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하신 어머니, 찬미받으소서. 당신은 하늘과 땅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임금님을 낳으셨나이다.
주님,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를 영광스럽게 기념하며 공경하오니 저희가 그분의 전구로 주님께 풍성한 은총을 받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즈카 2,14-17)
딸 시온아, 즐거워하여라. 내가 이제 가서 머무르리라. - 오늘 복음
(마태 12,46-50)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즈카 2,14-17
오늘 제1독서
딸 시온아, 즐거워하여라. 내가 이제 가서 머무르리라.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때에 너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16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
17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마태 12,46-50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21일
조성동 안드레아 신부
✚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2
✚ 강론시작 07:3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봉헌은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평생의 응답이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요아킴과 안나가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성모님을 바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아들이나 딸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집 아들딸들이 사제나 수도자의 길을 간다고 하면 축복받았다고 말하다가도 정작 자신의 자녀가 그 길을 가겠다고 하면 대다수가 펄쩍 뜁니다. 제 경우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 밤새워 가족회의를 하였습니다. 제 편을 들어 주는 이는 하나도 없었고, 넉넉한 살림은 아니어도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자며 저를 붙잡았습니다.
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신학교 입학을 허락하셨습니다. 입을 꾹 다문 채 눈물만 흘리며 버티는 저의 모습을 보시고 사람이 하는 일 같지 않음을, 범상치 않음을 느끼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왔지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 12,48)라고 반문하시고는 당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12,49-50)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처음에 지니셨던 봉헌의 마음을 새롭게 하셨겠지요. 성모님께서도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헤아리시며, 아들 예수님을 다시 하느님께 봉헌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봉헌은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침 기도 때 바치는 봉헌 기도처럼 두고두고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이른 봉헌과 재 봉헌
오늘 축일의 우리말 이름이 '자헌'이기에 성모님이 봉헌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신 것처럼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전승적인 차원에서 보면 세 살 때 부모가 봉헌하신 것이지요.
그런데도 오늘 축일의 의미를 성모님이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신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은 부모가 봉헌했지만, 마리아가 그 봉헌을 뒤집지는 않으셨을 테니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의 경우 부모가 대신 결정하는 일이 많고, 그렇게 결정된 것을 미성숙한 자식은 내 결정이 아니라며 그 결정을 뒤집거나 불성실하게 따르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자기가 미성년일 때 부모가 결정한 것을 어른이 되어도 뒤집지 않고 성숙하게 다시 받아들여 자기의 결정이 되게 하지요.
그런데 인간적으로만 성숙해도 이러한데 영적으로 성숙한 성모님은 더욱더 부모의 봉헌을 따라 자신을 재봉헌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일의 의미를 두 가지로 보면 좋을 것입니다. 하나는 이른 봉헌이고 다른 하나는 재봉헌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성숙할수록 일찍 자신을 봉헌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녀 소화 데레사의 경우 언니들이 수녀원에 들어간 영향도 있었겠지만 아주 어린 나이부터 자신을 봉헌하고픈 열망이 있었지요.
가끔 저에게 성소 문의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너무 안타깝게도 늦은 나이에 수도원에 들어오고 싶어 합니다. 이들 중에는 결정 장애가 있어서 그런 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늦게야 자신을 봉헌할 마음이 생긴 분들이고, 뒤집어 얘기하면 늦게야 봉헌의 의미를 찾은 분들입니다.
그러면 그전에는 어땠던 겁니까? 자신의 봉헌이 아니라 자신의 실현에 의미를 뒀겠지요. 프란치스코가 젊은 시절 기사가 되고자 했던 것처럼. 실상 하느님을 모르고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기 전에는 누구나 자기의 실현이 삶의 의미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봉헌이란 영적 성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문제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재봉헌의 의미를 보겠습니다. 재봉헌이란 봉헌이 한 번으로 그칠 수 없고, 끊임없이 갱신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 번의 봉헌으로 봉헌이 완성될 수 없기에 재봉헌을 통해 완성을 이루어가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렸을 때의 마음 또는 초심을 잃고 마치 토했던 것을 다시 먹듯 과거로 돌아가곤 하기에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마음의 갱신을 하곤 하지요.
