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11,29-36)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4,12-14)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로마 11,29-36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29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습니다.
30 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31 마찬가지로 그들도 지금은 여러분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도록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지만, 이제 그들도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32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33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34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35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36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루카 14,12-14
오늘 복음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3일
양두승 미카엘 신부
✚ 교황님 11월 기도지향 00:21
✚ 미사시작 00:36
✚ 강론시작 07:42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대가 없는 사랑의 성인, 마르티노
오늘은 ‘빗자루 수사’로 널리 알려진 마르티노 데 포레스(1579-1639년) 성인의 기념일입니다. 성인은 리마의 로사(1586-1617년) 성녀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산 인물로서 그 지역에서 함께 큰 사랑을 받는 분입니다. 두 성인 모두 참회와 기도의 삶을 살았고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정성을 다하여 돌봄으로써 페루 사회사업의 기틀을 놓았지요.
에스파냐계의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리마의 로사는 1617년 선종한 뒤 1671년에 클레멘스 10세 교황께서 시성하시어 아메리카 대륙의 첫 번째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스파냐계 귀족 출신의 기사와 유색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나 혼혈에 사생아였던 마르티노는 1962년에 이르러서야 성 요한 23세 교황께 시성되었습니다. 그 또한 살아 있을 때 이미 성인으로 여겨졌고 사람들의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는데도 리마의 로사 성녀보다 삼백 년이나 뒤에 성인품에 올랐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루카 14,12)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그에게 보답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가 대가와 보답을 바라는 셈법이 아닌 순수한 사랑에 이끌리기를 바라셨기 때문이겠지요.
마르티노 성인의 시성이 리마의 로사 성녀보다 늦었다고 하여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 또한 세상이 기준으로 삼는 시각과 셈법에 길들여질 수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보답이 필요없는 사랑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선행을 하면 그가 가난하기에 보답할 수 없는데 그래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뒤집으면 그가 보답할 수 있고 그래서 보답을 받게 되면 불행한 것입니까? 보답을 바라지 않았는데도 보답을 받게 되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 행복은 괜찮지 않을까요?
인간적으로는 보답을 바라는 사랑과 선행은 두 가지로 불행케 합니다. 첫째는 바라는 보답을 그가 주지 않을 때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런 사랑과 선행은 참사랑도 순수한 선행도 아니기에 불행합니다. 그러니까 그가 보답해 줄지라도 보답을 바라는 사랑과 선행은 그 자체로 참사랑과 순수한 선행이 아니기에 불행하다는 겁니다.
뭐든지 불순물이 있으면 값어치가 떨어집니다. 그런데 보답을 바라는 것은 결핍의 표시이고, 사랑의 결핍을 보답으로 채우려는 것이며, 결핍을 채우려다가 불순물로 채우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다른 것을 더 바랄 이유가 없습니다. 가득 찬 컵에 물을 더 부으면 넘칠 뿐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참사랑은 결핍이 없는 사랑이고 보답이라는 불순물이 전혀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보답을 바라지 말아야 할,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기 때문이고, 하느님 사랑만으로 충만하기 위 해서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면 보답을 바라지 않게 되기도 하지만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기 위해 보답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 무엇보다 보답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초심자에게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 멀기만 하기에 귀에다 속삭이는 인간 사랑으로 대신하려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의지적으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하느님 사랑을 영적 감각으로 느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물론 쉬운 것 아니고 한두 해 걸리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기에 평생의 호흡으로 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도 생활이고 영성 생활임을 다시 한번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2-13)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곧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초대의 대상으로 제시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신앙행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고통 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주었다.”(마태 25,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새로운 복음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이다.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분명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4,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생명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참사랑과 거짓 사랑 쉬운 구별법
우리는 가끔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구별하지 못해 상처를 입거나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없어지려면, 참사랑이 어떻게 행해지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은 늙은 왕이 세 딸에게 '사랑의 고백'을 요구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왕은 자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딸에게 가장 큰 보상을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첫째 딸 고너릴은 "말로 다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생명과 명예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왕은 흡족해하며 왕국의 3분의 1을 줍니다.
둘째 딸 리건은 한술 더 떠, "아버지를 사랑하는 기쁨 외에 다른 모든 기쁨은 저의 감각에서 죽은 것과 같다"라고 맹세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또 3분의 1을 줍니다.
그들의 고백은 정확히 아버지 리어왕의 시선에 맞춘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그 대가로 왕국을 보상받았습니다. 이제 왕이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 코딜리어의 차례입니다.
"너는 무슨 말을 하겠느냐?"
"아무것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보아라."
코딜리어가 마침내 입을 엽니다.
"저는 폐하를 제 의무(my bond)에 따라 사랑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저는 언니들처럼 남편을 두면서 제 사랑 전부를 아버지께만 바친다고는 맹세할 수 없습니다."
리어왕은 격노합니다. 그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행위'에 대한 '보상'을 주는 데 눈이 멀어, '의무'로 사랑을 고백한 코딜리어를 추방합니다.
