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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7월 30일 (금)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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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

 

 

21년 7월 30일 (금)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을 일러 주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7월 30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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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한마음으로 모인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시네.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레위 23장 1절, 4-11절, 15-16절, 27절, 34ㄴ-37절

 

너희는 주님의 축일들에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정해진 때에 소집해야 하는 거룩한 모임, 곧 주님의 축일들은 이러하다.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 어스름에 주님의 파스카를 지켜야 한다. 


이달 보름에는 주님의 무교절을 지내는데,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0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너희 수확의 맏물인 곡식 단을 사제에게 가져와야 한다. 

11 
사제는 그 곡식 단이 너희를 위하여 호의로 받아들여지도록 주님 앞에 흔들어 바친다. 사제는 그것을 안식일 다음 날 흔들어 바친다. 

15 
너희는 안식일 다음 날부터, 곧 곡식 단을 흔들어 바친 날부터 일곱 주간을 꽉 차게 헤아린다. 

16 
이렇게 일곱째 안식일 다음 날까지 오십 일을 헤아려, 새로운 곡식 제물을 주님에게 바친다.’ 

27 
또한 일곱째 달 초열흘날은 속죄일이다. 너희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고행하며,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쳐야 한다. 

34 
‘이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은 주님을 위한 초막절이다. 

35 
그 첫날에는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6 
너희는 이레 동안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는 다시 거룩한 모임을 열고, 주님에게 화제물을 바친다. 이날은 집회일이므로, 너희는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 

37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 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 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 하느님께!.

 

드높이 노래하여라, 손북을 쳐라. 고운 가락 비파와 수금을 타라. 나팔을 불어라, 초하루에, 보름에, 우리의 축제 날에.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 하느님께!

이것은 야곱의 하느님이 내리신 명령이요, 이스라엘에 세우신 규정이라네.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그분이 요셉에게 주신 법이라네.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 하느님께!

너에게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낯선 신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 너의 하느님이다. 너를 이집트 땅에서 끌어 올렸다. 환호하여라, 우리의 힘 하느님께!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바로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해진 복음이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3장 54-58절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성체를 받아 모시며 언제나 성자의 수난을 기념하오니 성자께서 극진한 사랑으로 베풀어 주신 이 선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30일 (금)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30일 (금)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7월 30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해야만 하는 일.

 

우리는 모두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국어사전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지만,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사람(미리 예: 豫)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맡길 예: 預) 그 뜻에 따라 살아가면서 그것이 행복임을 주위에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로서 살아가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만나려고 기도하고 성사 생활을 하며, 이를 추억하고 점차 깊은 관계를 맺어 갑니다. 성경과 교리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방법과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예언자로서 하느님과 만나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예언 직무를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현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하고 설명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문제들을 바르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함과 불공정, 인권 침해와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오만함을 용기 있게 지적해야 합니다. 이 일은 예언자로서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사제로서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첫 번째 역할만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 생활만 열심히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는 예언자로서 세상의 정의와 공정, 평화와 평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때로는 시대에 대한 비판과 쓴소리를 해야 하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외면하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시대의 징표를 바라보고, 그 징표를 하느님의 뜻과 가치로 해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바라보는,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을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나자렛 사람들이며 유다인들입니다. 때로는 고향 사람들이나 친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예.”가 아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예언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믿음 대신 챙기는 자존심, 그 가치는 얼마일까?.

 

오늘 복음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복음 내용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는 것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이 말씀대로라면 기적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일단 믿고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 기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자렛 사람들은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닫고 믿어보려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적이나 해 보라는 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한 번 믿어보려는 열린 마음, 이것이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믿음’ 대신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존심’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었는데 소문대로 예수님께서 사기꾼으로 드러나게 되면 사기꾼을 메시아로 여긴 자신들의 자존심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자존심이 얼마나 가치가 큰 것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모험까지 감행하며 지키는 것일까요?

어떤 무신론자인 기자가 봉쇄 수도원에 와서 원장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봉쇄 수도원에서 밖에도 못 나가고 고생만 하는 것 같은 수도자들을 안쓰럽게 여기며 원장에서 말했습니다. 

“만약 죽었는데 하느님이 없다면 여러분들이 하는 고생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도원 원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서 여기 있는 것입니다. 믿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억지로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밖에서 사는 것보다 더 좋아서 여기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하느님이 없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 하느님이 계신다면 진짜 놀랄 사람은 당신일 것입니다.”

무신론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고귀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자존심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영화 ‘친구’에서 보면 자신이 친구를 죽이지 않았음에도 건달이 건달다워야 한다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무기징역을 선택합니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무기징역을 선택합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아무리 계산해도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이익임을 밝혀냈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고 사는데도 별 지장이 없지만, 만약 믿는 분이 계실 때는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이고 믿은 사람은 천국이 됩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차도를 건너려고 하는데 하도 차가 쌩쌩 다녀서 무단횡단을 하다가는 사고 날 확률이 50%나 됩니다. 그러나 무단횡단을 하면 10초면 끝나지만, 육교로 건너면 10분은 걸립니다. 여러분은 무단횡단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육교를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실 확률은 50%입니다. 그러나 지옥 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존심을 세우며 믿지 않으려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일까요? 도대체 우리가 목숨까지 내걸며 지키려는 자존심의 값은 얼마일까요?

