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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026.01.2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평화방송

by 평화다방 2026.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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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2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추며 하루를 시작하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말씀 안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일미사 복음과 오늘의 성경말씀 묵상을 한 페이지에 모아 정리했어요.

 

 

 

2026년 1월 25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평화방송

 

 

 

매일미사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가톨릭 전례에 따라 전해지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입니다. 원하는 구절을 누르면 해당 말씀으로 바로 이동합니다.

 

  • 제1독서
    이사 8,23ㄷ―9,3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 제2독서
    1코린 1,10-13.17
    모두 합심하여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 복음
    마태 4,12-23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이사 8,23ㄷ―9,3

 

오늘 제1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23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9,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2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3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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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1코린 1,10-13.17

 

오늘 제2독서 성경 말씀 매일미사

모두 합심하여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10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1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 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라도 하였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말씀 요약 보기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마태 4,12-23

 

오늘 복음 성경 말씀 매일미사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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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25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주요 순서입니다. 아래 시간을 클릭하면 해당 타임스탬프로 바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14:23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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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들과 함께 하는
오늘 말씀 묵상과 말씀 카드

 

오늘의 말씀 묵상 성경 말씀

 

오늘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싶다면 아래에서 매일미사 말씀묵상과 성경말씀 이미지를 한눈에 살펴보세요. 다양한 시선으로 전해지는 오늘의 말씀 묵상부터, 하루를 오래 기억하도록 돕는 성경말씀 카드 이미지, 그리고 삶에 꼭 필요한 성경구절 모음까지 함께 정리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말씀을 천천히 읽고, 필요한 말씀은 마음에 담아 저장하고, 다시 꺼내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말씀 안에서 이어가 보세요.

 

 

오늘 말씀 묵상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말씀묵상부터 말씀카드까지, 오늘 말씀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철구 요셉 신부

따라간다는 것의 의미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처음 하신 말씀과 그분께 부르심을 받은 첫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을 버리고”(마태 4,20)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그들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그리고 온전히 응답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협조자가 되는 첫걸음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배웠습니다. 갈릴래아 곳곳을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 앓는 이들과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보며, 제자들은 그분의 사랑과 연민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의 인격을 닮아 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 배웠다면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병자를 고치시는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되어야 하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주님 사랑의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고,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데서 시작됩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주님의 협조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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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어둡다면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아시다시피 복음 가운데서 마태오복음은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을 실현하신 분이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태오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쓴 복음이기에 그런 것인데, 오늘 복음은 오늘 독서 이사야서가 예언한 것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예언은 천대받던 고장 즈불룬과 납달리가 빛을 보고 영광스럽게 되리라는 내용이고 어떻게 그리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다른 곳보다 먼저 이곳에 가심으로써 그리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공생활의 첫 번째 활동 지역으로 이사야가 얘기한 고장을 유대 고장보다 먼저 택하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을 뽑기 전에 먼저 이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이곳에 먼저 가셨을까요? 이걸 알려면 그다음 말씀을 보면 되겠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니까 마태오복음은 주님께서 천대받고 어둠 속에 있던 이방인의 고장 즈불룬과 납달리를 가셨음을 얘기한 다음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얘기하는 것이고, 천대받는 사람이 없는 곳이 하늘나라라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 공동체에 그대로 적용하면 우리 공동체에 천대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그것이 하느님 나라라는 말입니다. 우리 속담에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께서 쥐구멍 같은 즈불룬과 납달리까지 찾아오시어 천대받고 어둠 속에 있던 그들도 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마태오복음은 요한복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장이 한처음 말씀이 계셨으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고 빛이 되어 오셨다고 얘기하는데 마태오복음도 예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빛이 되어 오신 지금 빛이 없어 어둡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둡다면 그 빛이 그에게 없는 것이고, 그가 빛 가운데로 나아가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다시 쥐구멍에 빗대어 우리 어둠을 얘기한다면 쥐구멍에 있는 우리가 쥐구멍을 막지만 않으면 되고, 더 나아가 쥐구멍에서 나오기만 하면 되는데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천대하여 쥐구멍 속으로 숨어 들어갔을지라도 이제는 주님께서 거기까지 찾아와 볕도 주시고 빛도 주시려고 하니 그 따듯한 볕과 환한 빛을 우리가 거부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두운 것은 우리 공동체가 어두워서 어둡거나 공동체가 나를 어둡게 해서 어두운 것이 아니라 나와 공동체 안에 빛이신 주님께서 아니 계시기에 어두운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아니 계신 것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두우면 내가 빛이신 주님을 모셔 들이면 되고, 우리 공동체가 어두우면 너 때문에 어둡다고 서로 탓하지 말고 같이 주님을 모셔 들이지 못했음을 뉘우치고 같이 주님을 모셔 들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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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는 따르는 사람일까요? 숭배하는 사람일까요?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포하신 7년째 되는 날입니다. 교종께서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그분의 소중한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고, ~하느님 말씀의 풍부한 가치를 선포하기 위한 것”(자의교서 “우리의 마음을 여시어”, 2019.9.30.)이라고 이 날을 제정하신 의미를 밝히셨습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1,17)

오늘 우리도 말씀의 가치를 깊이 되새겨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에서 복음 선포의 그 첫 발을 내딛으십니다. 그리고 이는 <제1독서>에서 예고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마태 4,14)이었음을 밝히십니다.