"나의 행위는 반드시 내가 사는 세상의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것이 CCTV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CCTV가 많아서 범죄율이 낮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보이는 시선'에 얼마나 강력하게 지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지배받는 시선이 나의 부모일 수도 있고, 이 세상 누군가의 기대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내 안의 욕망, 즉 에덴의 '뱀'처럼 '너 자신이 기준이 되라'고 속삭이는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 CCTV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뱀의 소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 CCTV는 나에게 '의무'를 주는 나의 주인이고, 내가 사는 왕국의 왕입니다.
리어왕의 궁정은 이 '보상'이라는 세상의 CCTV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고너릴과 리건과는 다르게 코딜리어는 누구의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CCTV는 '하늘의 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땅의 왕(리어왕)이 아닌 하늘의 왕을 섬겼고, 하늘에 정해주는 이를 사랑해야 하는 의무만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하늘에 속한 존재임을 드러냈습니다. 리어왕이 두 딸에게는 쫓겨나서 결국 막내에게 향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가 나이가 많이 먹도록 참사랑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CCTV를 정확히 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3-14)
예수님께서는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할 때, 바로 그때 '너는 행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CCTV가 감지하지 못하는 행복입니다.
'금도끼 은도끼'의 정직한 나무꾼이 이와 같습니다. 그는 산신령이 내민 화려한 '보상(금도끼)'이라는 CCTV에 현혹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의 CCTV 앞에서 자신의 '진실(쇠도끼)'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은 그의 정직함에 감동하여 모든 것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해 솔직한 이들은 하늘의 보상을 받습니다.
성 니콜라오 주교는 가난한 세 딸을 돈 때문에 팔아넘겨야만 하는 한 아버지의 사정을 알고 몰래 지참금을 마련해 주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금 주머니를 던져 넣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어떤 감사나 보답도, 즉 세상의 CCTV에 찍히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하늘의 CCTV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산타 클로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코딜리어처럼, 하느님과 나 사이에 맺어진 '의무(bond)', 즉 하늘의 CCTV 앞에서 사랑하고 봉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CCTV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하늘을 위해 사는 사람, 하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참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고,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사람을 분별하고 싶거든 그 사람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면 됩니다. 세상의 CCTV는 우리를 기록하지 못할지라도 하늘의 CCTV는 우리를 똑똑히 비추고, '의인들이 부활할 때' 가장 큰 영광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동안 한 번만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누구의 시선 때문에 움직이는지. 세상의 시선에 휘둘리는 자는 결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냉전 시대에 미국과 구소련 두 나라가 벌인 치열한 우주 탐사 및 기술 개발 경쟁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최고의 인재만 모아서 수백만 달러의 돈을 들여 무중력 상태에서 쓸 수 있는 볼펜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잉크는 중력을 받아 떨어지면서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인데, 우주에는 중력이 없어서 잉크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소련에서는 어떠했을까요? 마찬가지로 그런 볼펜을 개발하고 있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구소련은 그런 볼펜을 개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연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연필을 통해 충분히 글씨를 쓸 수 있었고, 굳이 비싼 돈을 들여서 무중력 상태에서 써지는 볼펜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해결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사고를 닫아 버려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어려운 일로 만들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진실은 아주 단순하고 바로 옆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주십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을 내세워서 바라봅니다. 세상은 온갖 거짓과 불의로 우리를 계속 유혹해서 잘못된 길로 이끕니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루카 14,12)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사회적 ‘상부상조’의 관행이 있었습니다. 초대받았으면 나도 초대하는 것이지요. 또한 나중에 초대받을 것을 생각해서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결국 ‘사회적 투자’ 개념입니다. 이런 세상의 경제 논리를 반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익을 바라는 초대는 ‘자선’이 아니라 ‘거래’일 뿐이지요.
그래서 참 자선의 모습으로,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라(루카 14,13)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참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께 보답받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계산적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자선과 나눔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더 올바른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철저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철저하게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는 누구도 타인에게 그토록 잔인할 권리가 없다(빅터 프랭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우리가 베푼 잔치는 결국 우리를 초대하신 하느님의 뜨거운 잔치였음을 깨닫습니다. 참된 사랑은 되돌려 받는 기쁨이 아니라, 나눔 그 자체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보답이나 인정에서 오는 행복이 아니라, 사랑 자체로 충분한 행복입니다.
보답할 수 없는 사랑이 가장 순수한 행복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답 없는 사랑이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상은 행복을 보답과 동일시합니다. 인정받고, 보상받고, 결과로 확인되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길은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의 길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행복한 삶은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삶입니다. 신앙 공동체가 이 행복을 살아간다는 것은, 보답 없는 봉사와 기도의 삶을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참된 행복이 됩니다. 보답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며 사랑은 행복의 가장 큰 본질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사랑하는 행복한 오늘 되십시오.
로마서 11장 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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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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