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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1/01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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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서 다 함께 기뻐하세. 모든 성인을 공경하며 축제를 지내세. 천사들도 이 큰 축제를 기뻐하며, 하느님의 아드님을 찬양하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이 성대한 축제로 모든 성인의 공덕을 기리게 하셨으니 성인들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가 바라던 하느님의 자비를 풍성히 베풀어 주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1월 1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1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모든 성인 대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묵시 7,2-4.9-14)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 제 2독서
    (1요한 3,1-3)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태 5,1-12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묵시 7,2-4.9-14
오늘 제1독서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나 요한은 

2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4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9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10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 

11 그러자 모든 천사가 어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다가, 어좌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 말하였습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13 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1요한 3,1-3
오늘 제2독서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마태 5,1-12ㄴ
오늘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1월 1일
강선곤 임마누엘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20:55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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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십사만 사천 명과 구원의 참뜻

위령 성월의 첫째 날이자 모든 성인 대축일인 오늘 제1독서에 구원받을 이의 숫자가 나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잘못 이해되고 악용되는 한 부분입니다. 이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묵시 7,2)을 받아 구원될 사람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7,4)이라는 것이지요.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우는 유사 종교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구원받을 이가 소수이니 서둘러 자신들의 단체에 들어와 그 한정된 숫자 안에 들고, 또 거기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노력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풀이입니다. ‘십사만 사천 명’은 인류 전체에서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같은 구절에 나오듯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 곧 열두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구원된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이 ‘만 이천’이라는 숫자도 산술적 의미가 아니라, 완전함을 뜻하는 열둘에 천(충만을 뜻하는 십의 세제곱)을 곱한 숫자로서 참으로 많은 이가 온전히 구원되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더욱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7,9). 이들은 세상의 모든 민족과 언어권에서 나온 이들로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에 힘입어 삶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이겨 낸 사람들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3항에서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는 많은 신앙의 증인이 우리의 힘을 북돋워 주고 있다고 하시며 더 나아가 “이러한 증인들 가운데에 우리 어머니, 할머니, 또는 그밖에 사랑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옆집의 성인들’이라는 표현으로 널리 알려진 말씀이지요. 성인은 멀리 있는 이들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인인 내가 나아가야 할 운명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올해 모든 성인의 날 나눔을 위 둘 말씀을 가지고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먼저 하늘나라의 행복을 사는 성인의 삶을 가지고 나눔을 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모든 성인의 날에 행복 선언의 복음을 듣는 것은 모든 성인이란 하늘나라의 행복을 사는 사람은 모두 성인임을 알라는 뜻이고 그 하늘나라 행복을 이 세상에서 살면 우리도 모두 이미 성인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러므로 그 행복을 살면 되는데 관건은 살 줄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 세상에서 이미 삽니까? 말장난 같지만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하늘나라를 이 세상에서 사면 됩니다.  

To live the Happiness is to buy the heavenly Kingdom in this world.  

그리고 하늘나라를 사면 되는데 하늘나라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 없이 가난으로 사는 것이라고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니 모든 성인은 하늘나라를 사 지금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신앙의 선배들이고, 그들의 모범을 본받아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행복을 이미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감사송은 아름답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나약한 저희도 그들의 도움과 모범으로 힘을 얻어 활기찬 믿음으로 영원한 고향을 향하여 나그넷길을 서두르고 있나이다. 그들의 모범은 나약한 저희에게 힘이 되나이다.”  

다음으로 모든 성인은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사는 사람들인데 오늘 요한의 서간은 우리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고 합니다. 오늘 요한의 서간은 우리가 과연 하느님의 자녀라고 얘기하고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는 표현도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연’을 먼저 얘기하고 ‘이제’를 이어서 얘기하는 것이고, 과연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게 될 때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果然)이라는 한자어는 ‘알고 보니 정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과연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은 그전에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모르고 살았다는 뜻이고, 이제 알고 보니 정말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남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고, 성인들의 말도 거짓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실은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라는 세례의 뜻도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르고 살던 나, 애비도 모르고 살던 우리가 이제 하느님을 애비로 알게 되고 애비의 자녀로 살게 된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니 세례받아 신자가 된 우리는 이제 그리고 이미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사는 행복한 성인들입니다. 그런 줄 알고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말라.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성성’에로 나아가라는 강력한 호소를 듣습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권고 문헌’인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2)에서 “모든 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의 사명입니다.”(9항)라고 밝히셨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바로 이 ‘성성’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인 <요한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란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 7,14) 

구원에 이르는 길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부딪혀야 하는 수많은 시련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성성’은 언제나 ‘순교’의 형태를 띠기 마련입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의 손에 들려있는 ‘야자나무’는 바로 이 ‘시련에 대한 승리’를 상징한다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인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서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여기서, ‘성성’은 ‘신적 자녀 관계’로 드러납니다. 곧 ‘성성’은 우리의 생명 안에, 신적 현존이 더욱 명백히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 추구행위의 결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삶의 어떤 한 순간의 영웅적 행동에 의해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항상 계속되어지는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참된 행복”을 통해 ‘성성’이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나약성’과 ‘그분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함’ 외에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는 곳에서 실현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가난을 사는 일’입니다.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다른 어떤 것들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할 것입니다.

