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5/11/04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1. 4.
반응형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주님, 복된 가롤로 주교에게 심어 주신 굳센 정신을 주님의 백성에게 부어 주시어 교회가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저희도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참모습을 세상에 보여 주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1월 4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12,5-16ㄴ)
    우리는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4,15-24)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로마 12,5-16ㄴ
오늘 제1독서

우리는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6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7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8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10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11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13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16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4,15-24
오늘 복음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그때에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4일
도승현 베드로 신부

 

✚ 성 가롤로 보로메오 소개 00:06

✚ 교황님 11월 기도지향 01:19

✚ 미사시작 01:35

✚ 강론시작 08:27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하느님 나라의 보화를 찾는 사람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어떤 이가 한 말입니다. 믿는 이라면 당연히 그리 생각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시골에서 어르신 신자분들과 살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신부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냥 미소를 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비유를 통하여 세상에서 부요한 사람은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함을, 세상이 주는 만족에 길들여진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함을 보여 주시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이어야 우리 마음속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고,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사랑하여 그것을 꼭 붙듭니다. 그가 섬기는 주님께서 악을 싫어하시고 선을 사랑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면서 주어진 자기의 몫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웃을 시기하지 않고 이웃의 몫을 존중합니다. 독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로마 12,6-8).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가난합니까? 세상 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보화를 바라며 찾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옥에 갈 사람들!

그저께 위령의 날에 천당, 지옥, 연옥에 대한 나눔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하신데 지옥이 있겠냐고, 하느님께서 죄지었다고 지옥에 보내시겠냐는 나눔도 했습니다. 

제 생각에 천당과 지옥과 연옥은 이 세상이 아닌 저세상에 있는 것이지만 어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따른 구분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천당이라면 연옥은 ‘아직 천당’ 곧 아직 하느님과 함께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어떤 것입니까? 흔히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미 천당에 간 사람, 천당에 갈 아직 연옥에 있는 사람도 죄지은 사람들이지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가고 싶냐 그렇지 않냐 그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고 싶은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가길 거부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가지 않고, 우리처럼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가고 싶은 사람도 지옥에 안 갑니다.  

지옥에 갈 사람은 오늘 주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 잔치에 초대됐는데 그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밭을 사서 그것을 보러 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초대를 거절한 사람 겨릿소를 부려 보려고 가는 중이기에 갈 수 없다면서 거절한 사람, 방금 장가들어서 갈 수 없다며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께서는 지옥을 만들지 않으셨고 우리 인간을 지옥에 보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지옥에 갈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옥은 우리 인간이 만들고 우리 인간이 가는 것입니다. 우선 하느님도 천국도 믿지 않는 사람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신론자 중에는 하느님도 천국도 없다고 믿는 무신론자도 있지만 복음의 비유에서 얘기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도 있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란 하느님이 있건 말건 천국이 있건 말건 상관없습니다. 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더러운 영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복음의 더러운 영들은 이 세상을 더럽게 집착하여 돼지들 속에서라도 자기가 살던 곳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하다가 천국도 거절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들은 주님의 존재를 잘 알면서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천당에 가고 싶어 하고 하느님도 뵙고 싶어 하는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않고 언젠가 천국에 갈 사람들인 것은 틀림없는데 아직은 이 더러운 영들처럼 더럽게 세상을 집착하는 사람은 아닌지 그래서 집착의 지옥을 아직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닌지 성찰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초대받은 잔치, 응답하는 믿음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사람들은 먹는 것을 찾아다니는데 길들여졌습니다. TV에서도, 인터넷 주요 검색 창에서도 “맛 집”이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맛 집”에 차려진 음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혀의 유쾌함을 넘어서는 “참된 맛 집”을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대체 최상의 “맛 집과 음식”을 어디에서 맛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라는 “맛 집”에서 먹는 “천상 음식”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곧 “구원의 천상음식”을 먹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함께 초대되어, 바리사이 지도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큰 잔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잔치를 베푸시고 우리를 초대하신 분이 아버지 하느님이라면, 잔치에 사람들을 부르러 나간 “종”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종”이 잔치에 초대된 이들에게 잔치가 다 준비되었음을 전하지만, 그들은 초대를 거절합니다. 사실, 그들은 이미 초대에 약속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밭이나 가축을 샀고, 막 장가를 들었다는 핑계로 초대 약속 지키기를 거절합니다. 그들은 세속의 헛된 망상에 쏠려 이 귀한 초대를 거절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미 잔치 준비가 다 되었으나 초대에 약속한 이들이 준비가 되지 못한 까닭입니다. 아니,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역사에서 본다면, 이들은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바리사이들이요, 유대교 회당의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일을 핑계로 복음 사명을 도외시하는 우리의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곧 하느님의 초대에 일방적으로 불참을 선언하고 마는 우리의 완고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잔치는 초대된 사람들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결코 지연되거나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주인은 또 다시 “종”을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보냅니다. “고을의 한길”이 다양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면, “골목”은 소외된 사람들이 은밀히 다니는 길을 나타낸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도자들이 아니라 일반 평범한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 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초대합니다. 그들은 비록 인간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밭이나 소를 사지도 장가를 가지도 못했지만, 주인의 배려와 사랑에 응답하여 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은 또 다시 “종”을 “큰길”과 “울타리 쪽”, 곧 성 밖으로 보내어 그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오게 하라고 합니다. 주인의 ‘애타는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성 밖의 다른 민족들이 초대를 받고 잔치에 들어갑니다.