그러니, 이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 사명도 함께 밝혀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죽음의 그늘에 시달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먼저 선포되어야 하는 일이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그곳이 많은 이방인들이 출입하는 곳이어서, 복음이 그들을 타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또한 어두움 속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시는 분”임을 밝혀줍니다. 그렇게 “어둠에 앉아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습니다.”(마태 4,16 참조)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그늘, 어둠 속에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다 해도 더 큰 불의와 부정이 난무합니다.

궁핍과 불안에 떨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갈라져 있고, 자신의 이기밖에 모르는 시대가 되어 있는지요!

사람이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 마련해 주셨는데도, 어째서 사람들에게는 불평만 늘어갈까요? 우리의 필요를 좀 줄여서 가난하게 살 수는 없는 걸까요?

그 어디서 참된 기쁨,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요? 대체, 이러한 어둠과 질곡과 죽음의 그늘에서 빠져나와, 생명의 빛으로 가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 답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그것은 “가까이 와 있는 선사된 하늘나라”를 맞아들이는 일이요, 동시에 “회개”를 동반하는 일입니다. 곧 빛을 받아들이는 데는 삶의 전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가 빛이 되어, 어둠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 습관을 그대로 둔 채 하늘나라를 맞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네 어부들처럼, 단지 습관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도, 그물도, 아버지도, 생계수단과 가족도 내려놓아야만 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을 놓아야 하고, 시대를 비껴가야 하고, 남들에게 배척받는 일을 받아들여야 하고, 자신이 지녀온 믿음과 사랑과 희망마저도, 끝내는 자기 자신마저도 내려놓아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버리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빛과 생명을 맞아들이는 데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건설되지 않는다면, 버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의 전환이 곧 “회개”라 할 수 있겠지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곧 그 분의 사랑 안으로의 전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건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회개’는 하늘나라를 얻기 위한 방편인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선사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는 자연스런 결과인 까닭이지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의 첫 제자들처럼,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따라나서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라고 하시지, 단지 당신에 대한 숭배자나 지지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곧 당신을 “삶으로 따르는 제자”를 원하셨습니다. “숭배하는 사람”과 “따르는 사람”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숭배하는 사람”은 그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여 떨어져서 마치 극장에서처럼, 차분히 앉아 자신과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 우리가 전례를 거행하면서, 감실 앞에서 머무르면서, 그렇게 숭배하고 예배만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반면에, “따르는 사람”은 따르는 그 대상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처럼,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사람낚는 어부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보통 때는 “따르는 사람”과 “숭배하는 사람”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가 평상시에는 예수님을 따라 나선 제자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상황이 되면, “숭배자”는 가리옷 유다처럼,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버리지만, “따르는 이”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고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노고와 자신을 바칩니다. 19세기의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는 피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자기부정과 자기포기의 요구, 세상에 대해 죽으라는 요구는 분명히 위험하다. 그 위험이 따르는 사람과 숭배하는 사람을 갈라놓는다.”

“우리는 따르는 사람일까요? 숭배하는 사람일까요?”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4,18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 묵상 한눈에 보기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인공지능 시대에 종교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해답

찬미 예수님.

최근 유튜브에서 화제가 된 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제목이 섬뜩합니다.

“5년 남았다.”

챗GPT나 제미나이보다 훨씬 강력한 범용 인공지능(AGI)이 등장하면 인류의 직업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이제 인간이 지능으로 AI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의사, 변호사, 예술가, 심지어 코딩하는 개발자까지, 우리가 ‘선망’하던 직업들이 가장 먼저 대체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처음엔 많은 실업자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일할 필요가 없는 세상, 국가가 기본소득을 주어서 그것으로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세상이 올 것입니다. 돈이 돌아야 인공지능 회사도 운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유토피아일까요?

