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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
21년 7월 22일 (목)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나오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입니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습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하였던(요한 20,15 참조) 그의 모습에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아가에서는 밤새도록 성읍과 광장을 돌아다니다가 사랑하는 이를 찾은 신부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 오늘 복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하시며, 가서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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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주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말씀하셨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제1독서
아가 3장 1-4ㄴ절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1
신부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2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3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화답송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새벽부터 당신을 찾나이다.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은 당신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보나이다. 당신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높이 올리오리다. 제 영혼이 기름진 음식으로 배불러, 제 입술이 환호하며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정녕 당신은 저를 도우셨으니, 당신 날개 그늘에서 환호하나이다. 제 영혼 당신께 매달리오면,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드나이다.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말하여라, 마리아, 길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무덤, 부활하신 그분 영광 나는 보았네.
알렐루야!
복음
요한 20장 1-2절, 11-18절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영성체송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치네. 살아 있는 우리가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셨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신비로운 천상 양식을 저희가 거룩히 받아 모셨으니 일찍이 복된 마리아 막달레나가 스승이신 주 그리스도께 드린 한결같은 사랑으로 저희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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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그분의 음성에 의심없이 응답하려면, 예수님과 나누었던 추억을 간직해야 해.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리운 노랫소리에 까맣게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이 노래를 함께 들으며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니, 그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갑니다. 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아쉬움과 후회에서 한동안 벗어나질 못합니다. 지나치듯 들려온 노래 한 곡에 사랑을 주고받았던 추억이 밀려듭니다. 우리의 기억은 그렇습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사소한 어떤 계기에 수많은 기억이 소환되고는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분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분 곁에 가까이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고, 낯선 이들이 서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예수님께 받은 사랑의 기억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른 상황 속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비록 처음에는 알아뵙지 못했지만, 그 사랑의 추억 때문에 자신을 부르시는 목소리에 곧바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를 불러 주시고 우리와 함께 길을 걸어가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뜻을 삶 속에서 발견하며 의심 없이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려면, 예수님과 나누었던 추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 추억들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놓아야 합니다. 지나온 삶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한 기억을 잘 간직해 놓아야만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단번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의 추억을, 그분에 대한 기억을 잘 간직하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는 너무 정상적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가?
성녀 막달라의 마리아 축일에 우리 전례는 독서로 아가서를 들려줍니다. 한 여인이 사랑하는 이를 찾아 밤새도록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를 봤냐고, 봤으면 알려달라고 합니다.
전례가 이 독서를 들려주는 이유는 틀림 없이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이렇게 주님을 찾은 분이었다고 얘기하려는 거지요.
그런데 만약 여인의 모습이 산발이였다면 영락없이 미친 여자의 그것입니다.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모습이 산발인지 아닌지도 신경쓰지 않고 여기저기 마구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미쳤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똑같지만 미친 여자와 아가의 여인 곧 마리아 막달레나의 차이는 한 가지, 곧 왔다 갔다 하는 이유의 차이입니다.
아가의 여인과 마리아 막달레나는 분명하게 찾아다니는 것이요, 그것도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니는 것인 데 비해 미친 여자는 찾아야 할 대상이 없기에 목적성 없이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 정신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눈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충격에 정신이 나갔다고, 그래서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복음에서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듣고 무덤에 왔다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만을 확인하고 돌아갔는데 그것은 아마 두 사도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도들도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을 잃고 난 뒤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알고 있었을 것이며, 게다가 막달라 마리아는 오랫동안 마귀에 사로잡혀서 제 정신이 아니었던 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다시 미쳤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 정신의 기준이 이미 죽은 사람 때문에 현세의 삶을 망치지 않는 거라면 마리아가 죽은 주님 때문에 현세의 삶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죽은 주님 찾아다니는 것은 분명 제 정신이 아닌 미친 사람의 짓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미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프란치스코도 회개한 후 미친 사람 소리를 들었고, 주님도 그러셨습니다.
