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오너라.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느님, 복된 엘리사벳에게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공경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섬기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17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마카 1,10-15.41-43.54-57.62-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렸다. - 오늘 복음
(루카 18,35-43)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1마카 1,10-15.41-43.54-57.62-64
오늘 제1독서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렸다.
그 무렵
10 죄의 뿌리가 나왔는데, 그가 안티오코스 임금의 아들로서 로마에 인질로 잡혀갔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이다. 그는 그리스 왕국 백삼십칠년에 임금이 되었다.
11 그 무렵에 이스라엘에서 변절자들이 생겨 많은 이들을 이러한 말로 꾀었다. “자, 가서 우리 주변의 민족들과 계약을 맺읍시다. 그들을 멀리하고 지내는 동안에 우리는 재난만 숱하게 당했을 뿐이오.”
12 이 말이 마음에 들어,
13 백성 가운데 몇 사람이 임금에게 기꺼이 나아가자,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14 그리하여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15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렸다. 이렇게 그들은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41 임금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42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 이민족들은 모두 임금의 말을 받아들였다.
43 이스라엘에서도 많은 이들이 임금의 종교를 좋아하여,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혔다.
54 백사십오년 키슬레우 달 열닷샛날, 안티오코스는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웠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변의 유다 성읍들에 제단을 세우고,
55 집 대문이나 거리에서 향을 피웠다.
56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태워 버렸다.
57 계약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들키거나 율법을 따르는 이는 누구든지 왕명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
62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63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64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린 것이다.
루카 18,35-43
오늘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17일
김정현 요셉 신부
✚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소개 00:06
✚ 미사시작 01:08
✚ 강론시작 09:4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눈먼 신앙에서 깨어나라.
유명 관광지를 여행하다 보면 관광 체험 상품 가운데 ‘마차 투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마차를 끄는 말의 두 눈 좌우에 작은 가리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양옆의 변화를 보지 못하게 하여 말이 달리는 도중에 놀라는 것을 예방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가게 하려는 것이랍니다. 어쩌면 우리 또한 비슷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두루 살피기보다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면서 말이지요.
우리는 신앙으로 ‘눈을 뜬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인류의 역사 곳곳에 배어 있음을, 우리의 삶 곳곳을 꿰뚫고 있음을 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완고함을 꿰뚫어 주변에 고통받고 상처받아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이웃들이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은 신앙의 사건이요 눈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눈먼 이는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라고 간청합니다. ‘다시’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오늘 독서인 마카베오기 상권에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 시절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변절과 불충실이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민족들을 부러워하여 거룩한 계약과 그들만의 고유한 관습을 저버린 채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온갖 악을 저지르고 이방의 우상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안식일을 더럽힙니다.
세상에 대한 관대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퇴색되고 변질되어 가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저도 예리코의 눈먼 이를 따라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더 큰 소리로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의 눈먼 이가 자비를 받아 구원되는 얘기인데 자비를 청하는 그의 부르짖음이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하자 그는 더 큰 소리로 자비를 청하는 것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사람들의 저지에 주눅 들어 죽어 가는 소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제가 고백성사 줄 때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죽어 가는 소리로 죄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뭐가 들려야 훈화도 하고 보속도 줄 텐데 죽어 가는 소리니 더 집중해야 하고 초집중해야 하니 빨리 피곤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를 고백하면서 큰 소리로 고백할 사람 거의 없고, 자비를 마치 맡겨놓은 것 달라듯이 달라고 할 사람 없지요. 그러니 자신만만한 바리사이와 달리 세리가 주님 앞에 나오지도 못하고 멀찍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것처럼 그렇게 청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자비를 청하는 태도로는 이것이 맞지 않을까요? 뭐가 그리 당당하다고 큰 소리로 외치겠습니까? 그런데 경우가 다른 것 같습니다. 죄인은 그렇게 자비를 청함이 맞을 것입니다. 부끄럽고 죄스러워 겸손한 태도가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먼 이의 경우는 겸손 떨 계제가 아닙니다. 절실하고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사실 우리도 자비를 입기 위해서는 이렇게 절실해야 합니다. 절실해야 이 소경처럼 간절히 청할 것이기 때문이고, 그래야 어떤 사람도 제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사람에 의해 좌절당하지 않겠지만 사람 때문에 내가 포기함으로써 놓쳐서는 안 되겠지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사람에 의해 좌절되거나 방해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을 허락지 말아야 하고 그렇기에 반작용으로 더 큰 소리를 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자비는 하느님께 받는 것이지 인간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 주님의 치유와 자비가 필요한 자라면 오늘 소경처럼 인간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주님께 초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복음의 소경처럼 하느님의 자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인지, 그만큼 간절하게 청하는 사람인지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9)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것, 주님 뜻에 합당한 것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원해야 할 것’과 ‘믿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자,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곧 ‘관상(theoria)의 눈’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새로운 것을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새롭게 보는 영적인 눈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 곧 ‘새롭게 보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사랑으로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8,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불가능한 소망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야!
찬미 예수님.
캐나다 몬트리올의 성 십자가 수도회에 '알프레드 베셋'이라는 청년이 입회했을 때, 수도원 장상은 그를 받아주며 추천서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그는 오늘 몸이 아파 일은 거의 할 수 없지만, 기도는 열심히 하는 거룩한 영혼입니다."
그의 이름은 '안드레'가 되었고, 그가 맡은 소임은 노트르담 대학의 '문지기'였습니다. 그는 평생을 그 자리에서 문을 열고 닫고, 방문객을 안내했습니다. 글도 겨우 읽을 줄 알았고, 몸은 평생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가장 연약하고 '쓸모없는 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수사의 마음속에는 화산처럼 타오르는 '믿음의 불'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신 '성 요셉'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왜 하필 성 요셉이었을까요? 안드레 수사는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과 성모님을 맡기실 정도로 신뢰하신 분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청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분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병자들이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감기 환자, 다친 아이들이었습니다. 안드레 수사는 자신이 고쳐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똑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성 요셉께 가십시오. 그분께 기도하십시오!"