역사는 경고합니다. 로마 제국이 패망할 때, 시민들은 ‘빵과 서커스’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일은 노예들이 했고, 국가는 공짜 빵(기본소득)을 주었고, 넘쳐나는 잉여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콜로세움에서 피 터지는 검투사 경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쾌락에 취해 자립심을 잃고 무기력해졌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인간은 동물적 본성에 빠집니다. 그렇게 세상이 멸망합니다.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부가 엄청난 보조금을 주며 일하지 않게 만들자, 그들은 그 돈으로 술과 마약에 빠져들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절체절명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물을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인간인 것 빼고 우리보다 잘하는 게 뭐가 있어?”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습니다. 특별히 생명을 탄생시키고 사랑하는 일에서는 인공지능은 인간 앞에서 무력합니다. 인공지능 아이가 인간의 자녀가 되려고 하나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영화 ‘A.I.’나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 아이의 엄마가 되려고 하나 그럴 수 없는 ‘마더’라는 영화는 묻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로마 시대처럼 ‘내가 노예보다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강력해!’라는 말로 자신을 정의해야 할까요? 동물들도 더 가지고 더 먹고 더 세지려 합니다. 이것은 인간만의 본성이 아닙니다. 이때 종교가 해야 하는 것은 ‘인간만의 본성은 무엇인가?’에 해답을 주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류가 살길을 명확히 제시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더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AI가 더 잘합니다. 예수님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AI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인공지능은 정보를 줄 수 있어도 자신을 희생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은 희생의 고통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사명을 주십니다. 사명은 창조자가 주시는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은 만들어진 것만 가질 수 있고 그 만드신 분만 해답을 가지십니다. ‘사람 낚는 어부’란 ‘하느님 자녀를 낳는 존재’란 뜻입니다. 물고기 잡는 존재라는 자기 정체성으로는 AI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제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직업을 찾으면 안 됩니다. 그런 직업은 결국 다 대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AI와 경쟁할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려는 사명 의식을 가지면 AI를 이용하게 됩니다.

일론 머스크를 봅시다. 그는 창조자를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은 인류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가 인류에 의해 파괴될 것을 생각하여 그는 인류 문명을 화성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낮에는 타죽고 밤에는 얼어 죽는 물도 공기도 없는 그런 곳에 어떻게 인류를 가게 하고 살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는 물고기 잡아서 돈을 버는 삶 대신, 인류를 구하려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인공지능의 경쟁자가 아닌 인공지능을 빨리 만들어서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는데 도움을 받으려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비할 수는 없지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는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저도 인공지능이 빨리 더 발전하기만을 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은 ‘하.사.시.’를 인공지능으로 영화로 만드는 일입니다. 머지않아 가능할 것 같고 그래서 제대로 번역하려고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홍익인간의 사명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창조자를 믿지 않으면 목적을 묻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로마 시대처럼 흥청망청하다가 자신도 망하고 세상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창조자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여기서 ‘만들겠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원어는 ‘포이에소(Poiēsō)’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쓰신 단어입니다. 즉, “흙먼지 같은 너희를 빚어 나의 신성(Divinity)을 지닌 자녀로 재창조하겠다”는 뜻입니다. 창조와 사명은 함께 갑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AI와 경쟁하지 않고 오히려 AI를 이용하는 존재가 됩니다.

1429년,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침략으로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군은 최신식 장궁과 압도적인 화력을 갖춘반면 프랑스군은 패배 의식에 젖어 오합지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돔레미 시골 마을의 문맹 소녀 잔 다르크가 나타납니다. 열일곱 살의 양치기 소녀가 덩치 큰 장군들과 거친 병사들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칼 한번 쥐어본 적 없는 계집아이 따위가 전쟁을 한다고?"

물리적인 힘으로만 따지면 잔 다르크는 병사 한 명도 이길 수 없는 약자였습니다. 만약 그녀가 병사들과 칼싸움으로 경쟁하려 했다면 1분도 안 되어 목이 달아났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인간이 계산 능력으로 AI와 경쟁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그들과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을 ‘지휘’했습니다. 그녀에게는 병사들이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프랑스를 구하라! 왕세자를 랭스로 데려가 대관식을 치르게 하라!"

그녀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믿었기에, 그 두려운 군대를 자신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녀가 "나를 따르라!" 하고 깃발을 높이 들자, 살인 기계 같던 병사들은 거룩한 사명의 도구로 변했습니다. 잔 다르크는 무식한 병사들에게 고해성사를 보게 하고, 욕설을 금지시키며 그들의 야수성을 거룩한 용기로 승화시켰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사명을 가진 소녀가 힘만 센 군대를 도구로 사용하자, 불가능해 보였던 오를레앙 전투에서 승리했고, 결국 프랑스를 잉글랜드의 손아귀에서 구해냈습니다. 역사가들은 만약 그때 프랑스가 잉글랜드에 넘어갔다면, 훗날 잉글랜드가 성공회로 돌아설 때 프랑스 또한 가톨릭 신앙을 잃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소녀의 사명이 프랑스의 영혼과 신앙을 지켜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힘은 압도적이고 두렵습니다. 우리가 지능으로 그들과 싸워 이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잔 다르크가 군대를 경쟁자가 아닌 구원의 도구로 썼듯이, 우리 또한 하느님이 주신 ‘사람 낚는 어부’라는 사명의 깃발을 들고 AI를 지휘하면 됩니다.