결국,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이 존귀한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의 호의를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몸소 따르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4,17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주님!
당신은 잔치 상을 차리시고
저희를 부르십니다.

당신은 준비가 되셨지만
저희는 마음이 딴 데 가 있습니다.

하오니, 주님!

지금 베풀어지는 당신의 사랑
당신의 호의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을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당신의 몸과 말씀으로 차린 음식으로 
제 영혼이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그가 형제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이유

찬미 예수님, 서기 64년, 로마 제국의 심장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9일 동안 계속된 대화재로 도시의 3분의 2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이재민이 거리에서 절규하고 있을 때, 황제 네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가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팔라티노 언덕 위 자신의 궁전 발코니에서 리라(Lyra)를 켜고, '트로이의 함락'을 노래하며 불타는 도시를 배경으로 시적 영감을 만끽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수만 명의 고통을 자신의 예술적 쾌락을 위한 배경음악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왜 그는 형제들의 마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읽지 못했을까요? 

네로는 이미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 불릴 만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의붓형제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했고, 여러 명의 아내를 살해하거나 유배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잔혹함의 정점에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준 '최고의 은인',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살해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런 괴물로 만들었을까요? 많은 학자는 그 원인을 그의 부모, 특히 어머니 아그리피나에게서 찾습니다. 아버지는 네로가 3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네로의 세상은 온통 어머니였습니다. 

아그리피나는 야망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삼촌이자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를 유혹해 결혼했고, 황제의 친아들을 밀어내고 네로를 황태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를 독살하고, 16살의 아들 네로를 로마의 주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양심, 즉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나에게 잘해주는 이(부모)에게 보답을 하여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신호를 배우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것도 마치 걸음마처럼 엄마의 칭찬으로 조금씩 발전시키는 하나의 능력입니다.

어린 네로가 어머니에게 그림을 그려다 주거나, 작은 선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 했을 때, 아그리피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녀는 아들의 작은 '보답'에 진심으로 기뻐했을까요?

아닙니다. 역사가 증명하듯, 그녀의 유일한 관심은 '권력'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작은 정성보다는, 아들이 얼마나 더 영리하게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지에만 몰두했습니다. 자기 외아들이 예술인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림 그릴 시간에 수사학 공부나 더 해라." 

"그런 사소한 일로 내 시간을 빼앗지 마라." 

아들은 지쳐갔을 것입니다. 나의 '최고 은인'인 어머니조차 나의 보답으로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를 기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네로는 타인을 기쁘게 하려는 노력을 포기합니다.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한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아니, 타인의 마음을 읽는 감정의 근육이 전혀 발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주고 황제로 만들어 준 어머니의 마음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불타는 로마 속에서 절규하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바로 이 '마음 읽기'에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잔치에 오십시오.' 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루카 14,16-18) 

한 사람은 "밭을 샀으니" 가봐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으니" 시험해 봐야 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 핑계들이 왜 그렇게 주인을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그들이 단지 바빠서 못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인의 마음'을 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연 주인의 마음은 무엇입니다. '기쁨'입니다. 자신의 풍요와 기쁨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는 손님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와서 먹고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미사에 초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잔치를 마련하시고, "와서 나의 기쁨에 참여해다오. 그것이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다"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그 마음을 읽지 못합니다. 그들은 주인의 '기쁨'보다 나의 '밭', 나의 '소', 나의 '아내'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주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지으며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분노합니다. 

