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13,8-10)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4,25-33)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로마 13,8-10
오늘 제1독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형제 여러분,
8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9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루카 14,25-33
오늘 복음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5일
이상국 요셉 신부
✚ 교황님 11월 기도지향 00:20
✚ 미사시작 00:37
✚ 강론시작 06:0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사랑 외에는 빚지지 마십시오.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로마 13,8).
저에게는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이 사랑의 빚은 서로 주고받아도 좋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에 대하여 빚쟁이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사랑에 관한 한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말문도 열지 못할 것입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이렇게 아뢰는 길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따뜻이 돌보십니까? 허물로 누벼 놓은 제 어깨 위에 어이 이리 귀한 은총을 부어 주십니까?’
자녀가 부모에게 그렇듯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엄청난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넘치도록 사랑받았고 사랑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랑받을 사람, ‘참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끼리는 서로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악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쉬이 뉘우치고 돌아와 화해합니다. 우리 마음속 사랑이 그렇게 하도록 재촉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고 하였습니다(13,9 참조).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을 봅시다. 하느님의 눈으로 이웃들을 봅시다. 그리하여 우리 사이에 사랑만이 자리하게 합시다. 우리 서로 사랑의 빚쟁이가 됩시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13,8).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 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부정적인 자세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하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을 생각지 않고 죄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뭘 하다 보면 죄짓게도 되는데 죄지을 것을 생각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제일 큰 죄입니다. 위령의 날과 위령 성월 때문에 어제와 그제 지옥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지옥과 관련해서도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죄를 짓지 않으려 할 수 있는데 죄를 짓지 않는다고 천당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천당은 사랑해야 갈 수 있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느님 계신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 부모 자식 사이의 관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자식이 아무 죄짓지 않고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부모를 찾아뵙지 않으면 그것이 죄일 큰 죄이지요.
그리고 사실 아무리 죄짓지 않으려고 해도 죄짓고, 오늘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아무리 사랑해도 사랑은 끝이 없고 다 할 수 없어 사랑 빚쟁이이지만 그래도 사랑해야 그나마 죄짓지 않거나 덜 지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기껏해야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수없이 살인할 것이고 수없이 간음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면 죄짓지 않지요. 사랑하면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지요. 그러니 사랑하면 다 되는 것인데 왜 사랑하지 않을까요? 아니 그 이전에 왜 사랑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아마 사랑 절망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전에 몇 번 사랑하다가 실패한 경험이 내 안에 사랑 절망감을 심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러는 가운데 좌절의 고통과 두려움도 컸겠지요. 사랑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랑치 않는 나와 사랑할 수 없는 나를 보게 되는 고통과 두려움 말입니다. 그런데 뭐든지 첫술에 배부를 수 없습니다. 아니 욕심으로 하면 백 술로도 배부를 수 없습니다.
욕심 중에 제일 큰 욕심이 사랑 욕심입니다. 받는 것도 사랑을 제일 많이 받고 싶고 하는 것도 사랑을 제일 많이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사랑도 욕심으로 할 것이 아니라 겸손과 열망으로 해야 합니다.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것이 낫고 조금이라도 사랑함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작은 사랑에도 만족하고 감사하며 조금씩 사랑 열망을 일생을 통해 키워가는 것입니다. 너의 작은 사랑에 대해서 너에게 감사하고 만족하고, 나의 작은 사랑에 대해선 나에게 감사하고 만족하며.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오늘날,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하나”라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마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케케묵은 말이 되어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단지 그들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떨어진 것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종 권위가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의 권위’의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게 된 것일까요? 혹 자기 자신이나 재물이나 이윤추구가 차지한 까닭이 아닐까요? 가치관이 변해버린 이 시대에 우리는 대체 어떤 이를 스승을 모시고 싶어 할까요? 또한 무엇을 배우기를 바라고 있을까요? 참된 진리를 배우고자는 할까요? 오히려 이익을 추구하는 방편을 배우고자 열을 올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그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개의 동사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릅니다.
<첫째 동사>는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μισει)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세상의 일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 중에 더 궁극적인 가치를 앞세우고 더 우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앞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한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βασταξω)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짊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짊을 덜어주시기는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와 함께 오라는 말씀이요, 십자가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αποτασσεται)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 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으로 ‘바치다.’, ‘가납하다.’를 뜻합니다. 쓸 데 없거나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향하여’ 봉헌하는 것이요, 가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오니 주님, 제자인 저희가 당신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무엇보다 앞서, 항상 당신을 앞세우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4,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을 바라고
바로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관계를 통해야만 완성되는 인간
그리스 신화에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고 지하세계까지 내려간 오르페우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하는 능력으로 지옥까지 가서 죽은 에우티케아를 데리고 현실 세계로 올라옵니다. 그러나 지상의 빛을 보기 직전 '결코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법칙을 어기고 맙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오르페우스의 진짜 이야기는 그 '상실' 이후에 시작됩니다. 지상으로 홀로 돌아온 그는 깊은 절망 속에서, 에우리디케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지 못했던 그 순간을 평생토록 고통스럽게 되새깁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그 고통을 통해 정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는 에우리디케 외에 다른 어떤 여자의 사랑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그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대가로, '세상 모든 여인에 대한 자신'을 비워나가는 고통스러운 정화의 길을 걷습니다.
