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3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9,1-5)
 내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4,1-6)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로마 9,1-5
오늘 제1독서
내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형제 여러분,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2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5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루카 14,1-6
오늘 복음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2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4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5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6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31일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31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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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아는 길
얼마 전 교리 교사 한 명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제가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칠 자격이 있을까요?”  
신앙에 대한 확신도 없는데, 주일 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냐는 물음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예전에 제가 교리 교사를 할 때가 생각났습니다. 그때 보좌 신부님에게 저도 정말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신부님! 저는 아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기가 너무나 힘들어요.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저도 잘 모르는데!” 
그때 신부님이 요한 1서 4장의 내용을 들려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형제를, 자매를, 주일 학교 학생을,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모든 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구절에 얽매이는 모습을 봅니다. 이들은 사랑보다는 규정을 지키려고 합니다. 안식일의 본뜻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였다면 사람들도 사랑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어두운 일반 백성들을 ‘땅의 백성’(암 하아레츠)이라고 낮추어 보았습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을 사랑하는 데 쓰지 않고, 잘난 체하는 데 쓴 것입니다.
우리도 스스로 되물어 봅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는 바리사이들처럼 자신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재고, 사랑을 줄 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 대하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은 언제나 정당하다.
오늘 복음은 지난 월요일 복음, 그러니까 루카복음 13장 10-17절의 내용과 거의 같습니다. 다르다면 13장에서는 회당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시고 오늘 14장에서는 바리사이 집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신 겁니다. 
오늘은 바리사이가 주님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 것인데 저는 여기서 왜 바리사이가 주님을 초대하였고 식사대접까지 한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더욱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뒤 그에 대해 비판적인 회당장을 주님께서 묵사발 만든 얘기를 틀림없이 들었을 텐데 그럼에도 다시 수종 병자를 주님 앞에 있게 한 것은 무슨 의도인지 생각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서술만 보면 바리사이에게 나쁜 의도가 있는 것 같지 않고 주님의 말씀도 그를 크게 나무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리사이는 주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바리사이는 주님께 식사 대접을 하고 있고 오늘 복음을 보면 아무런 불만의 표시가 없습니다. 식사는 싫어하는 사람하고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특별한 호의나 사랑이 있을 경우 식사에 초대하잖아요?   
그렇다면 주님도 호의를 가지고 초대에 응하신 것이고 하신 말씀도 나무람이라기보다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실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시고 누구에게나 그에게 맞게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주님은 바리사이에 대해 무조건 적대감을 가지시고 당신의 복음 선포와 사랑에서 이들을 포기하거나 배제했을 것 같지만 결코 피하거나 포기치 않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마주치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에 대해 간절한 사랑을 드러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한때의 자기처럼 죽어라 하고 주님을 거부하는 그들을 위해 자기가 저주받고 그리스도에게서 배척될지라도 뭔가를 하고 싶어 합니다. 아무도 포기치 않고 한두 번의 노력으로 포기치 않는 바오로의 사랑은 바로 오늘 주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얼마 안 되는 사랑은 한두 번 애써서 효과가 없으면 포기해 버리지만 진정한 사랑과 큰 사랑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지요. 부모 특히 어머니가 끊임없이 잔소리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지치지 않는 엄마의 사랑이 지치지 않고 잔소리를 하는 거지요. 사실 잔소리하지 않는 엄마는 엄마가 아니고 그래서 돌아가시고 나면 그 잔소리가 그립잖아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나무람이 아니고 사랑이고 가르침인데 그렇다면 어떤 가르침입니까? 안식일의 본질에 대한 가르침이요 본질적인 가르침입니다.  
안식일이 본래 사람을 살리는 날이라는 가르침이고, 무엇을 하든 본질적으로 판단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미워죽겠다고 제게 고백할 때 저는 종종 그러면 그가 정말 죽었으면 좋겠냐고 본질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면 밉기는 해도 죽기는 바라지 않는다고 펄쩍 뛰지요.  
복음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듯이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마땅한지 죽이는 것이 마땅한지 이렇게 근본적으로 보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마땅하지요. 사랑이 사랑이기만 하면 사랑은 언제고 정당하고 언제나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할 수 있는데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과 같다.
낙엽이 하늘에서 내려와 발길에 밟힙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낙엽”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낙엽은 나에게 / 살아 있는 고마움을 새롭게 해주고, 
주어진 시간들을 / 얼마나 알뜰하게 써야 할지 깨우쳐준다. 
낙엽은 나에게 / 날마다 죽음을 예비하며 살라고 넌지시 일러준다. 
이승의 큰 가지 끝에서 / 내가 한 장 낙엽으로 떨어져 
누울 날은 언제일까 헤아려 보게 한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 내 사랑의 나무에서  
날마다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 나의 시간들을 좀 더 의식하고 살아야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하시게 되었는데, 수종을 앓는 사람이 그분 앞에 있었고,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루카 14,1). 
