‘주님 앞에서’가 특히 눈에 들어옵니다. 왜냐면 다윗의 아내 미칼은 다윗이 신하와 여인들 앞에서 춤췄다고 하니 말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과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참 볼 만 하더군요!”

이것은 너무도 큰 차이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한 것이면 춤춘 것이고 그것도 신하들과 여인들 앞에서 채신머리없게 춤춘 것이지만 하느님 앞에서 한 것이면 춤춘 것이 아니라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미칼과 다윗의 차이입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이듯 미칼의 눈에는 이것이 춤에 불과하고, 그것도 사람들 특히 여자들 앞에서 춘 춤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다윗은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 앞에서 춤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춤 기도’라고 이름 붙이고 싶고, 이 춤 기도가 입의 기도보다 더 전인적 기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온 힘을 다해서’라는 말이 또 마음에 와닿습니다. 온 힘을 다해서 춘 그의 춤은 갈라지지 않는 의식과 전심을 다 한 기도였고 온몸으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의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가 프란치스코의 기도에 관해 얘기한 것을 떠올립니다.

“기도할 때 그는 숲을 한숨으로 채웠고, 땅에는 눈물이 흘러가게 하였으며 손으로 가슴을 쳤다. 실로 자기 자신의 전 존재를 번제물이 되게 하려고 자기 눈앞에 어느 모로 보나 지극히 단순화된 자기의 모습을 놓곤 하였다. 기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곧 기도였던 그가 주님께 빌어 얻고자 했던 그 하나를 향하여 그의 전 존재를 바쳐 자신의 모든 집중과 열정을 이끌어갔다.”

많은 경우 우리는 기도할 때 매우 인색합니다. 기도할 때 입도 뻥긋하지 않고 노래방에 가서는 그렇게 목청껏 그리고 온몸으로 노래하면서도 미사에서 성가를 부를 때는 목소리를 그렇게 아낍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기도하고서도 기도한 것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노래하면 그 노래가 하느님께 가 닿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와닿지 않으니 자기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윗을 보면서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고, 온 마음과 온몸의 기도 곧 춤 기도라는 신선한 도전도 받는 우리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함께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당신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립과 충돌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또한 당연히 환영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받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요한 1,11)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친척들에게마저도 몰이해와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하여 당신의 진정한 ‘영적 가족’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을 둘러보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

이는 혁명과 같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계신 집 밖에서 찾고 있으면’(마르 31 참조)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에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시면서,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최후만찬의 ‘대사제의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라고 기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 가족은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요,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함께 지내며 함께 길을 가는 동행자요 동반자’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영적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실행’하는 이입니다.

사실,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은 사람들”(마르 3,34), 곧 성당에 와 있다할지라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할지라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주위에 둘러앉아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하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명’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도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마태 7,24)으로 말씀하십니다. 또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도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7)고 말씀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께서는 행복의 문을 열어주시니, 저희가 ‘당신의 뜻’을 실행하여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3,33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 묵상 한눈에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누가 내 어머니냐?”라는 질문은 “나를 낳아다오”라는 절규입니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파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주위에 둘러앉은 제자들과 군중을 가리키며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듣고 “아, 하느님 뜻을 따르면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구나!” 하고 쉽게 넘어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어머니’라고도 하셨습니다. 형제나 누이는 같은 피를 나눈 동등한 관계지만, 어머니는 다릅니다. 어머니는 생명을 잉태하고, 뼈가 으스러지는 산통을 겪고, 자신의 피를 변하게 만든 흰 젖을 먹여 키우는 존재입니다.

과연 죄 많은 인간인 우리가, 심지어 남자인 신자들까지도 감히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 어쩌면 예수님은 우리가 반드시 당신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인간 삶의 완성은, 내 안에 하느님을 잉태하고 그 하느님을 세상에 낳아 기를 때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이집트 카이로에는 ‘자블린’이라 불리는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 마을이 있습니다. 악취가 진동하고 파리 떼가 들끓는 이곳에 ‘마마 매기(Mama Maggie)’라 불리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본명은 매기 고브란. 그녀는 본래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대학 컴퓨터공학 교수로 재직하던 엘리트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이 마을을 방문했다가, 쓰레기 더미를 뒤져 먹을 것을 찾는 아이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녀는 그 길로 화려한 교수직과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그 악취 나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매일 3만 명이 넘는 아이들의 머리를 감겨주고, 짓무르고 더러워진 발을 씻겨줍니다. 그녀가 아이들의 발을 씻기며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은 이것입니다.

“너는 왕자님이야. 너는 공주님이야. 하느님이 너를 정말 사랑하신단다.”

쓰레기 취급을 받던 아이들은 그녀의 손길과 이 말 한마디에 자존감을 회복하고 눈동자가 빛나기 시작합니다. 콥트 정교회 신자인 그녀는 비록 수녀님도 아니고 아이들의 생물학적 엄마도 아니지만, 그곳의 모든 아이는 그녀를 ‘마마(엄마)’라고 부릅니다. 죽어가던 영혼을 씻겨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적 산파’이자 ‘어머니’의 역할입니다.