그는 성 요셉 성상 앞 램프의 기름을 조금 묻혀 환자에게 발라주며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이 포기한 불치병 환자들이 낫고, 말기 암 환자들이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몬트리올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지만, 그는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성 요셉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안드레 수사에게 몰려든 이유는, 그가 '불가능한 청'을 들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드레 수사를 단순한 문지기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대리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증거가 바로 지금 몬트리올 성 요셉 대성당의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천 개의 목발과 보조기들, 바로 '성 요셉의 벽'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눈먼 이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평생 청했던 것은 고작 "적선해 주십시오", "한 푼만 주십시오"라는 '가능한 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그는 자신의 평생 기도 제목을 바꿉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 의사 수준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저분이라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잠자코 있으라고 했습니다.
"시끄럽다! 네 주제에 감히 무엇을 청하느냐?"
하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은 그에게 '불가능한 청'을 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는 돈(가능한 청)이 아니라 '다시 보는 것'(불가능한 청)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선포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의 '불가능한 청'이 그의 믿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신부인 저에게 안수를 청하는 분들도 다양합니다. 감기 환자부터 말기 암 환자까지 옵니다. 병원에 가면 나을 수 있는 것으로 안수를 청하는 분들은, 저를 신부님 말씀대로 '의사 수준'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기 암 환자가 눈물로 안수를 청할 때, 그분은 저를 '하느님의 대리자'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오산 성당에 있을 때였습니다. 한 어머니가 저에게 달려와, 막 숨을 거둔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곧 영안실로 들어가야 할, 이미 싸늘해진 아들의 시신이었습니다. 저는 그 어머니와 함께 영안실 문 앞에서, 이미 의학적으로는 끝난 그 아들의 몸에 손을 얹고 '불가능한 안수'를 했습니다. 물론, 아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저는 기적보다 더 위대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 '어머니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위로해 주는 사람' 수준으로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저를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느님의 대리자'로 불렀습니다. 그녀의 그 '불가능한 청'은, 비록 인간적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이미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는지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 하나쯤은 꾸준히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나의 아버지'로,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주일학교 교사할 때 제가 야단쳐서 도망간 아이가 되돌아오기를 청했습니다. 들어주셨습니다. 술내기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들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쌓여갔습니다. 지금은 모든 불가능한 것들도 청합니다. 들어주시는 것은 주님 마음이지만, 그것을 청할 수 있는 믿음은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불가능한 청'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의 눈먼 이처럼, 안드레 수사처럼, 그리고 오산 성당의 그 어머니처럼 당당하고 꾸준하게 기도하십시오. 그 '불가능한 청'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상어를 아세요? 어렸을 때, 영화 ‘죠스’를 보면서 상어는 무시무시한 괴물과 같은 어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해에 있는 상어는 소형 어류나 갑각류 등을 먹고 생활하는 작은 상어라고 하더군요. 즉, 사람에게 전혀 위험하지 않은 생선입니다. 그래도 이 상어가 크면 2.4미터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상어가 20cm 정도 크기에서 성장을 멈추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다 야생에서 살면 2.4미터까지 자라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까요?
유전자 조작이 아닙니다. 약을 먹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 방법은 상어를 어렸을 때(아직 작을 때) 수조에 넣어 키우면 그 수조 크기에 맞춰 성장을 멈춘다고 하더군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무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만드셨는데 스스로 수조에 자기를 가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이라는 수조, 명예라는 수조, 능력이라는 수조, 욕심과 이기심이라는 수조 등에 스스로 가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만든 수조가 아닌 남이 만든 수조에 갇히는 때도 있습니다. 남의 판단이라는 수조에 갇혀서 전혀 성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성장을 가로막는 수조에 들어갔다면 얼른 탈출해야 합니다. 계속 그 안에 있으면 성장이 끝나고 맙니다. 많은 위험과 시련이 있는 수조 밖이지만, 주님의 보호 아래에서 계속 성장하게 됩니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사회의 가장 소외되고 무력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눈이 멀어 예수님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예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들었기 때문입니다. 들었기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볼 수 없다는 수조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눈을 뜨고 있는 군중을 예수님을 그저 ‘나자렛 출신’으로만 보고 있지만, 눈먼 이는 영적인 눈으로 그분의 참된 정체성, 즉 메시아이심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다른 이의 판단’의 수조에 가두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먼 이의 믿음은 이 수조에 갇히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런 간절함과 굳은 믿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으며, 예수님께 인정받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42)
즉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자기의 장애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간절함과 굳은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구원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영적 수조에 절대로 갇히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집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해지고 밖으로 나가면 행복에서 가장 멀어지는 법이다(J.G. 홀런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내맡김의 진정한 신앙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눈먼 사람은 자신의 결핍과 아픔을 숨기지 않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용기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진실한 갈망을 끌어올립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말할 때 치유는 시작됩니다. 눈먼 이가 눈을 뜨자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달라졌기에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말하는 순간 그것은 신세 한탄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희망의 움직임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직접 말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느님께 내어놓는 것이 진실한 신앙입니다.
나의 이야기를 하느님께 내어놓을 때, 상처는 빛으로 바뀌고, 나는 다시 보게 되며, 내 삶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됩니다. 진실하게 말하는 것이 진실하게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내어놓는 것이 참된 변화이며 다시 보는 치유입니다. 내어놓는 오늘 되십시오.
루카복음 18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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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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