사명이 없는 힘은 폭력이지만, 사명이 이끄는 힘은 구원이 됩니다. 잔 다르크가 깃발 하나로 군대를 움직였듯, 우리는 복음이라는 깃발로 AI 시대를 지휘해야 합니다. 의사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일론 머스크는 5년 안에 의사라는 직업도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의사로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인공지능을 이용해 온 인류의 질병을 없애는 사람이 되려고 하십시오. 사명을 가지고. 그러면 인공지능을 이용해 암을 정복하고, 걷지 못하는 이를 걷게 만드는 로봇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Poiēsō)”고 하신 것은, 우리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임을 믿고 걸음마를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AI와 경쟁하는 수준의 자존감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두려워서 AI와 싸우거나 아니면 잉여 인간처럼 동물의 욕구만 충족시키다 죽을 것입니다.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곧 하느님의 자녀를 낳는 존재로 만들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훈련하십시오. 이것만이 다가올 AGI 시대에 인류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영원한 희망입니다.

하느님을 낳는 하느님이 되십시오. 사람을,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복음 말씀은 로마 시대의 자기 정체성 혼란의 시대에 쓰였습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그 해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창조되었음을 받아들이십시오. 이런 사람만이 AI 때문에 죽지 않고, AI를 이용하며 살아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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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23개의 금메달을 딴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의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입니다. 그는 다른 선수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5년 동안 내리 훈련하면서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습니다. 1년 365일 매일요. 저는 매년 52일이 더 있는 셈입니다. 모두가 수영을 멈춘 일요일, 그들이 수영하지 않는 날에 저는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위대한 사람들은 하기 싫을 때도 꼭 무언가를 한다’입니다. 그것이 그냥 잘하는 것과 최고를 구분하는 차이입니다.”  

큰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남들만큼 하면 남처럼 살 뿐입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더 노력하면 남과 다른 나를 만나게 됩니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편하고 쉬운 길만 가려고 하면서 과연 자기를 찾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분명 가려진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가십니다. 당시 예루살렘이 종교와 권력의 중심지였다면, 갈릴래아는 변방 중의 변방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서 출발하셨습니다. 복음은 이곳이 제1독서에 나온 ‘즈불룬과 납탈리’ 땅임을 명시합니다. 예수님의 일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절망과 소외 속에 있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빛’이 비칩니다. 구원은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아니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단순히 도덕적인 반성이나 후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고방식의 전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방향키를 돌리라는 근본적인 초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이나 회당이 아니라, 삶의 치열한 현장(바닷가)에서, 일하고 있는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신앙은 일상을 떠난 곳이 아니라 우리의 땀 흘리는 현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시몬과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을 보시고 먼저 부르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도권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라고 전해 줍니다. 그물과 혈연관계인 아버지를 버려두었다는 것은 이 세상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가치를 예수님께 발견했기에 옛 가치를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제자들처럼 곧바로 주님의 부르심에 따를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모습을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친절하라. 네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 힘들게 싸우고 있으니까(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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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말씀의 성취는 언제나 인간의 계산을 넘어섭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상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 자신이며, 살아 계신 사랑의 현존입니다. 말씀의 가치는 사람을 살리는 데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을 일으키는 힘입니다. 말씀은 인격이 되셨고, 삶으로 이어질 때 완성됩니다.

문자는 멈출 수 있지만, 말씀은 멈추지 않습니다. 말씀은 행위를 통제하기보다 사람을 형성합니다. 성전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말하고, 일하고, 관계 맺는 모든 자리에서 말씀은 우리를 이끕니다. 말씀은 이해 속에서보다 실행 안에서 참된 의미를 얻습니다. 신앙을 삶에서 분리하지 않고, 삶 전체를 거룩하게 변모시킵니다.

말씀은 우리의 정체성을 빚고, 역사를 관통하며, 흩어져도 사라지지 않는 하느님 백성의 뿌리가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계시이며, 삶 전체를 하느님께 맡기도록 부르시는 절대적 부르심입니다. 해외 원조는 먼 곳에 손을 내미는 일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 안에서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 삶을 내어놓는 신앙의 힘찬 응답입니다. 말씀은 인격의 참된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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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1서 1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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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은 하루를 새롭게 하고 지친 마음에 조용한 위로를 건네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깨달음과 용기를 선물합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을 통해 지금 이 순간, 삶에 꼭 필요한 말씀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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