"화가 난 그 집주인이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 데려오너라.'" (루카 14,21)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는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마음을 읽을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맺을 능력을 상실했기에, 그들은 네로와 같은 존재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마음 읽는 능력'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만약 네로처럼, 혹은 부모에게 버림받아 그 능력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 '김희아' 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의 절반 이상이 '불타는 듯한' 붉은 모반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녀를 고아원에 버렸습니다. 그녀는 평생 "왜 나만 이래야 해?"라고 절규하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부모와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기도는 "하느님, 제발 이 점만 없애주세요"였습니다. 

성인이 되어 점을 빼는 수술을 받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성당에 나아가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그런데 그 기도 중에 환시를 보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 김희아 씨 자신이 우는 것보다 '더 슬픈 눈물'이었습니다.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아, 저분은 나를 보며 나보다 더 아파하고 계셨구나. 나는 내 아픔만 생각했는데, 저분은 내내 나를 보며 울고 계셨구나.' 

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녀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수술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심합니다. 

"예수님, 이제 다시는 저를 위해 무엇을 청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만 하며 살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용서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최고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은인(하느님)'의 마음을 읽자, '형제(이웃)'의 마음을 읽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왜 이웃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왜 그토록 쉽게 관계에서 상처받고 넘어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십자가를 통해, 이 미사를 통해 얼마나 큰 은혜를 주셨는지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분께 '보답'하는 하루를 살고 싶어집니다. 그분을 기쁘게 해 드렸다는 마음(양심)에, 나도 기쁜 하루를 살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연습을 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내 곁의 남편, 아내, 자녀, 그리고 상처받은 이웃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이웃과 잘 지낼 수 없고, 이웃과 잘 지낼 수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미사 안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고 그분을 어떻게 기쁘게 해 드릴까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만으로도 그분은 기쁘실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들과의 관계는 저절로 다 풀립니다. 그들의 마음도 읽을 능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바둑의 최고 고단자는 몇 단일까요? 9단입니다. 그렇다면 무술인 태권도, 유도, 합기도의 최고 고단자는 어떨까요? 역시 9단입니다. 10단, 11단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 9단이 마지막일까요?(요즘에는 유도에서 10단까지 인정하는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 ‘9’는 자연수 중에서 가장 큰 숫자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0’은 어떨까요? ‘10’은 신의 영역에 있는 완전수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인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신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음을 옛날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요? 신은 인간이 만든 허상이라고 말하면서, 이제 모든 것은 인간의 영역에 있지 신의 영역에는 없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그런가요?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할 수 없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는 사람이 겸손하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또한 하느님과 함께하며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이겨내며 지혜롭게 살아갑니다. 
 
인간 최고의 영역도 하느님 앞에서는 별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겸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죽음 앞에서 더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이기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철저히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루카 14,15)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잔치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한 사람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큰 잔치’는 하느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먼저 초대받은 이들은 하느님의 약속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 백성, 특히 율법을 잘 안다고 자부하던 종교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초대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고, 양해만 구할 뿐입니다. 
 
밭을 사고, 겨릿소 다섯 쌍을 샀고, 방금 장가를 들었다는 변명을 합니다. 이 변명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일상적이고 또 합법적인 일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것이 하느님의 초대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의 초대를 가볍게 여긴 이들은 잔치에서 제외된다는 것, 즉 구원이라는 선물을 얻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면서 하느님 초대에 응답하고 있었을까요?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 뜻을 세상의 것보다 더 먼저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지식의 시작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다(성 아우구스티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닫힌 문을 여는 것이 사랑이고, 잃은 이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복음입니다. "가득 차게 하여라"는 명령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기까지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당신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는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사랑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의 잔치를 마련하십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의 보편성을 드러냅니다. 그 잔치는 구원의 기쁨, 사랑의 관계, 하느님과의 친교입니다. 잔치는 채워지고,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은 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집이 가득 차는 것은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랑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잔치상은 부유한 자의 식탁이 아니라 가난한 마음의 피난처, 버림받은 영혼의 안식처가 되십니다. 비어 있음은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을 맞이하기 위한 여백입니다.

권력, 지위, 재산이 아니라, 마음의 여백과 겸손을 가진 이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관계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오늘 되십시오. 사랑과 은총으로 채워지는 삶이 진정 충만한 삶입니다. 

 

 

 

로마서 12장 5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251104_오늘성경구절이미지.jpg
0.56MB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