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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7월 27일 (화)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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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

 

 

21년 7월 27일 (화)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며 말씀하시곤 하셨다. 모세는 주님과 함께 사십 일을 지내면서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습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며,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7월 27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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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한마음으로 모인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시네.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탈출 33장 7-11절, 34장 5ㄴ-절, 28절

 

주님께서는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그 무렵 


모세는 천막을 챙겨 진영 밖으로 나가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것을 치곤 하였다. 모세는 그것을 만남의 천막이라 불렀다. 주님을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영 밖에 있는 만남의 천막으로 갔다. 


모세가 천막으로 갈 때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 서서,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뒤를 지켜보았다. 


모세가 천막으로 들어가면, 구름 기둥이 내려와 천막 어귀에 머무르고,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 

10 
구름 기둥이 천막 어귀에 머무르는 것을 보면, 온 백성은 일어나 저마다 자기 천막 어귀에서 경배하였다. 

11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시곤 하였다. 모세가 진영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의 젊은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천막 안을 떠나지 않았다. 

34,5 
주님께서 모세와 함께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 6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그러나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고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 대 사 대까지 벌한다.”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아뢰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28 
모세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밤낮으로 사십 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 그는 계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주님은 정의를 펼치시고, 억눌린 이 모두에게 공정을 베푸시네. 당신의 길을 모세에게, 당신의 업적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아버지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 가여워하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3장 36-43절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성체를 받아 모시며 언제나 성자의 수난을 기념하오니 성자께서 극진한 사랑으로 베풀어 주신 이 선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27일 (화)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27일 (화)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7월 27일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살고픔.

 

코로나 시대에 생긴 ‘살고픔’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먹지 못하면 배고픔을 느끼듯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느끼는 ‘살고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나 인사 나누고, 서로 안아 주고 눈을 맞추며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해 주는 것을 그리워하는 살고픔의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당 소임을 맡지 않고 있는 사제에게도 신자들에 대한 살고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과 고민을 공유하고 많은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같은 것을 보고 살아간다는 기쁨과 위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로 신자들에 대한 살고픔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신자들에게 사제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친해지고 싶지만 언제나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존재지요. 그것은 존경의 의미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존재가 초라하게 느껴져 다가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한 늘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접근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 내 봉사 등 어떠한 계기로 만남이 잦아지고,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제에 대한 거리감은 점차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도 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고, 그분의 말씀에 힘과 권위가 있어 일반 사람들은 그분께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뵐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밭의 가라지에 대한 비유 말씀을 설명해 달라고 거리낌 없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 일이 제자들에게는 일상과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그분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그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이 묻게 되고 더 자연스러워지고 더 친근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려고 구약에서 성막을 만든 것처럼, 거룩하신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 높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알게 되고 친근해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살고픔을 가지십시오. 늘 그분 가까이에서 그분과 함께 지내십시오.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알아가고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예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가라지에서 밀이 되는 이유.

 

오늘은 예수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밀과 가라지는 잘 구별이 되지 않아서 다 자라고 나서 마지막 때에야 심판이 내려집니다. 

지금은 두 자매가 똑같이 맷돌질한다고 하더라도, 두 형제가 똑같이 밭을 간다고 하더라도 둘 중의 하나는 밀이고 둘 중의 하나는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성당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어도 한 사람은 밀이고 한 사람은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겉모양으로는 구분이 안 되는 게 밀과 가라지입니다. 

내가 밀인지, 내가 가라지인지 개인적으로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시간에 따른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작년에 밀이었으면 올해도 밀이고, 작년에 가라지였으면 올해도 가라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작은 밀이었다면 올해는 더 밀이 될 것이고, 작년에 덜 가라지 같았다면 올해는 더 가라지 같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더 그리스도답게, 그렇지 않은 가라지는 예수님의 모습과 더 상반되게 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를 말씀하시는데,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곧 가라지는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입니다. 물론 밀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를 비교해 볼 때, 올해 덜 죄를 짓는 사람은 밀이고 더 죄를 짓는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렇다면 가라지에서 밀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성령의 씨앗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믿음을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만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아무리 많은 죄를 짓고 있어도 가라지에서 밀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변해가는데 자신이 가라지처럼 변하는지, 밀처럼 변하는지 그 기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기준은 하느님을 똑같이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15년 미국 마이애미의 한 재판장. 

판사 ‘민디 글레이저’는 범죄자 ‘아서 부스’를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0세였던 그는 절도 및 도주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인을 보고 판사는 느닷없이 웃음을 지었습니다. 피고인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한 판사는 재판과 상관없는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혹시 노틸러스 중학교에 다니셨나요?”

그러자 피고인은 “오, 세상에!”를 연발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합니다. 피고인도 판사가 중학교 때 친구였던 것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노틸러스 중학교는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명문 학교입니다. 둘은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던 것입니다. 절친했던 둘은 모두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언어 과목에 강점을 보였던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기를 꿈꿨고 수학과 과학을 잘했던 아서 부스는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17살이 되어 아서 부스는 도박과 마약에 빠졌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였고 급기야 남의 돈에 손을 대며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아서 부스가 징역형을 선고받은 해에 민디 글레이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입학하였습니다.