이는 마치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동원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사실, 이전에도 ‘손 오그라든 환자를 치유하신 장면’(루카 6,6-11)과 ‘허리 굽은 여인을 치유하신 장면’(루카 13,10-17)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것을 올가미에 걸어 체포하려고 결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함정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그런데, “그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루카 14,4). 왜냐하면, 이 치유를 인정하면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대한 전통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요, 인정하지 않으면 이웃의 불행에도 자비와 선행을 베풀지 않는 비정한 인간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고, “수종을 앓는 이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셨습니다.”(루카 14,4).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은 죽이는 것과 같고, 할 수 있는데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과 같음을 깨우쳐주십니다.  
한편, 요한복음사가는 ‘벳자타의 병자를 치유하신 장면’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렛날에 완결된 창조활동과 동시에 완성을 위한 끊임없는 구원활동을 지속하심을 말해줍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은 ‘주일’이라 해서, 마냥 게으르기 쉬운 우리에게도 경각심을 심어줍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4,3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주님!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안식일 율법 앞에서도 
올가미를 씌우려  
지켜보고 있는 이들 앞에서도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합당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합당한 까닭입니다.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사랑스러운 까닭입니다. 
당신은 늘 살아계시기에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듯 
늘 사랑하시기에 사랑이시며  
사랑을 베푸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법에 너무 집중하면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찬미 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십니다. 율법 전문가들이 모인, 그야말로 '법'의 심장부입니다. 그런데 그분 앞에 '수종'(水腫)을 앓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습니다.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가, 법을 어기는가?' 그들의 머릿속은 '법'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법의 도사들이었습니다. 눈앞에 고통받는 생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법만 잘 지키면 하느님께서 좋아하실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그들이 침묵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를 "데려다가" 병을 고쳐주시고 "보내셨습니다." 법을 '생각'하는 이들은 얼어붙었지만, '사랑'만 생각하시는 분은 행동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강론의 핵심 주제입니다. 
"왜 법에 관심이 많을수록, 오히려 법의 정신을 잊어버리게 될까요?"  
우선 '법'이 왜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법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먹이를 찾아, 모였다 흩어지는 모기 떼에게는 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유지되려면 서로 간의 약속, 즉 '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수직과 수평의 사랑으로 나뉩니다. 나라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모든 사회의 법은 그 사회 일치의 중심을 향한 의무와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하도록 가르칩니다. 가정의 법은 어떻습니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그 근간입니다.
하느님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 '사랑'의 정도가 강할수록 더 강력한 공동체가 됩니다. 그 공동체는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지만, 그 희생을 통해 우리는 더 행복한 '소속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의 가정보다 더 많은 것을 내어놓으라 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하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수많은 실제적인 방법이 ‘법’입니다. 그런데, 그 법을 '속속들이 안다고' 해서 잘 지킬 수 있을까요? 법을 모르는 네 살배기 아이와, 법전을 통째로 외우는 법관 중에 누가 더 법을 잘 지킬까요? 운전을 오래 해서 교통법규를 잘 아는 사람이 교통법규를 잘 지킬까요, 아니면 교통법을 잘 모르는 초보자가 더 잘 지킬까요? 금융 사기범이 금융법에 대해 더 잘 알까요, 아니면 죄 안 짓는 철부지 아이가 금융법에 대해 더 잘 알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초보자나 아이가 법을 더 잘 지킵니다. 전문가들은 법을 '알기 때문에' 신호위반이나 과속을 해도 걸리지 않는 방법을 압니다. 자신들이 아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감옥에 가지 않을 만큼 법을 어기는 방법을 압니다. 혹은 그 법으로 타인을 감옥에 넣기 위해 법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충만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법'을 몰라도 법을 지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법을 지키는 '에너지', 즉 '부모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가정에서 해야 할 의무를 잘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을 알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법의 근간은 사랑인데, 그 '사랑'은 받아야만 채워지는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의 비극입니다. 그들은 '법'을 연구했지만, 정작 그 법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사랑을 '에너지'로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법을 '지킬 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법을 '지킬 힘'이 없는 대신, 법을 '판단할 힘'만 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레 미제라블’의 경우를 봅시다. 여기, '법'을 '생각'하는 사람의 정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베르' 경감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법'을 어긴 죄수였기에, 평생 '법'을 지키는 의인이 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는 법을 알았고, 법을 신봉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장 발장입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사랑'의 에너지가 고갈된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리엘 주교를 만납니다. 주교의 은그릇을 훔쳤음에도, 주교는 그를 '법'으로 고발하지 않고 '사랑'(자비)으로 덮어줍니다.
"이 사람은 내가 준 것입니다. 이보게, 내가 준 촛대는 왜 안 가져갔나?" 
