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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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마카 6,18-31)
나는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남기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2마카 6,18-31
오늘 제1독서
나는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남기려고 합니다.
그 무렵
18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들 가운데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19 그러나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가며
20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목숨이 아까워도 법에 어긋나는 음식은 맛보는 일조차 거부하는 용기를 지닌 모든 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21 법에 어긋나는 이교 제사의 책임자들이 전부터 엘아자르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따로 데리고 가, 그가 먹어도 괜찮은 고기를 직접 준비하여 가지고 와서 임금의 명령대로 이교 제사 음식을 먹는 체하라고 권하였다.
22 그렇게 하여 엘아자르가 죽음을 면하고, 그들과 맺어 온 오랜 우정을 생각하여 관대한 처분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23 그러나 그는 자기의 생애, 많은 나이에서 오는 위엄, 영예롭게 얻은 백발, 어릴 때부터 보여 온 훌륭한 처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법에 합당하게 고결한 결정을 내린 다음, 자기를 바로 저승으로 보내 달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24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25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27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28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바로 형틀로 갔다.
29 조금 전까지도 그에게 호의를 베풀던 자들은 그가 한 말을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고 악의를 품었다.
30 그는 매를 맞아 죽어 가면서도 신음 중에 큰 소리로 말하였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31 이렇게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루카 19,1-10
오늘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18일
현정민 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9:1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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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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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삶이 달라지는 부르심의 순간
오늘 복음의 소제목은 “예수님과 자캐오”입니다. 4복음서 가운데 루카 복음서에만 나오는 고유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던 길에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지나실 때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루카 19,2). ‘마침’이라는 낱말에서 우리는 자캐오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이 운명적이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의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나 봅니다.
루카 복음서는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19.3)라고 합니다. 그 까닭을 같은 절에서는 “키가 작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키 작은 이가 예수님을 뵈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았다면 적어도 한두 사람은 그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을까요? 자캐오가 예수님을 뵐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아마도 그가 “세관장이고 또 부자”(19,2), 곧 죄인으로 불리며 따돌림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자캐오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뵈려고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갑니]다”(19,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 아래에 이르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19,5).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받던 자캐오의 이름을 불러 주셨고, 간신히 나무 위에 올라가 다리가 후들거리는 그에게 ‘나 여기 있으니, 그만 내려오라.’고 하시며,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지요. 이는 자캐오에게 행운 가운데 행운이요 구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던 자캐오가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19,8).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이 그에게 닿아 마침내 꽃을 피웁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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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이제 나무 위에서 얼른 내려와야 해
오늘 <복음>은 자캐오 이야기로,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나서는 거대한 역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앞부분>(1-4절)이 자캐오가 예수님을 찾는 이야기라면, <뒷부분>(5-10절)은 예수님이 자캐오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앞부분>에서, 자캐오는 ‘키 작은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동포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고 매국노의 혐오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말은 그가 외면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그처럼 초라했고 ‘작은 자’였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깊은 자괴감과 열등감으로 황폐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 무화과나무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뒷부분>에서 자캐오는 ‘아브라함의 자손’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무화과나무 위에 걸린 죄인 세리 자캐오와 나무 아래 있는 예수님 사이에서 드러납니다. 마치 그것은 십자가 아래 있던 백인대장의 고백처럼,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치 이곳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이를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이 당신께서 자캐오를 불러내신 약속 장소였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장소요, 자캐오가 구원을 얻는 장소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분은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의 아픈 마음도 이미 다 헤아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약속 장소로 이끄시고, 당신이 그 약속장소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을 찾았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저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그렇습니다. 이제 나무 위에서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하늘에서 이미 인간이 되어 내려오시고, 먼저 나무 위에 달리셨던 그분이 이제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자캐오처럼, ‘일어서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하고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19)고 선언하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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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9,6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주님!
당신은 숨어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사람들 위에 드러냄으로
숨어 있음을 보시고
당신이 계신 아래로
불러 내리십니다.
하오니, 제가 얼른 내려와
엎드리게 하소서.
사람들 아래로
내려가게 하소서.
