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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1/19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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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주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언제나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며 완전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1월 19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1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마카 7,1.20-31)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 오늘 복음
    (루카 19,11ㄴ-28)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2마카 7,1.20-31
오늘 제1독서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그 무렵 

1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20 특별히 그 어머니는 오래 기억될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21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 고결한 정신으로 가득 찬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북돋우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22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23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분의 법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24 안티오코스는 자기가 무시당하였다고 생각하며, 그 여자의 말투가 자기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하였다. 막내아들은 아직 살아 있었다. 임금은 그에게 조상들의 관습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부자로 만들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며 벗으로 삼고 관직까지 주겠다고 하면서, 말로 타이를 뿐만 아니라 약속하며 맹세까지 하였다. 

25 그러나 그 젊은이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그 어머니를 가까이 불러 소년에게 충고하여 목숨을 구하게 하라고 강권하였다. 

26 임금이 줄기차게 강권하자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하였다. 

27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몸을 기울이고 그 잔인한 폭군을 비웃으며 조상들의 언어로 이렇게 말하였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나는 아홉 달 동안 너를 배 속에 품고 다녔고 너에게 세 해 동안 젖을 먹였으며, 네가 이 나이에 이르도록 기르고 키우고 보살펴 왔다. 

28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29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30 어머니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젊은이가 말하였다. “당신들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오? 나는 임금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소. 모세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주어진 법에만 순종할 뿐이오. 

31 히브리인들을 거슬러 온갖 불행을 꾸며 낸 당신은 결코 하느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9,11ㄴ-28
오늘 복음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때에 

11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19일
김정현 요셉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9:5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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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하느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미나의 비유’입니다. 어떤 귀족이 길을 떠나며 종 열 명에게 한 미나씩을 맡깁니다. 다른 종들은 그것을 가지고 저마다 이익을 냈는데 한 사람은 그냥 수건에 싸서 두었습니다. 주인, 곧 하느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냉혹하게 거두어 가시는 분으로 여겨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마구 다루시는 냉혹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오해가 그 종의 마음을 위축되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을 올바로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한 어머니를 만납니다. 율법이 금지하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임금 앞에서 그 어머니는 자신의 일곱 아들을 이렇게 격려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2마카 7,22). “나는 모른다.”, “내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아들들에게 하느님을 분명하게 가리켜 보입니다. 사람과 만물을 만드신 온 세상의 창조주를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막내아들을 이렇게 격려합니다. 확신 가득한 사랑의 가르침입니다. 

“아들아, 나를 불쌍히 여겨 다오. …… 얘야, 너에게 당부한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보아라.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미 있는 것에서 그것들을 만들지 않으셨음을 깨달아라. 사람들이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7,27-29).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창세기적인 여인

오늘 우리가 읽은 마카베오서는 어제 위대한 노인에 이어 위대한 어머니의 신앙심에 관해 들려주는데 저는 이 어머니를 창세기적인 여인이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녀에게 일곱 아들은 하나도 그녀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섯 아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어도 막내아들만은 내 아들로 남겨두지 않고 막내마저 하느님께 바치며 이렇게 얘기한 것입니다. 창세기적 여인과 창세기적 믿음은 존재의 시작을 이렇게 믿고, 이렇게 소유 없이 가난하며 이렇게 종말론적 희망을 지닙니다.  

내가 태어난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부모에게서 생겨났어도 하느님께서 부모를 빌려 나를 나게 하셨다고 믿는 것이요, 내가 자녀들을 생산한 것이 틀림없어도 나는 나의 몸을 그분 창조의 도구로 내어드린 것밖에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가난할 때 부모와 자식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모든 애착에서도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마카베오서의 창세기적 여인의 위대함은 종말관에서도 나타납니다. 오늘 마카베오서는 창세기적 여인의 입을 빌려 종말론적인 희망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창조하시는 분이 구원도 하시는 겁니다. 사랑 없이 불장난으로 애를 생산한 인간은 낳기만 하고 버리기도 하지만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의 하느님은 당신이 낳은 생명을 내버려 두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내 구원하실 거라고 우리 신앙은 창세기 여인처럼 믿습니다.  

우리 미사 감사송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데 감사의 두 굵직한 이유가 바로 창조와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인간을 선으로 창조하시고 정의로 책벌하셨으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비로 구원하셨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인류를 창조하셨듯이 또한 인자로이 인류를 구원하셨나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동안 감사드릴 것이 많고도 많겠지만 나의 창조와 나의 구원에 대해 굵직히 감사드릴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창세기적인 믿음이 있어야만 이럴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창세기적인 여인에게서 도전도 받고 자극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마음을 믿음과 순명으로 채우기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벌거숭이로 알몸이 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초겨울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선물이요 은총임과 동시에, 그에 따른 과업과 소명이 주어집니다. 선물인 ‘미나’는 주인이 ‘벌이를 하라고 맡긴 것’(루카 19,13 참조)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인은 돌아오면 그 소명을 실현하였는지의 여부에 따라 심판을 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왕권을 받으러 먼 고장으로 떠난 어떤 귀족’은 예수님의 승천을, ‘다시 돌아옴’은 재림과 종말을 암시해줍니다.

이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 지지만, 사실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과 맺는 관계성’에 있습니다. 곧 주인에 대한 ‘믿음’과 ‘순명’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고,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행실을 ‘순명’으로 채워나가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거나 혹은 자신의 안정과 보존에만 머물지 말고, 선으로 활용하고 충실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에 충실하고 있는지,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명령에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9,13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주님!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사랑이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제 안에서 이루어지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그 크신 힘에 
감사할 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 앞에선 방관도 불순종이다.

