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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1/02 (일) 위령미사 생중계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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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듯이,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예수님과 함께 데려가시리라. 아담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나리라.

주님, 성자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저희의 믿음을 깊게 하셨으니 저희의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고 저희도 세상을 떠난 주님의 종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리라는 굳건한 희망을 지니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1월 2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2일
위령미사
실시간 생중계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2일 14시 평화방송 용산성당 성직자묘지 실시간 생중계 위령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욥 19,1.23-27ㄴ)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제 2독서
    (로마 5,5-11)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 5,1-12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욥 19,1.23-27ㄴ
오늘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1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로마 5,5-11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5,1-12ㄴ
오늘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2일
반유성 안드레아 신부

 

✚ 위령의 날 소개 00:06

✚ 도림동교육센터 소개 01:19

✚ 미사시작 02:41

✚ 강론시작 14:39

 

 

가톨릭 평화방송 생중계
용산성당 위령미사

 

 

2025년 11월 2일 14:00
용산성당 성직자 묘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집전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죽음을 넘어 하느님께 가는 길

예로부터 우리 교회는 신자들에게 ‘사말’ 교리를 가르쳐 왔습니다. 사말이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마지막 때의 네 가지, 곧 죽음, 심판, 천국, 지옥을 말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결국 죽어서 심판을 받고, 그러고 나서는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야 하는데, 이를 옛 천주교 교리에서 ‘사말’이라고 부른 것이지요.

“여러분은 죽으면 어디로 갈 것 같으세요?” 

교우들에게 이렇게 물으면 많은 분이 ‘연옥’이라 답합니다. ‘지옥’이라고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잘 살지는 못하였어도, 신자답게 살아 보려고 애써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 있게 ‘천국’이라고 말하지도 못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옥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충실하고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한 영혼이 겪게 되는 ‘정화’ 과정이 연옥입니다. 우리는 연옥을 거쳐 하느님 곁으로 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희망입니다.

오늘 첫째 미사의 복음은 어제 복음과 같은 ‘참행복’에 관한 산상 설교입니다. 놀랍도록 큰 희망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며, 의로움을 간절히 바라고,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아야 얻고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에라도 속하면, 그래서 하느님께 가닿으면 됩니다.

참행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 삶의 모든 길목에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넘어 그것을 온전히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도정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어제 모든 성인의 날에 이어 오늘 위령의 날을 지내고 있는데 이는 우리를 떠난 영혼들을 기억하는 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떠나 천국에 든 성인들과 아직 그렇지 않은 영혼들이 있다는 것이 두 축일의 차이점이라는 것쯤은 우리가 익히 다 아는 바이고, 그분들을 기도하는 날이 바로 오늘 위령의 날이라는 것도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왜 축일의 순서가 모든 성인의 날이 먼저이고 위령의 날이 다음인지 그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오늘 알아야 하고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모든 성인처럼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최종 목적인데 아직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도정에 있는 존재들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걸 인정하고 하늘나라로 가는 행복 도정에 오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부정하기에 아예 그 도정에 오르지 않고 이탈한 인간도 있다는 겁니다.

이 도정에 오르지 않아 완전히 이탈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지옥이요, 이 행복 도정에 오르긴 했지만 아직 하늘나라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있는 곳이 연옥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 가톨릭 신앙입니다. 여기서 저는 연옥에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 가톨릭 신앙이라고 했는데 이는 연옥 교리를 믿지 않는 개신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개신교 신자들은 사실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직천당한다고 철석같이 믿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믿음의 내용이고 실천입니다. 첫째로 그것은 가난 실천입니다. 영으로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다는 행복 선언의 말씀을 믿고 실제로 모든 것을 팔아 하느님 나라를 사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모든 것을 팔아 사야 할 밭에 묻힌 보물이라는 주님 말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라가야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주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실천해야 갈 수 있는 곳인데 복음의 부자 청년처럼 아무것도 버릴 수 없고 나눌 수 없으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 행복 도정은 출발조차 할 수 없겠지요.

둘째로 사랑 실천입니다. 나만 하느님 사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은 사랑 않고 하느님만 사랑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사랑 통공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인들처럼 하느님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랑이 통해야 합니다. 최후 심판의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야 합니다. 천국은 주님의 형제들인 가난한 이들을 주님인 듯이 사랑해야 갈 수 있고, 한 마리 양을 찾아가시는 주님처럼 길잃은 형제와 함께 갈 때 갈 수 있고, 이웃을 겨우 사랑하는 우리가 마침내 원수까지 사랑해야 갈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행복 도정에 있고, 아직까지 연옥에 있는 영혼이 있습니다. 행복 도정에 있는 우리와 아직 연옥에 있는 연령들이 함께 천국에 가기 위해서 통공의 기도를 같이 바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11월은 정녕 신비의 달입니다. 절로 죽음과 비움의 신비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우리를 존재의 심연으로 이끌고 갑니다. 마른 풀 한 줄기를 침대로 삼아 내려앉은 서리에서도, 뒹구는 낙엽을 깨우며 소스라치게 부는 바람에서도, 우리는 그 만남과 죽음의 신비를 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치 잎이 새싹일 때 ‘이미’ 단풍을 품고 있듯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보는 것이요, 꽃이 몽우리일 때 ‘이미’ 씨앗을 품고 있듯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통로요, 만남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 오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생사가 갈라질 수 없게 펼쳐져 있는 삶의 세계를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이요, 현재를 충실히 죽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완성을 향한 삶이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에티우스는 말합니다.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시간을 만들고, 머물러 있는 지금이 영원을 만든다.”