이처럼 갱신이 초심 또는 과거로 돌아가는 면이 있다면 완성은 초심을 잃는 것을 두려워서가 아니라 더 완전한 봉헌을 위해 끊임없이 나아감의 뜻이 큽니다. 사랑으로 치면 풋사랑인 첫사랑 또는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이 성숙해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초심이나 첫사랑 같은 것에 향수와 같은 것이 있고 그래서 그리로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도 있는데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초심이 아니라 완성이지요. 초심에 순수한 면은 있지만, 초심이 완전한 것은 아니니 공연히 초심과 첫사랑에 대한 패배주의적 향수 때문에 완성을 위한 열망을 꺾지 않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된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세 살 때, 그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에 의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고 전해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예수님이 성모님과 요셉의 아들로서 혈육의 가족에 묶여있지 않는 ‘새로운 가족’을 지니게 된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부모의 슬하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가족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족’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는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가족”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사실, 이는 엄청난 선언입니다. 곧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하느님과 다윗 사이의 계약’의 신탁이 다윗 가문에서 태어난 예수님에게서 실현되고 있음을 드러내줍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이렇게 내렸습니다.
“주님이 너에게 집안을 만들 것이라고 선언한다. ...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너의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 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1-16)
이는 “집”(히;바이트), “집안”, “가문”(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집안”은 공간을 지칭하는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일정한 그룹을 지칭하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동시에 이는 하느님께서는 다윗 후손의 “아버지”가 되시고 다윗의 후손이 “하느님의 아들”이 됨을 선언함으로써, 진정한 의미로서의 “가정”, “집안”, “가문”이 새롭게 구성되고 정립됨을 선언합니다.
바로 이 하느님과의 부자관계가 ‘예수님께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는 복음서 전체의 핵심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분의 집안”(가족), “그분의 나라”, “그분의 왕좌”가 영원히 튼튼할 것이 선언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입니다. 이 가정 이야기는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부부 가정에서, 방주에서 식솔들과 함께 오는 노아의 가정에서, 12형제들의 지파로 이루어지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혈연을 넘어 민족을 형성한 모세의 가정을 거쳐, 마침내 초민족적 보편적 가정을 예수님의 가정이 이루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로서 진정한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2,48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당신의 제단이 당신의 인간관계를 만든다.
덴마크의 황량한 바닷가 마을, 회색빛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엄격한 율법에 매여 서로를 정죄하고 미워하던 이 척박한 마을에 프랑스 여인 바베트가 찾아옵니다. 그녀는 14년 동안 무보수로 헌신하다가, 어느 날 복권에 당첨되어 1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얻게 됩니다.
모두가 그녀가 돈을 가지고 떠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베트는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그 모든 돈을 쏟아부어 마을 사람들을 위한 단 한 번의 프랑스 정찬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녀가 준비한 최고의 음식과 와인 앞에서, 얼음장 같던 노인들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미움은 사라지고, 서로 용서하며 하나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재산을 다 써버린 그녀에게 "이제 가난해져서 어떡하냐"고 묻자, 바베트는 이렇게 답합니다. "아닙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바베트에게는 돈보다 더 중요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술'이라는 제단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돈과 에너지를 그 제단에 봉헌했기에, 사람들에게 환희와 화해를 선물할 수 있었고 그 관계 안에서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바베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안방에, 당신의 심장 한가운데에 어떤 제단을 쌓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자신을 바치는 존재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라는 제단을 쌓고 자신의 모든 시간을 바칩니다. 어떤 이는 '성공'이나 '자식', 혹은 '쾌락'이라는 제단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들을 모으려 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사고, 외모로 사람을 홀리고, 권력으로 사람을 묶어둡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마르지 않는 샘은 하느님뿐이십니다. 돈, 명예, 육체적 매력, 이 모든 것은 유한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십시오. 나무가 사과와 가지를 줄 수 있을 때 소년은 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무가 다 털리고 그루터기만 남았을 때, 소년은 떠나갔습니다.