사람들을 내려다보지 말고
올려다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은 올라갈 무화과나무가 있습니까?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랐습니다. 남들의 시선을 감수하고, 체면을 버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겠다'는 열망 하나로 나무에 올랐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에게도 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야 했던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습니다. 1946년, 36세의 아녜스 수녀(마더 데레사의 본명)는 이미 18년 차의 베테랑 로레토 수녀였습니다. 그녀는 캘커타 성 마리아 수녀원 부속 학교의 교장으로, 부유한 집안 소녀들에게 지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삶은 안락하고, 존경받았으며, '성공한' 수도자의 삶(군중 속의 의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이미 '싫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훗날 고백하기를, "안락한 수녀원 담장"과 "담장 밖 빈민가의 비참함" 사이의 거대한 괴리에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깊이 알고 싶었지만, 수녀원의 안전한 규칙과 일상(자캐오를 막아선 '군중')이 그녀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적인 해답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1946년 9월 10일, 다르질링행 기차에 오른 이유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피정을 갈망하며 기차를 탔던 그 '노력' 자체가, 이미 일상의 안락함(군중)을 벗어나 주님을 만나고자 했던 그녀의 첫 번째 '돌무화과나무'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 '열망의 나무' 위에 올라가 있을 때, 예수님께서 지나가셨습니다. 기차가 캘커타의 빈민가를 덜컹거리며 지나칠 때, 그녀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영감이 아니라,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명확한 '명령'이었습니다.
"나는 목마르다." (I Thirst.)
그 순간, 그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비로소 '진짜로' 본 것입니다. 그분은 깨끗하고 안락한 수녀원(군중) 안에 계신 분이 아니라, 가장 더럽고 버림받은 빈민가에 목마른 채 누워 계셨습니다.
하지만 진짜 '돌무화과나무'는 이제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본' 것과, 그분께 '내려가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그녀 앞에는 자캐오보다 더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군중', 즉 수녀원을 떠나는 것을 금지하는 엄격한 교회법과 전통이었습니다.
둘째는 '작은 키', 즉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한 명의 수녀라는 한계였습니다. 그녀가 올라야 할 두 번째 '돌무화과나무'는, 바로 '교회법과 전통의 벽을 넘어서는 끈질긴 순명'이었습니다. 그녀는 2년 동안, 안락한 수녀원에 머물면서도 매일 교황청과 대주교에게 편지를 쓰며 '떠나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모두가 그녀를 "미쳤거나, 교만해졌다"고 꾸짖었습니다(자캐오를 꾸짖던 군중처럼). 하지만 그녀는 "주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는 열망 하나로, 가장 고통스러운 '기다림'과 '인내'라는 나무 위에 머물렀습니다.
마침내 1948년 8월, 교황 비오 12세의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의 '돌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젠 그녀의 가슴 속에 들어오셨고, 그녀는 자신이 이전에 추구하던 것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녀는 로레토 수녀원의 검은 수도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캘커타의 거리에서 가장 가난한 인도 여인들이 입는 1달러짜리 값싼 '파란 줄무늬 사리'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단돈 '5루피'(당시 환율로 약 100원)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빈민가'(자캐오의 집)로 들어갔습니다. 그날, 구원이 캘커타에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캐오를 만납니다. 그는 세관장, 즉 민족의 반역자요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그의 영혼은 지독히 가난했고 왜소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키가 작았다'(루카 19,3)고 말합니다. 이는 단지 신체적인 조건만이 아니라, 군중(세상)의 비난에 짓눌려 하느님을 볼 수 없었던 그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런 그에게 간절한 열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루카 19,3) 애썼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가지 거대한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군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죄인이라 손가락질하며 길을 막아섰습니다. 둘째는 '작은 키'라는 자신의 한계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싶지만, 세상의 시선과 비난(군중)이 두렵습니다. "저 사람 너무 열심이야", "유난 떤다"는 말이 무섭습니다. 또한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성격이 소심해서", "죄가 너무 많아서"라는 내 안의 '작은 키' 때문에 주님을 볼 수 없다고 주저앉습니다.
자캐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중을 탓하거나 자신의 키를 원망하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달려가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루카 19,4)
이것이 핵심입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는 것. 이것은 상식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체면을 구기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예리코의 세관장이, 그 부자가, 체면도 버리고 옷이 찢어지는 것도 감수하며 나무 위에 올라간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을 꼭 보고 싶어서"입니다. 이 나무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열망 때문에, 남들의 시선(군중)과 나의 한계(작은 키)를 기꺼이 뛰어넘는 '구체적이고 별난 노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모든 이는 이 '자기만의 돌무화과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저만의 '돌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 남들보다 예수님을 더 깊이, 더 생생하게 알고 싶었습니다.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였습니다.