이처럼, 죽음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짓고, 삶의 질이 죽음의 질을 결정짓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중요함을 파우스티나 성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죽음이 신비한 것은 죽음이 한 생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생명의 신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일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우리의 죽을 몸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드러난다는 것’은 인생에 죽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애초에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불사불멸의 하느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 심오한 진리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습니다.”(1코린 15,51-5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안식을 주겠다는 이 벅찬 초대에서 우리는 참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사되고 베풀어지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라 합니다. 곧 참된 “안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찾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참된 안식”, 그것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그것은 공로로 얻어지기보다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탐구로 얻어지기보다 순명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앎으로 얻어지기보다 사랑으로 얻어집니다. 참으로, 그것은 그분의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안식은 참된 주인에게서 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리며, 주님의 축복과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과 공동체 식구들뿐만 아니라, 특히 소외된 영혼들, 곧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과 잊혀 진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또 평화를 위해 일하다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무죄한 사람들의 죽음을 함께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살육 속에서 희생된 이들, 테러와 폭력의 희생자들, 고문과 억압으로 희생된 이들, 그리고 이루 헤아릴 수없는 타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1,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은 언제, 왜 죽고 싶어질까? 죽은 자를 기억할 줄 모를 때

영화 ‘P.S. 아이 러브 유’(2007)에서, 주인공 홀리는 가장 사랑하는 남편 제리가 뇌종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삶의 모든 의욕을 잃고 집안에 틀어박혀 절망에 빠집니다. 그녀는 남편 없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30번째 생일날, '죽은 남편' 제리로부터 편지가 배달되기 시작합니다. 제리는 자신이 죽은 뒤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해, 그녀가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편지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새 옷을 사러 가", "무대에 올라 노래해 봐", "아일랜드로 여행을 떠나"… 남편이 '죽음 너머에서' 보내오는 사랑의 편지들은, 절망에 빠져 있던 홀리를 한 걸음씩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마침내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

애니메이션 ‘코코’를 보면,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 전통이 나옵니다. 그 세계관에서 영혼의 '최종적인 죽음'은, 이승에서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찾아옵니다. 기억되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위령의 날 죽은 자를 기억합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는 저승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죽을 만큼 사랑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죽고 싶을까요? 사람은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것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에너지는 ‘사랑’입니다. 기름 없는 차는 움직일 수 없듯이, 사랑받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여깁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은 '사랑받지 못함'과의 처절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려 했으나 실패했고, 화가가 되어서는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를 '광인'이라 조롱했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사랑은 동생 테오의 재정적, 정서적 지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이 동생에게 짐이 된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가 자신의 귀를 자른 충격적인 사건 역시, 유일하게 곁에 있던 친구 고갱마저 자신을 떠나려 하자 벌인 극단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슬픔은 영원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아무도 없는 밀밭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죽음은 세상의 몰이해와 냉대 속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던 한 영혼의 마지막 절규였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을 사랑했던 부모를 기억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자신은 사랑받았고, 자신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미녀가 진짜 괴로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세상의 사랑을 위해 아버지의 사랑을 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여길 때 살고 싶은 마음을 잃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이유도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를 사랑한 분들은 죽어서도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위 영화 ‘P.S. 아이 러브 유’에서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어, 그 홀로 남은 사람이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믿음을 줍니다.

가수 비, 곧 정지훈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삶을 막살아버리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침대를 뒤집어엎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의 편지와 통장이 발견되었습니다. 엄마는 이 통장의 돈을 남기기 위해 짐이 되지 않으려고 어쩌면 먼저 하늘나라로 가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에 자극받는 비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이것이 '기억'의 힘입니다.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기억하려 할 때 오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의 느낌을 되살립니다. 그래서 자존감을 주고 살아갈 힘이 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세우시며 "나를 '기억' 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파스카의 기적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 기둥을 세웠습니다. 우리의 '미사'(전례)와 '기도'는 바로 이 '기억'을 위한 거룩한 장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다섯은 슬기로웠고 다섯은 미련했습니다. 그 차이는 단 하나, '기름'을 준비했느냐의 여부였습니다.