이에 대해 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3,21)
친척들은 주님께서 미쳐 돌아다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은 베엘제불이 들려서 그렇다고 생각했지요. 제 정신이라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 하느님께 미친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니고, 정상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어제 저희는 공동휴식을 하며 영이 맑은 사람에 대한 대화를 나눴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이 맑은 사람이기는 한데 현실 생활은 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도 어려움을 겪고 그 사람 주변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런데 성인들 특히 오늘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너무 정상적으로 살려고 하다가 두 사도들처럼 주님 찾기를 더 이상 하지 않고 그래서 부활하여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주님 만나기를 실패하는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아무튼,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끝짜기 찾음으로써 주님 찾기를 포기한 사도들에게 가서 자기가 찾고 만난 주님을 증거하였고 그럼으로써 사도들을 위한 사도가 되었기에 우리는 여자들 중에 유일하게 사도들의 축일을 지내며 막달라 마리아를 찬양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을 사랑하면 ‘라뿌니!’라고 부른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가장 큰 죄인 중 하나였다가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완전한 사랑에 반하여 부활한 당신 자신을 당신 제자들보다 마리아에게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본래 복음은 사랑이 높은 사람에게서 낮은 사람에게로 흘러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는 마리아가 사도들을 앞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가장 완전히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시신이 사라졌는데도 끝까지 그 시신을 찾으려 하고 그분을 만났을 때 ‘라뿌니!’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라뿌니는 스승님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찾고 있었다는 것이 왜 막달레나가 위대한 제자일까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갑자기 보았다면 무엇이라 불렀을까요?
“예수님?”, “주님?”, “오마이 갓?”
뭐 이런 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찾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계속 자신이 변화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시신을 통해서도 발전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배워서 죄에서 벗어나 더 그리스도다워지기 위해 주님을 찾는 마음, 이것이 마리아의 영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갑자기 만났을 때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킹콩을 들다’(2009)는 전북 순창고 여자 역도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전북 순창고’ 여자 역도부 선수들은 정인영 감독 아래서 실제로 전국체전에 출전해, 5명의 선수가 15개 부문 중 14개의 금메달을 휩쓰는 대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전국체전이 있은 1년 후 정인영 선생님은 49세의 나이로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근무중 사망하게 됩니다.
조금 각색된 영화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시골 여중에 88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이지봉 선생이 부임합니다. 그는 부상으로 인해 역도를 그만두고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일하던 중 은사의 도움으로 시골 여중부 역도 코치로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역도로 남는 것은 우락부락한 근육과 부상뿐이라며 역도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도부에 지원자가 하나둘 생깁니다. 시골에서 낫질로 다녀진 튼튼한 어깨와 통짜 허리를 가진 영자, 훌륭한 체격을 가진 현정과 보영, 아픈 엄마를 위해 역도선수로 성공하고 싶은 여순, 역도복의 섹시함에 빠진 사차원 소녀 민희. 지봉은 그들의 진심을 보고 역도를 가르쳐보기로 합니다. 그러는 중 과로로 그의 심장질환은 점점 심각해지기만 합니다. 목숨을 걸고 그들을 가르친 덕에 그들은 체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며 지봉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게 된 것은 지봉의 후배이자 지봉에게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던 코치였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폭력으로 가르치고 지봉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폭력을 가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지봉은 그들에게 힘을 주려고 편지를 써서 그들에게 가던 중 길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합니다. 이때 아이들은 시합 중이었고 지봉의 부고 소식을 듣고는 시합에 집중하지 못하고 슬퍼합니다.
하지만 코치는 선배 지봉의 부고 소식에도 아무런 내색도 없이 오히려 시합에 집중하지 않는 아이들을 폭력으로 몰아세웁니다. 더는 지봉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역도부 학생들은 자신의 여고 마크를 떼어버린 후, 매직으로 유니폼에 ‘이지봉’ 세 글자를 쓰고 시합에 출전합니다. 그들은 스승의 바람답게 좋은 결과를 내고 장례식장으로 돌아와 자신 선생님의 관을 역기처럼 들며 선생님을 추모합니다.
선생님은 죽어도 그 가르침은 계속됩니다. 선생님 때문에 삶이 변한 사람은, 그래서 행복한 사람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 시체라도 찾으려 합니다. 선생님의 유일한 바람은 제자들이 잘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를 진정한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스승님’이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갑자기 만났을 때 어떤 이름으로 부를까요?