이 거룩한 모성은 여성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보면 충격적인 고백이 나옵니다. 그는 독신 남성이었지만,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며 이렇게 절규합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형성되실 때까지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갈라 4,19)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복음을 버리고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며, 단순히 화를 내거나 훈계하는 스승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배가 끊어지는 듯한 ‘해산의 고통(Odinō)’을 느꼈습니다. 그 영적 산통을 기꺼이 감내하며 눈물로 호소했기에, 그는 엄격한 사도를 넘어 신자들의 영적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남자가 어머니가 되는 유일한 길은, 길 잃은 형제를 위해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신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신비를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으로 하느님을 우리 몸과 마음에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줌으로써 거룩한 행위로 그분을 낳을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실재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 그 사람이 “아, 하느님은 살아계시는구나!”라고 느끼게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작은 예수’를 낳아준 것입니다. 내 행위가 곧 예수의 탄생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젖을 물리는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합시다. 이것이 내가 고귀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소화 데레사의 어머니이자 루이 마르탱의 아내인 성녀 젤리 마르탱은 9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4명을 어린 나이에 잃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시누이에게 보낸 편지에는 놀라운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녀를 주실 때, 저는 그저 아이들을 안고 즐거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아이들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 낳았습니다. 저는 하늘나라의 시민을 낳고 기르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키워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살아남은 다섯 딸은 모두 수녀가 되었습니다. 한 집안에서 교회 학자인 성인(데레사)이 나왔고, 부모인 루이와 젤리 마르탱 부부 역시 2015년에 부부로서 함께 시성되었습니다. 셋째 딸 레오니 또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어머니 젤리 마르탱이 자녀를 단순히 ‘내 딸’이 아니라 ‘하느님을 품은 그릇’으로 키워냈기에, 그 가정은 지상의 가족을 넘어 천상의 성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의 아버지이고 어머니가 될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영적인 자궁과 젖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누군가를 전교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에게 젖을 물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치 건강한 몸을 가지고도 자녀를 낳지 않는 불임의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둘러보며 간절히 묻고 계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냐? 누가 나를 이 삭막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해 주겠느냐?”

이 질문은 “제발 나를 낳아다오”라는 주님의 절규이자 초대입니다. 이번 한 주간, 바오로 사도처럼 해산의 고통을 감내하고, 마 조드처럼 형제에게 은총의 젖을 물려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감히, 그러나 자랑스럽게 ‘그리스도의 어머니’라 불리는 은총을 누리시길 빕니다. 아멘.

 

오늘의 모든 말씀 묵상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구석기 시대 조각상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보면, 당시에는 뚱뚱한 몸매가 출산과 풍요의 상징이자 미의 기준이었습니다. 먹거리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원시시대에는 수렵 채취를 위해 산과 들로 다니느라 살이 찔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세까지도 그러했습니다. 하루 종일 노동해야만 생계를 겨우 유지할 수 있었던 평민과 달리, 일하지 않고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귀족층, 즉 가진 자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뚱뚱한 몸매는 곧 부의 상징이었고, 자연스레 미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다를까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1990년 초까지만 해도 통통한 여성에게 ‘부잣집 맏며느릿감’이라는 덕담을 건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현재는 걸 그룹과 같은 마른 몸매를 선호합니다.  

미의 기준은 이렇게 바뀝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중요하게 여기는 아름다움은 과연 영원할까요? 이 ‘아름다움’ 역시 시대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게 될 것입니다.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시대를 따르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떠해야 할까요? 주님을 따른다고 말로만 외치면서, 행실로는 전혀 변화가 없다면 어떨까요? 진심으로 주님을 따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제 세상의 가치보다 주님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인물들이 위치한 자리입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밖에 서서’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밖’은 단순히 물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신비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 둘레에 군중이 앉아 있습니다. 즉, ‘안’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죄인이거나 부족한 사람들이라 해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분의 권위 아래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구원은 혈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며 말씀을 듣는 곳에서 온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는 혈연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혈연보다 더 상위의 가치를 세우신 것입니다. 가장 큰 가치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변화되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성당은 선택받은 몇 사람만을 위한 작은 기도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집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다른 말씀 묵상도 함께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피로 이어진 길은 문턱에서 멈추고, 뜻으로 걸어온 발걸음은 가족이 되어 안으로 함께 들어옵니다. 가족은 이미 정해진 이름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살아낼 때, 우리는 그분의 참된 가족이 됩니다. 존재는 관계가 되고 관계는 가족이 됩니다.

형제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같은 선(善)을 향해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가족은 붙잡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깨어 있는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살아내는 삶이, 우리 사이를 참된 가족으로 엮어 줍니다. 가족을 규정하는 기준이나 본질은 같은 출신이 아니라, 실천으로 형성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살아내는 이들로 이루어진 영적 공동체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족입니다.

의로운 행위가 믿음의 진실성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삶으로 실행할 때, 혈연은 관계의 출발점이 되고 순종은 참된 가족을 완성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누가 우리 곁에 있는지를 묻기보다, 우리가 어떤 뜻을 따라 서 있는지를 조용히 물으십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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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 3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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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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