장 발장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에너지를 '받았습니다'. 이 에너지가 그의 얼어붙었던 영혼을 녹였습니다.
자베르는 '법'을 알았기에, 시장이 되어 선행을 베푸는 장 발장을 '법'대로 체포하려 합니다. 그는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을 '법'의 이름으로 범죄자 취급합니다.
반면 장 발장은 '사랑'을 받았기에, '사랑'을 줍니다. 그는 '사랑'을 받지 못해 '법'의 사각지대에 버려진 '코제트'를 만납니다. 그는 코제트에게 '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받은 '부모의 사랑'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사랑'(에너지)을 받은 코제트는, '법'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타인을 사랑하고 용서할 줄 아는, '법을 지키는' 고결한 여인으로 성장합니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 장 발장이 자신을 평생 쫓던 자베르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사랑'으로 그를 살려 보내는 장면입니다. 자베르는 '법'만 알던 자신의 세계가, '사랑'이라는 더 큰 힘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받을' 에너지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법'을 어기지 못해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과 사회에 가장 큰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법’을 추종하던 자베르는 파멸했고, ‘사랑’만 생각한 장 발장과 코제트는 구원받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법은 그 사회를 만든 '부모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받아들여, 그 '부모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심할 때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좋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이고, 더 나아가 '하늘에 사시던 분'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만 '하늘의 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 교사들은 '법'을 배우느라, 그 법을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너지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법이 지켜지라고 주신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만 하늘의 법을 지키는 존재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법'을 배움으로써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너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사랑에 '순종'(응답)함으로써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미사는 '법'을 배우는 자리가 아닙니다. 미사는 '사랑'을 받는 자리입니다. 이 제대 위에서 쪼개어지는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나는 수많은 법을 다 외우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뜻을 따라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자리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할 때 그 가정에서 지켜져야 하는 법에서 벗어남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수많은 법을 공부하기보다는 그 모든 법을 잘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살아가면 됩니다. 법의 정신은 사랑이기에, 법을 지키게 만드는 힘은 법을 아는 것이 아닌 사랑을 받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 들어가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10미터를 똑바로 걷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 감고 걸어야 한다면 어떨까요? 두렵고 무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거리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여기서 눈을 뜨는 순간, 그 거리는 달라집니다. 실제로는 너무 짧은 거리이고, 감았을 때 어기적거리며 천천히 걷던 때와 달리 빠르게 뛸 수도 있습니다.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는 예입니다. 주님을 보느냐 보지 않느냐도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주님을 삶 안에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앞을 가리고 세상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불확실성에서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삶 안에서 느끼는 사람은 힘차게 이 세상을 삽니다. 주님께서 든든한 ‘빽’이 되시기에 삶 안에서 뛰어갈 수도 있게 됩니다. 
 
이를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주님과 함께하면서 집중하는 삶, 그리고 이 삶을 평소에도 살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만 “주님”이라고 외친다면, 주님께서 어디 계시는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내 옆에 계시지 않는다고, 그래서 아무런 응답이 없는 분이라면서 울부짖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시기에, 조금만 집중하고 함께하려고 노력한다면 삶 안에서 충분히 느끼고 또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당연히 자기 삶의 밀도를 달라지게 만듭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대해 논쟁합니다. 마침, 주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종은 몸이 붓는 병으로, 당시에는 불치병에 가까웠으며 율법적으로는 부정한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고치지 않는다고 해서 생명의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 14,3) 
 
병자의 치유를 하나의 노동으로 보고 있었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꾸짖음이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은 안식일이라고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은총은 인간을 향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으로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냐는 식으로 인간의 판단이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하려 하지 않고, 또 집중도 하지 않았던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은 주님의 사랑을 절대 볼 수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이 세상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왜 자신의 짧은 인생은 살펴보지 않고, 너 자신과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이 평화로운지 확인하지 않는가?(세네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연민과 사랑의 실천은 빛과 온기로 우리를 물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때를 따지지 않습니다. ‘생명’과 ‘관계’를 먼저 바라보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계산이 없고, 그분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의 우선성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사랑은 내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행동하는 결단입니다. 사랑이 안식일의 참된 완성입니다. 자비는 언제나 현재형이며, 사랑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핵심은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곧 가장 완전한 율법입니다. 율법은 참된 사랑을 담을 때 완성되고, 사랑은 고통에 응답할 때 참된 진리가 됩니다. 참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도 새로워집니다.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가장 좋은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에게 다가가는 자비의 손길이 바로 안식일의 핵심입니다. 진정한 안식과 공동체의 생명이 사랑의 실천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서로의 필요를 느끼고,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는 오늘 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병든 이들을 고치십니다. 우리들 삶도 규범보다 생명을 우선시하는 연민의 날 되십시오. 
루카복음 14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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