현재 코로나 상황으로 지역에 따라서는 또 미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체를 영하지 못하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분의 시신이 있습니다. 성경도 있고 영성 서적도 있고 유튜브 강의도 있습니다. 찾으려고만 하면 그분에게서 배울 아주 많은 그분의 자취가 있습니다.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무덤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배워야 할 것이 태산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스승’으로 여긴다면 말입니다.
이런 것도 찾지 않으면서 성체만 영하지 못하는 것에 슬퍼한다면 예수님께서 그리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배우려고 하는 마음만 있다면 미사에 참례하지 못해도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스승으로 여겨주는 이를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통해 변하는, 즉 죄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을 가장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완전히 같아지기 전에는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스승이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라뿌니!’라고 부를 때, 그분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라뿌니!
일 자체를 즐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처럼 쉬울까요? 며칠 전,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어느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이 형제님은 제게 “신부님은 하고 싶은 것을 하니 얼마나 좋으십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마지못해 회사에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입사 시험을 보고서 회사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회사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분명히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소원이었고, 이를 이룬 것인데도 마지못해 다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분명 이 형제님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면서 하고 싶었던 일이라는 것 자체를 잊어버린 것이지요.
사실 일은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로 하는 취미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가수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음악이 좋아서 가수가 되었는데, 가수가 된 후 음악을 즐기기가 쉽지 않다고 말이지요. 취미로 하는 음악에서 일로 하는 음악이 되다 보니 책임이 동반되고 이로 인해 부담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의 마음이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만들기도 있고, 간절히 원하는 것이 가장 벗어나고 싶은 것이 되게도 합니다. 어떤 마음을 간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을 지냅니다. 축일에 맞춰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통해 회개한 뒤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던 그녀였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컸기에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바처럼,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인데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원지기로 생각합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라는 고정된 마음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가장 기뻐해야 할 순간에, 예수님 시신이 없어졌다고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으로, 미움의 마음보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곁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내 이름을 부르는 예수님을 향해 “라뿌니!”하며 기쁨의 응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가진다.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많은 대가를 얻는다.
- 알렉산드리아 피네
부탁의 힘.
2008년의 한 방송에서 ‘부탁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자매님이 사람 많은 공원에서 짐을 놔두고 아이와 화장실을 갔습니다. 그때 한 도둑이 짐을 유유히 가져갈 때 주변 사람들은 관심을 전혀 두지 않습니다. 훔쳐 가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하는, 완전히 방관자 상태였습니다.
이번에는 주변 사람에게 “아이가 급하다고 해서 잠시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혹시 제 짐을 잠시 봐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부탁했고, 사람들은 이 부탁을 받아들였습니다. 잠시 뒤, 도둑이 와서 짐을 가져가자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둑을 제압했습니다.
부탁 한 마디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부탁도 하지 않으면서, 도둑이 짐을 가져가는데도 사람들이 방관만 하고 있다고 탓만 합니다.
주님께도 제대로 부탁하고 있을까요? 그냥 알아서 해 달라는 식은 아닐까요? 물론 주님께서는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우리와 함께하시기란 쉽지 않습니다.
청원 기도가 무조건 나쁠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계속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막았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다. 빈 무덤에서 가장 뜨거운 울음을 눈물을 만나게된다. 부활의 첫번째 소식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뜨거운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울음과 절망과 슬픔을 어루만져주시는 주님 부활의 기쁨이다.
부활은 진심어린 사랑이다. 가난한 마음안에 뜨거운 사랑이 되살아난다. 사랑하기에 아프고 사랑하기에 기쁘다. 사랑이 깊으면 부활의 기쁨도 더욱 크다. 되살아나신 예수님과 마음을 나눈다. 마음을 나누는 사랑의 대화는 부활의 뜨거운 현존이다.
뜨거운 사랑의 눈물에 비친 부활의 참된 사랑이다. 사랑을 위한 사랑의 부활이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진심어린 사랑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다.
사랑은 무덤을 열고 수의를 풀듯 다시금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느님 사랑은 죽지 않는다. 되살아 날 뿐이다. 되살아나신 사랑의 주님을 마리아 막달레나는 분명히 만났다. 사랑의 길을 되찾은 것이다. 사랑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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