항우라는 사나이는 초나라의 명장이었습니다. 그는 7년 동안 7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군을 몰고 오는 한나라의 유방에겐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수십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강에 도착합니다. 배를 준비하고 있던 부하가 말합니다. 

“어서 강을 건너십시오. 강동 땅이 비록 좁다지만, 땅이 사방 천 리나 되며 백성은 수십만입니다. 그곳도 왕 노릇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항우는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 

“나는 강동의 8천여 장정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왔는데, 지금은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설령 강동의 백성들이 나를 왕으로 추대할지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항우의 이런 콧대 높은 자존심은 일생에 단 한 번의 패배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습니다. 70전 1패의 1패가 그를 죽음으로 몰았고, 유방은 맨날 패하다 이 1승으로 한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항우의 오른팔이 ‘한신’이란 장수였습니다. 한신은 가난한 천민 출신이라 지방 불량배 가랑이로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물론 실력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지금 살인을 저지르면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본 구경꾼들의 조롱은 대단했습니다. 한때 귀족 출신인 항우에게 갔지만, 천민 출신인 자신을 무시하는 바람에 유방에게 갔던 것이고 결국 자신이 모셨던 전쟁의 신과 같은 사람이 자결하게 만드는 장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항우의 나이는 31세였습니다. 

자존심 내려놓고 일단 한 번 믿어서 속으면 어떻습니까? 왜 자존심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길까요? 그러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까지 걸고 지키려는 자존심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가치는 누가 그것을 알아주고 사줘야 정해지는 것입니다. 금도 너무 흔해서 사주지 않는다면 그냥 돌에 불과합니다. 나의 자존심은 다른 사람에게 얼마에 팔 수 있을까요? 아무도 안 사줍니다. 자존심을 지켰다고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자존심은 각자의 뱀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 자아를 귀하게 여겨 사주겠습니까? 혼자만 귀하다 여기는 것입니다. 빵 하나를 가진 거지에게 100만 원 수표를 주려고 하는데 그 빵을 놓지 못해서 그 수표를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아가 자존심이 귀한 것으로 믿게 하여 이런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와 찜질방에서 누가 늦게 나가는지 시합을 해 보았습니다. 힘든데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더 오래 있으려 하는 것은, 주님께 무릎을 꿇느니 지옥을 선택하려는 자세와 같습니다. 자존심을 쓰레기로 여기십시오. 이것이 결국 믿지도 못하게 만들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자존심이 쓰레기가 될수록 자존감은 더 높아집니다. 그래도 되는 존재가 되게 해주시는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천명.

 

신부 생활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어느새 후배의 숫자가 많이 늘었고 그러다 보니 이름을 잘 모르는 후배 신부님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부의 주름과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오십이 넘는 중년의 나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논어 위정편에 보면, 나이 오십을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으로 비유하지요. 그런데 저의 모습을 보면, 겸손보다는 교만의 모습이 더 많지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대접받고 인정받으려는 모습은 분명히 ‘지천명’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지금도 변함없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동창들과 함께 식사하던 중에, 한 친구가 주변을 즐겁게 해주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 그렇게 경박하게 굴다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쩌려고 그래? 이제 체통 좀 지켜라.” 
 
이 말에 별일 아니란 듯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지. 나와는 상관없어. 게다가 남들의 웃음거리를 면한다고 해서 내가 고상해지는 것도 아니잖아.”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친구의 모습입니다. 남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삶이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말을 했나요? 사람들은 당시에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보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의 추억이 간직된 곳이 고향이니까요. 따라서 예수님도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을 것이고,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더 좋은 말씀과 놀라운 행적으로 고향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낫다면서 드러내려는 욕심과 이기심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대접받고 인정받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모습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떤 일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자신이 그 일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는 습관이다.

- 대니얼 카너먼

 

 

죽음에 대한 준비.

 

“당신의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 질문은 실제 미국의 한 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부동산, 주식 투자 등으로 돈을 더 벌겠다는 물질적인 희망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신 이런 응답이 대다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겠습니다."

"그동안 못 해본 일들을 도전해보고 싶어요."

"안타까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물질적 희망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닌, 하늘 나라에서의 희망을 채워줄 것에 중심을 맞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준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복음은 존중의 실천.

 

목수의 아들이 부활할 것이다. 인신공격을 멈추고 삶의 존엄함을 되찾을 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문을 여시듯 편견의 문을 여신다. 너무나 쉽게 우리는 우리 이웃의 삶을 평가하며 살아왔다. 평가하는 이웃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자신의 실체를 다시금 보게된다. 

편견의 중심에는 우리의 이기적인 무지(無知)가 있다. 편견을 부수면 세상과 사람이 달리 보인다. 복음은 다름아닌 편견을 부수는 인격의 참된 기쁨이다. 인관관계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존중이 필요한 나와 너의 관계이다. 

우리 모두는 같은 사람들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인 선입견에 많은 상처를 받는 우리들이다.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있는 곳이다. 그러기에 존중과 배려 대화와 인정이 필요한 곳이다. 

공동체는 편견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께서 이끌어가시는 선물이다. 낮아지신 하느님의 삶이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존중과 감사로 바꾸어놓는다. 저마다의 삶은 하느님 안에서 존중받아야 한다.

복음은 존중의 실천이다. 목수의 아들이 복음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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