또 ‘슬퍼할 줄을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과 세상의 죄를 슬퍼하되, 자비 안에서 위로를 받고 기쁠 것입니다. 이미 깨어, 임을 바라보며 기도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온유해 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있어야 할 하느님 품에 이미 안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 외에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입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고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입니다.

오늘,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이토록 우리는 복된 삶에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의 성구를 새겨봅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성인으로 불리기를 바라지 말고, 참으로 성인으로 불리어지도록 먼저 성인이 되십시오.”(수도규칙 4,62).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도 '간절히' 원해야만 방법이 보입니다.

오늘은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그 이름을 알든 모르든,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모든 성인을 기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인이 되는 길', 곧 '참행복으로 가는 길'을 선포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놀라운 약속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그 즉시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된다는 보상의 약속입니다. 행복해지려면, 마음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으려면, 우리 마음속에 아주 근본적인 갈망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오늘 강론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정말로 행복해지고 싶다" 는 '간절한' 열망입니다. 오늘 강론의 제목처럼, 우리는 '행복하려는 만큼'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의 첫 기억은 할머니의 돌아가신 모습입니다. 어린 저에게 '죽음'은 엄청난 공포였습니다. 저는 그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불행하게 살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제 인생의 목표는 단 하나, '최대한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후회 없이 살고 나면,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꿀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잠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오늘'의 행복이 '매일의 죽음'(잠)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게 한 것입니다. 

덕분에 저는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행복'을 향한 갈망이, 저를 이 사제의 길로 이끌었고 지금의 제가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계속 더 행복해지기 위해 나아갈 것입니다. 

이 행복을 향한 갈망이 있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 내가 더 행복해지려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구나. 온유해져야구나. 자비로워지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구나.' 물론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모든 것이 '참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저처럼 '간절히' 행복을 원할까요?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무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그 갈망이 '간절'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행복을 막연하게 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문제에 빠집니다. 하지만 왜 우리는 성인이 되지 못할까요?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는 '지금의 적당한 행복'에 만족해버립니다. 둘째,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끊임없이 '남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행복'을 향해 단 한 걸음도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정한 '거짓 행복'을 향해 달려가면서, '오늘' 자신이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을 보십시오. 그의 '행복'은 '절대 반지', 즉 "My Precious"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미래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추구하는 '오늘', 그의 삶은 어떻습니까? 그는 햇빛도 없는 동굴에서 생선을 날로 뜯어 먹고, '스미골'이라는 호빗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흉측한 괴물로 퇴보합니다. 그의 '오늘의 행복 게이지'는 편집증, 불신, 증오, 고독으로 매일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영화 ‘시민 케인’의 주인공 '찰스 포스터 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미래 목표'는 '세상을 통제하는 것', '모든 사람의 사랑을 돈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목표를 위해 '오늘'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제너두'라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도 없는 거대한 궁전에 스스로를 유폐시킵니다. 그의 '오늘의 감정 게이지'는 '극도의 고독'과 '분노'를 가리켰지만, 그는 자신의 불행을 "주변 사람들이 나를 실망시킨 탓"으로 돌렸습니다. 

신화 속 '미다스 왕'은 '미래의 부'(황금)에 눈이 멀어, '오늘의 행복'(음식의 맛, 딸의 온기)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자신의 불행을 깨달았습니다. 

골룸이나 케인, 미다스 같은 이들이 왜 '오늘' 자신이 점점 더 불행해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을까요? 자신들이 믿었던 '행복의 목표'(미래의 반지, 미래의 통제, 미래의 황금)를 너무나 철저히 맹신한 나머지, 자신의 '오늘의 감정 게이지'가 '절망'과 '고독'을 가리키고 있어도 애써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불행하다"고 인정하는 대신 "저놈 탓이야"라고 남을 탓하며 자신의 불행을 외면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미래의 자녀 성공', '미래의 은퇴 자금'이라는 목표를 좇느라, '오늘' 내 영혼의 행복 게이지가 '불안'과 '공허'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애써 무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묻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참행복'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까?" 

막연하게 "행복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골룸처럼 '미래의 쾌락'을 좇습니다. 그러나 '참행복'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오늘의 행복'에 집중합니다. 