이 '기름'은 무엇일까요? 이 기름은 바로 '기억'입니다. 더 정확히는,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기억'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에너지를 잃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의 귀한 자녀인데, 어떻게 저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라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편지’로 자신을 기억하게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방식으로 그 기억이 되살아나게 하십니다. 추운 겨울밤, 방안에 온기를 지펴주던 연탄불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연탄불을 보면, 한겨울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일어나, 그 차가운 연탄을 갈아내시던 어머니와 어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기억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제 가슴을 데우는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습니다. 그 온기가 바로 제가 오늘을 살아갈 '사랑의 에너지'가 됩니다.
 
그런데 부모가 나를 가장 사랑한 표징은 ‘밥’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밥일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박철민 씨가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어머니가 해 주셨던 음식들을 셰프들이 한 것을 먹고는 어머니가 생각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합니다.
 
잊혀지기를 기다렸다가 또 기억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미련한 처녀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규칙적으로 하여 기름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미련한 처녀는 구체적으로, 아침기도는 하면서 '저녁 기도'는 생략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만약 아침기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녁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은, 등불은 가졌으되 기름을 채우지 않는 '미련한 처녀'의 모습입니다.

왜 저녁이 중요합니까? 창세기는 하루의 완성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창세 1,5)고 말합니다.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요 기준입니다. 우리의 죄는 대부분 '저녁'에, 즉 하루의 에너지가 다 떨어졌을 때, 하느님의 자녀라는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저녁때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면, 그 기름을 밤을 밝은 대낮처럼 잘 지내게 할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시간도 바로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 오후 세 시였습니다. 그분은 하루가 저무는 가장 어두운 시간에 당신의 피로 '기억'의 기름을 우리에게 쏟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복음은 우리 자신을 향한 경고입니다.

 "너는 너의 등불에 아침저녁으로 기름을 채우고 있느냐?" 

우리는 모두 인생의 '저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죽음'이라는 문 앞에서 신랑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기도는 물론이요, '저녁 기도'로,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기름을 채워 넣을 때, 우리는 미련한 처녀처럼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슬기로운 처녀처럼, 우리의 따뜻한 '기억'(기름)이 담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며 당당히 그분께 나아갈 것입니다.

지금 이 미사 중에,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의 차가운 심장을 성령의 '온기'로 채워주시도록 청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내가 왕년에’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이런 말을 듣다 보면, ‘노인은 반성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일수록 ‘내가 왕년에’라는 식의 말을 자주 하면서라고 자기를 반성하기보다 내세운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도 ‘그렇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반성합니다. 
 
이렇게 ‘왕년에’를 많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지금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을 불행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계속 과거의 시간에만 머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럴까요? 아마 미래의 시간에도 분명 만족스럽지 않다고 말하는 지금을 떠올리며 ‘왕년에’,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지금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도 습관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이 아닌 다른 시간을 탐내는 것입니다. 
 
습관은 계속 반복함으로 인해 생기게 됩니다. 제가 새벽형 인간이 된 것도 오랫동안 반복해서 생긴 결과입니다. 처음부터 새벽형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과거를 말하는 것도 계속해서 그 시간만을 바라보려 하기에 습관이 된 것입니다. 
 
습관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시간이고, 나에게 딱 맞는 시간임을 계속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연연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지금 힘차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죽은 모든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 예외 없이 맞이할 죽음을 생각하며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 지금껏 살아온 생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그럴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뇌를 측정해 보니, 심장이 멈추기 전 30초 동안 과거를 회상할 때 나타나는 뇌파 활동이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과연 그 30초 동안 어떤 과거를 떠올릴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제서품을 받을 때, 제대 앞에 엎드립니다. 하느님과 교회 앞에 완전히 자신을 내어놓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때 주마등처럼 저의 삶이 떠올려졌습니다. 어떤 삶일까요? 감사한 일들, 사랑받았던 일들이 마구 떠올려졌습니다. 눈물이 계속 나왔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나인데….’, ‘이렇게 죄 많은 나인데….’ 그런데도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 직전에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금을 잘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기억을 계속해서 만들어야 합니다. 후회하는 삶, 과거에 연연하는 삶, 걱정하는 삶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은 끊임없이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안주하지도, 안일하지도 않으면서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모두 나에게 주어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단풍이 지는 것은 끝이 아니라 돌아감입니다. 나무의 품으로, 땅의 품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는 여정의 완성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지만, 기억과 사랑은 그 한계를 넘어섭니다.

소중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를 현재 속에 다시 불러들이는 행위이며, 그리하여 죽음조차 사랑의 기억 앞에서 무력해집니다. 위령의 날은 삶의 의미를 새롭게 성찰하는 은총의 날입니다. 이 시간은 죽음을 통해 생명을 배우는 사랑의 날입니다. 사랑은 죽지 않습니다.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생명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묵상할 때,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 깊이 사랑해야 함을 배웁니다. 위령의 날은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희망의 날이며, 소멸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를 묵상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빛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긴 결과로서의 온전한 평화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우리의 슬픔은 기도로, 이별은 사랑으로, 죽음은 안식으로 변합니다. 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그리움과 사랑, 눈물과 기도를 봉헌합니다.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사랑이 머무는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삶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마태오복음 25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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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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