10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32세에 취직준비를 시작한 아서 부스는 범죄자를 받아 주는 직장은 찾을 수 없었고 다시 마약에 중독되어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었고 아서는 얼마 안 가 또다시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같은 중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출발한 둘은 판사와 피고인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민디 글레이저는 말합니다. 

“항상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습니다. 중학교 때 정말 좋은 아이였습니다. 친구들이랑 같이 축구도 자주 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거기서 뵙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아서 부스씨, 앞으로 당신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슬픈 건 우리가 벌써 이만큼 늙었다는 거죠. 진심으로 행운을 빌게요.”

이후 아서는 보석금 4,800만 원의 판결을 받고 10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민디 글레이저 판사는 직접 마중을 나와 친구의 새 출발을 응원해줬습니다. 

아서 부스는 말합니다. 

“판사가 된 친구와의 만남은 제게 큰 충격을 가져다줬어요. 앞으로는 성실히 약물치료도 받고 똑바로 살아가겠습니다. 이제는 자포자기가 아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 볼게요.”

재판을 받을 때 아서 부스는 거의 오열하다시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였을까요? ‘비교할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음을 자신의 비교 대상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교해야 할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나의 삶을 비교하려면 나도 그리스도와 같은 형제임을 믿어야 합니다. 민디 글레이저 판사와 아서 부스가 같은 학교에서 같은 우등생이 아니었다면 아서 부스가 그렇게 살아온 세월을 보며 오열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함께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면 그분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내가 같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출발점이 다르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밀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가라지가 밀이 될까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비교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더는 그분의 모범과 멀어질 수가 없기에 가라지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누가 약속을 지킨 것일까요?

 

저녁 6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저녁 5시 50분에 온 사람과 저녁 6시 10분에 온 사람 중에 누가 약속을 지킨 것일까요? 둘 다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일찍 온 사람이 약속을 지킨 것이고, 늦게 온 사람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모님께 매주 한 번씩은 꼭 연락드리겠다고 약속하고서는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연락하는 사람과 바쁘다는 이유로 한 달에 한두 번만 연락하는 사람 중에 누가 약속을 지킨 것일까요? 당연히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연락한 사람입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약속 이상의 것을 지켰을 때였습니다. 6시 약속인데 일찍 나온 사람에게는 약속을 잘 지킨다는 평뿐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부모에게 자주 연락한 사람은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 이상으로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라는 말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많은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약속한 만큼만 하면 충분할까요? 약속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고, 그 이상을 행할 수 있어야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 봉사, 희생, 자선 등의 행동 자체에만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상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리지 비유 말씀을 설명하십니다. 수확 때에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워 버린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 종말에 심판을 받게 되는데, 남을 죄짓게 하는 자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 모두가 불구덩이에 던져진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들처럼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한 남들의 나쁜 점들만 배우고 좋은 점들을 외면하는 삶으로도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자신의 모습이 지금으로도 충분하다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 역시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지금의 모습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지금보다 조금만 더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 가라지 비유를 통해 우리 인생을 소중하고 귀하게 다루어, 우리의 인생을 알차게 알곡으로 여물게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려 주시나 영원히 기다려 주시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사랑에 빠져 가끔씩 균형을 잃는 게 균형 잡힌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인걸…

- 엘리자베스 길버트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세상.

 

15살짜리 아이가 임신했습니다. 이제 겨우 중학생의 나이입니다. 학교에서 난리가 났을 테고, 혹시 뉴스에도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아이의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 집안이 뒤집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조선 시대 이야기라면 어떨까요? 
 
춘향전에 나오는 춘향이 나이가 15살 즈음이라고 합니다. 과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만한 사건이었을까요? 현대에도 예멘 여성의 절반 이상이 18세 이전에 결혼한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성모님도 예수님 잉태하셨을 때의 나이가 15세 즈음이었습니다. 
 
지금의 큰 문제라는 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조금만 관점을 넓히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문제’라고 규정을 내리고, 문제의 이유만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세상을 꿈꿔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수확법.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실 것이다." (마태 13, 40)

언제나 마지막에서야 깨닫게되는 구원의 수확법이다. 우리 삶의 최종 종착지는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시듯 우리의 죄악또한 모두 한 줌 재가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밀과 가라지의 배분된 삶이다. 

주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통해 우리에게 삶을 가르쳐주신다. 삶이란 생명의 길을 힘겹지만 걸어가는 것이다. 태우고 떠나보내는 아픔이 동반된다. 놓아버려야 할 우리의 뜻이다. 놓아버려야 우리의 본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가라지를 정리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가라지를 태워 빛이 되게하시는 놀라우신 하느님이시다. 태워야 할 것과 봉헌해야 할 것을 마지막에 가르쳐주신다. 최고의 사랑은 우리의 가라지가 아닌 우리의 밀만을 받아들이시는 하느님의 수확법이시다.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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