결국 그는 다른 여인들의 사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광분한 여인들(마이나데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임을 당합니다. 그는 한 여자를 얻기 위해 자신을 버리지 못했으나, 그 여자를 잃은 고통을 통해 평생 다른 모든 것을 버려가며, 마침내 자신의 죽음으로 그 사랑을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오르페우스의 비극은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이 완성된다"는 진리를 피로써 증명합니다. 설사 상실의 고통을 겪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낡은 나를 '죽이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나로 정화시키는 용광로가 됩니다. 이 이교도 신화가 보여주는 고통스러운 자기 정화의 여정은, 놀랍게도 사도 바오로가 신앙 안에서 처절하게 고백했던 우리 안의 영적 싸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정녕 저는 제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제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 아, 저는 정녕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신에서 저를 구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로마 7,15. 24)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나', '죽음의 육신'이 바로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보게 만든 '불안'이며, 에덴동산의 '뱀', 즉 '나 자신(Ego)'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내 안에 도사린 이 뱀, 이 끈질긴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형은 어떻게 집행됩니까? 그것은 바로 '관계 맺음'을 통해서입니다. 모든 관계에는 상대가 원하는 만큼 나를 죽여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 나의 시간, 나의 고집, 나의 자존심, 나의 '뱀'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비움'의 실천입니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나'는 죽어갑니다. 즉, 내가 용서하기 싫은 사람을 용서하는 그 순간이, 나의 '뱀'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이며,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공간이 넓어지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자기 비움'의 역설을 가장 강렬한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6)
이 말씀은 '자기 목숨'으로 상징되는 나의 가장 깊은 '자아'까지도,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 앞에서 기꺼이 비우고 내려놓으라는 촉구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나'를 비우지 않으면 상대를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하느님이야 어떻겠습니까? 관계란 마치 내가 버리는 무언가의 공간에 상대를 끼워 넣는 과정과 같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버려야, 비로소 그분 전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를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어떤 것도 되기를 원하지 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기 비움'의 관계 맺음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구약 요셉의 이야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부터 순수하고 착했지만,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형제들로부터 배신당하게 하십니다. 갖은 고난 끝에 마침내, 자신을 팔아넘기려 했던 형제들, 아니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 '원수' 같은 형제들을 만나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을 '축복'하는 장면이야말로, 한 인간이 '자기 비움'을 통해 '원수 사랑'이라는 관계의 정점에 도달하며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완성'되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은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즉 '십자가로 원수까지 사랑하며 나 자신을 죽여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오르페우스처럼 실패하고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내 안의 '뱀'을 보며 절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지치지 않아야 합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 당신을 위해 저희를 만드셨기에, 저희 마음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불안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불안은 '나'를 비우고 '당신'을 채려는 영혼의 몸부림입니다.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비워진 자리에 하느님과 형제들을 채워 넣는 '사랑의 관계'를 실천함으로써, 주님 안에서 정화되고, 자유롭고, 참된 완성으로 나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행성 중에 가장 뜨거운 곳은 어디일까요? 태양과 가장 가까운 수성입니다. 낮 기온이 자그마치 섭씨 430도에 달합니다. 지구는 천왕성, 해왕성만큼 태양에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수성만큼 가깝지도 않습니다. 태양으로부터 가장 완벽한 거리에 있는 ‘골디락스(Goldilocks)’, 즉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딱 적당한 상태에 사는 우리입니다.
정말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태양과의 거리만을 놓고 본다면, 지금의 평균 기온인 15도가 나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15도가 아닌 영하 18도 언저리가 맞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이 살 수 있는 적당한 온도를 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태양이 빛을 내지만, 지구 역시도 빛을 내고 있습니다.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고, 그 열로 뜨거워지고, 그 에너지를 다시 우주로 흘려보내며 빛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온도를 낼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행성처럼 태양에게 받는 열에너지로만 온도를 유지하려 했다면, 생명체가 살기 힘든 곳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 삶의 원칙을 깨닫게 됩니다. 받기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만 생각한다면, 이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나의 역할, 즉 나의 사랑 실천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는 길에 많은 군중이 함께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말씀과 행적에 사람들은 열광했던 것이지요. 특히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여기에 빵의 기적까지 행하시는 것을 보고 이분과 함께한다면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이 세상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끝까지 쫓아갈 기세입니다. 자기가 할 일은 그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따라가는데 조건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미워한다는 것은 감정적인 증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덜 사랑하다’ 또는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루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세상의 것보다 하느님 뜻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보다도 하느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자기 해야 할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당연히 해 줘야 한다는 식으로만 생각하고 또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고사성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전환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비움이며, 새롭게 되는 비움입니다.
소유의 방식으로는 그 어떤 것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소유가 아니라 따름입니다. 자신을 버릴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새로 태어납니다. 제자는 선택된 이가 아니라, 결단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버림은 비움을 통해 충만해집니다. 버림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버림 없는 신앙은 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사랑을 가로막는 우리의 자아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 버림입니다. 버림의 영성은 생명을 위한 신앙의 질서입니다. 하느님으로 다시 채워지는 비움의 오늘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버림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랑의 참된 결단입니다.
시편 112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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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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