여러분의 제단 위에 있는 것이 말라버리면, 그것을 보고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떠나갑니다. 돈이 떨어지면 돈을 보고 모인 이들이 떠나고, 젊음이 사라지면 육체를 탐했던 이들이 떠납니다. 그런 인간관계에는 '친밀함'이 없습니다. 거래만 있을 뿐입니다. 행복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껍데기뿐인 관계, 그것이 하느님 없는 제단을 쌓은 사람의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그렇다면, 떠나지 않는 사람들, 참다운 사랑을 주고받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의 부귀영화나 헛된 우상에게 제단을 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하느님께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셨습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제단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제단 위로 성령께서 내려오셨고,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셨습니다. 성모님은 사람들에게 돈이나 쾌락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신앙인이 성모님을 어머니라 부르며 그분 곁에 모여듭니다. 성모님의 제단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기에 결코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한 성가정을 이루고, 친밀한 공동체를 만드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냉정하게 나의 제단을 점검해 봅시다. 나는 오늘 하루, 나의 뜻과 에너지를 어디에 봉헌했습니까? 구약 성경 열왕기에 나오는 사렙타의 과부를 기억하십시오. 그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식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마지막 한 줌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하느님의 사람을 위한 제단에 바쳤습니다. 자신의 생존 본능보다 하느님의 약속을 더 신뢰하며 자신을 봉헌했을 때, 성경은 "주님께서 땅에 비를 다시 내려 주실 때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증언합니다.
여러분의 인간관계는 여러분 안의 제단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를 위해 쌓은 제단은 고독을 낳지만, 하느님을 위해 봉헌한 제단은 사랑을 낳습니다. 오늘 성모님처럼, 여러분의 의지와 욕망, 그리고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의 제단 위에 올려놓으십시오. 내가 내어놓은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마르지 않는 은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여러분은 가족과 이웃에게 참된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여러분의 곁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배를 만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칩니다.
2) 기도하게 합니다.
3) 무한한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합니다.
정답은 3번입니다. 이는 생텍쥐페리의 말입니다.
“배를 만들게 하고 싶다면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무한한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하라.”
배 만드는 법을 가르쳐도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배 만드는 것이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일로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있으면 배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배를 만들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 전례를 배우고, 성경을 배우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금세 자기가 하던 것을 멈출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께 대한 그리움 없이 친목만을 강조하는 사람이 대부분 냉담으로 이어지는 것을 자주 봅니다.
주님께 대한 그리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기도하게 되고, 미사를 비롯한 전례에 집중할 것이며, 성경 공부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그리움에 집중하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철저하게 주님 중심이었고, 이는 태어나신 뒤부터 계속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가 늙은 나이에 얻은 귀한 딸을 3세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하느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그때 어린 성모님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기쁘게 성전 계단을 올랐으며, 그곳에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셨다고 하지요.
이 봉헌은 ‘자헌’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타의에 의한 봉헌이 아니라 성모님 스스로가 당신 의지로 하느님께 온 존재를 바쳤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주님 탄생 예고에서 보여 주셨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에서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 모범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주님께 대한 그리움에 집중하는 삶, 사랑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커다란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노자 ‘도덕경’).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자헌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심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새로운 관계는 언제나 봉헌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자신 전체를 맡기는 행위입니다. 자신을 내어줄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내어줌이 성장입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삶을 깨닫게 됩니다.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봉헌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행하십니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모두 하느님과 나누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의미를 우리가 이루는 것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는 것으로 전환했습니다.
봉헌이 새 시대를 엽니다. 봉헌은 비움이고 비움은 내어드림이고 내어드림은 생명의 길입니다. 내어드리는 자헌의 길은 새롭게 태어나는 길입니다. 자헌으로 사랑과 겸손을 살아가는 오늘 되십시오.
마태오복음 12장 5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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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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