남들이 모두 비웃고 이단 시비까지 하던 그 책을, 저는 5년 동안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돌무화과나무'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려고, 남들이 하지 않는 그 '별난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 마음에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갈등했습니다. 지금 가는 길을 가야 할까, 아니면 제자의 길을 가야 할까? 그리고 자캐오처럼 이전에 추구하던 것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제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주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제 안에 사시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아무런 '돌무화과나무'에도 오르지 않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찾는다면서, 남들이 하는 만큼(군중)만 하고, 내 한계(작은 키) 안에만 머무른다면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돌무화과나무'는 무엇입니까? 남들보다 10분 더 바치는 아침 기도입니까? 남들이 꺼리는 봉사활동입니까? 아무도 안 알아줘도 매일 읽는 성경 한 장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당장 그 나무를 향해 달려가십시오. 체면을 버리고 그 나무에 오르십시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여러분을 올려다보시며,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실 것입니다.
"아무개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전의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모시고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는 성모님과 같은 삶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외부 강의를 종종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저의 강의 스타일은 강연 대에 가만히 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서 왔다 갔다 하면서 강의합니다. 어떻게 보면 정신없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어느 성당에 특강 하러 갔다가, 특강 전에 수녀님께서 신자들을 나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귀한 강사 신부님 모셨는데, 뒤에만 앉아 있지 말고 앞으로 가서 앉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조한 말, “이것은 예의가 아니에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앉는 자리 때문에 굳이 혼날 필요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성당까지 와서 잔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또 오는 순서대로 앞에 앉을 필요가 있을까요? 자기가 앉고 싶은 편한 자리도 있을 텐데 말이지요. 이런 제약을 받으면 강의 시간 내내 불편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수녀님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돌아다니며 강의할 테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저의 강의는 돌아다니면서 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이 제게 오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들에게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보다 신나게 반응해 주시는 열정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습니까? 어디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하려는 열정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당시 세관장은 로마에 협력해서 동족의 세금을 뜯어내기에 세리들보다도 더 큰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따라서 부자였지만, 그 부는 착취를 통해 얻은 부정한 재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군중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체면을 버리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성인 남성이, 특히 부유한 세관장이 나무에 오르는 것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는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만큼 그의 예수님을 보려는 열망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열망이 예수님의 주목을 받습니다. 군중이 그를 ‘죄인’, ‘세관장’으로 보고 있지만, 예수님은 ‘자캐오’라고 부르면서 한 인격체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얼른 내려오너라.”라고 하시지요. 지체할 수 없는 구원의 시급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라고 하십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머무르겠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먼저 내미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캐오는 기쁘게 응답합니다.
맞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구원의 손을 내미시며 다가오십니다. 그렇다면 그 손길을 어떻게 응답하고 계십니까? 이 응답을 자캐오처럼 어떤 장해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보려는 열망이 가득해야만 가능합니다. 체면 때문에,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려는 열망 자체를 포기한다면 구원의 손을 잡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열망이 어떠합니까?
오늘의 명언
나는 내가 되고자 추구하는 바로 그것이다(고든 올포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 오늘의 구원이라 믿습니다. 잃은 이들이란 삶의 방향을 잃고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의미합니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고, 현재의 우리 삶 속에 있습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찾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자캐오를 찾으셨습니다. 참된 회개는 사랑받았다는 경험에서 흘러나오는 가장 적극적인 응답입니다. 구원은 먼 미래의 조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변화된 우리의 마음과 열린 사랑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체험되는 구원입니다. 현재 우리의 선택과 행동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사랑과 용서, 기도의 실천을 통해 이미 체험되는 현재적 구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구원과 평화를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구원은 하느님께 맡기는 지금 이 순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찾아오듯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자캐오처럼 내려놓고 내려놓으며 가장 좋은 구원을 살아갑시다. 집착하는 우리의 방식을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며 진정한 사랑입니다. 오늘에 감사드립니다.
루카복음 19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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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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