찬미 예수님
1944년 겨울,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지옥이었습니다. 나치와 헝가리 화살십자당원들이 유대인들을 매일 밤 다뉴브강으로 끌고 가 총살하던, 그야말로 '죽음'이 왕 노릇 하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조르조 페를라스카'라는 이탈리아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공로로 '스페인 보호증명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안전하게 스위스로 도망칠 수 있는 '편도 티켓'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남을 완벽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차역으로 가던 중, 유대인 아이들이 화물칸에 실려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 사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이 그의 발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안전한 생존'을 버리고 '거룩한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기차에서 내려, 이미 대사가 도망가고 텅 비어버린 스페인 대사관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스페인 영사 대리'라고 선언하는, 목숨을 건 '거짓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무 권한이 없었지만, 마치 자신이 모든 권한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미나'(보호증명서 한 장)를 가지고 위대한 '장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스페인 대사관 명의로 '안전 가옥' 8채를 확보하고, 수천 장의 가짜 보호증명서를 발행했습니다. 심지어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나치 최고 장교 앞에서도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나는 스페인 영사, 호르헤 페를라스카요! 이들은 스페인의 보호 아래 있소!" 

그는 기차역으로 달려가 이미 아우슈비츠로 떠나려던 기차 문을 열고 사람들을 끌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나' 하나로 5,200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귀족이 종들에게 똑같이 '한 미나'씩을 맡기고 왕의 자리를 받으러 떠납니다. 두 종은 그 한 미나를 가지고 "가서 장사하여" 열 미나와 다섯 미나를 남겼습니다. 그들은 주인을 '왕'으로 믿었기에, 그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거룩한 모험'을 감수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종은 그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는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루카 19,20-21)라고 변명합니다. 그의 죄는 장사를 하다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또 다른 부류가 나옵니다. 바로 "우리는 저자가 우리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루카 19,14)라고 외친 시민들입니다. 이 둘은 다른 죄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정확히 같은 죄입니다. 

주인을 '무서운 분'으로 오해하여 두려움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이나, 주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대놓고 반역한' 시민이나, 그 본질은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학교에 가라"는 뜻을 주었을 때, "싫어요!"라고 대들며 밖으로 나가는 자녀나, "네..." 하고 대답만 하고 방구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자녀나,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불순종은 똑같습니다.

하느님, 곧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나의 '왕'이시라면, 내 눈앞에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상황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분의 왕권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1964년 뉴욕,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아파트 앞에서 30분 넘게 살해당했습니다. 최소 38명의 이웃이 창문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거나 비명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나설 필요가 없어서',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38명의 방관자들은 세 번째 종과 똑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이라는 수건에 '인간의 도리'라는 미나를 싸서 숨겼습니다.  

우리는 매일 이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전한 방관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거룩한 모험'을 감수하는 신앙인이 될 것인가. 구약의 에스테르를 보십시오. 그녀는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어 궁전 안에서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하만이 유다 민족을 몰살하려 할 때, 모르도카이는 그녀에게 "그대가 이럴 때에 침묵을 지키면... 그대와 그대의 아버지 집안은 멸망할 것이오"(에스 4,14)라고 경고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에스테르는 '안전한 생존'을 버리고,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나아가는 '거룩한 모험'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미나'(왕비의 지위)를 가지고 '장사'하기로 결심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제가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에스 4,16)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안 살리는 죄책감. 어쩌면 이 죄책감이야말로 우리를 잠에서 깨우는 '천사'의 목소리일지 모릅니다. 

2014년,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구출하라'는 '미나'(직분)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남기고 가장 먼저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미나'를 수건에 싸 들고 구명정에 올랐고, 수백 명의 생명은 바다에 잠겼습니다. 

이와 정반대의 선택을 한 선장이 있습니다. 1985년 11월, '전재용 선장'은 남중국해에서 원목을 싣고 항해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망망대해에서 작은 어선에 타고 있던 96명의 베트남 보트피플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국제법상 그들을 구조하는 것은 선장의 '재량'이었습니다. 회사의 규정은 '그냥 지나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연료도 시간도 돈도 낭비되고, 혹시라도 전염병이나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선장이 져야 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칠 모든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굶주림과 공포에 질려 손을 흔드는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안 살리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항로를 돌려 96명 전원을 구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나'(선장의 권한)를 가지고 가장 위대한 '장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나의 안전, 나의 이익, 나의 규정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수건이 아닙니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불순종이다. 신앙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거룩한 모험'을 매일 떠나게 하는 나침반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한 미나'는 무엇입니까? 장사는 모험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 어떤 '장사'를 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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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께 받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잠시 맡기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신앙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이며 교만이 아니라 충실함입니다. 하느님께 멀어진 사람은 아무 것도 나누지 않습니다. 나눔은 서로를 살리는 생명의 길임에도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우리가 가진 것입니다. 각각의 종에게 주어진 미나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과 재능, 기회를 의미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은 맡겨진 은총과 재능을 충실히 사용하는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은총을 우리의 두려움 속에 묻어두지 않는 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충실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능성의 존재이며,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할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두려움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우리가 가진 것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한 미나를 받은 종이 그것으로 열 배를 만든 것처럼, 우리가 가진 재능과 선행, 작은 노력이 실천으로 이루어지면 큰 결과로 이어집니다. 열 므나의 비유는 하느님께 받은 것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한다는 교훈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시간과 마음을 이웃들과 기쁘게 나눕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심고, 무엇을 어떻게 거둘 것인가를 묻고 실천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두려움 속에 묻어두지 않고 사랑과 용서를 진정 살아내는 오늘 하루입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7장 28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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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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