이 '막연한 원함'이 '간절한 갈망'으로 바뀌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바로 '죽음'이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하여, 내가 좇던 '미래의 행복'이 신기루였음을 깨닫는 '바닥 체험'(Rock Bottom)의 순간입니다. 제가 어릴 적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꿀잠'이라는 '오늘의 행복'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이 '바닥 체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바로 '시민 케인'처럼 모든 것을 가졌던 사람, 레프 톨스토이입니다.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최고 작가의 '명예'를 얻었고,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부자'였으며, 건강한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는 골룸이나 케인이 좇던 '미래의 목표'를 모두 성취했습니다. 그러나 50세가 되었을 때, 그의 '오늘의 행복 게이지'는 '절망'과 '공포'로 바닥을 쳤습니다. 그는 ‘고백록’(A Confession)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내가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건강하고 행복한 가장이었지만, 내 삶이 멈추었고 숨을 쉴 수 없음을 느꼈다. ... 나는 밧줄이 걸린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고, 총을 가지고 사냥에 나가지 않으려 했다. 자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케인처럼 '남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오늘의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이 절망의 원인이, 제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 앞에서 모든 '미래의 목표'(명예, 부)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 절망의 순간, '참행복'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답을, '미래'를 좇는 귀족들이 아니라, '오늘'을 묵묵히 살아가는 '농부'들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들은 '오늘' 씨를 뿌리고, '오늘' 가족을 사랑하며, '오늘' 하느님을 신뢰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 즉 '성인'이 되려는 사람은, '미래의 헛된 목표'가 아니라 '지금 나의 행복 수준과 감정'을 매일 챙깁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전,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제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스스로 '점수'를 매기는 습관을 가졌었습니다. 100점 만점에 80점, 90점... 그렇게 '오늘의 행복' 점수를 매기던 시절, 저는 잘못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어느 순간 그 '오늘의 점검'을 멈추었습니다. 저조차도 '미래의 성공', '신자들에게 더 인정받는 사제', '더 큰 영향력'이라는 '거짓 목표'들을 바라보느라, 정작 '오늘' 저의 '행복 게이지'가 뚝뚝 떨어져 가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하려는 사람은, '오늘'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하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참행복 선언'은, '미래'에 받을 상이 아니라, '오늘' 당장 행복해질 수 있는 8가지 방법입니다. 가르멜의 성녀 소화 데레사는 '위대한 성인'이라는 '미래 목표'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목표는 "오늘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오늘의 행복 게이지'를 매일 점검했습니다.  

"오늘 마주치는 저 심술궂은 수녀에게 미소를 주었는가? 오늘 하기 싫은 빨래를 사랑으로 했는가?"  

이 '오늘의 행복'(사랑의 실천)이 매일 쌓여, 그녀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성인 중 한 분이 되었습니다. 이 '오늘의 행복 점검'이 왜 우리를 성인으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이고 강력한 현대의 예가 있습니다. 바로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AA) 모임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미래의 완벽한 금주'가 아닙니다. 그런 '미래 목표'는 너무나 거대해서 오히려 '오늘'을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오늘 하루(One day at a time) 술을 마시지 않고 평온하게 잠자리에 드는 것" 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오늘의 행복'입니다. 

그들은 이 '오늘의 행복'(평온)을 지키기 위해, 매일 밤 잠들기 전 '자신의 감정 게이지'를 철저히 점검합니다. 12단계 중 10단계가 바로 "우리는 계속 자신을 성찰하여 잘못이 있을 때마다 즉시 시인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 마음이 불편한가?', '오늘 누군가를 미워했는가?', '오늘 정직하지 못했는가?'를 묻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분노, 원망, 거짓말, 죄책감을 해결하지 않으면, '오늘 밤'의 행복(평온)이 깨지고 다시 술을 찾게 됨을 뼈저린 '체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밤 꿀잠'을 자기 위해, 필사적으로 '오늘' 용서를 청하고('자비로운 사람들'), '오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며('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노력합니다. '미래의 성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밤'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오늘의 행복'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내 편’, ‘네 편’이라는 말을 씁니다. 여기서 ‘편(便)’은 사람 인(人)에 고칠 경(更)이 더해진 글자로 ‘편하다’라는 뜻을 지닌 글자입니다. 특히 경(更)은 ‘두 개의 받침을 포개어 힘을 보태 굳건하게 만든다’라는 뜻에서 고치다, 개선하다, 다시 등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렇듯 ‘내 편’이라는 말 속에는 ‘나를 받쳐주는 힘’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 편은 나의 아군이자 열렬한 지지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편’이 누구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나의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부모나 자녀 그리고 친구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편인 줄 알았는데, 남의 편 같아 보일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배신감과 함께 분노까지 일어납니다. 그래서 남편이 ‘남의 편’이라는 이상한 해석도 하는 것 같습니다(원래는 편안한 남자, 그래서 동반자가 됩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진정한 내 편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를 성경의 저자들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내 편이시다’라는 말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님을 내 편으로 모신 사람들, 그리고 내 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품고 지금을 기쁘게 살아갑니다. 진정한 내 편은 주님뿐입니다. 
 
오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로,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입니다. 모든 성인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요? 바로 하느님을 내 편으로 굳게 믿었고, 내 편이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철저하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을 직접 뵈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는 성인들처럼, 우리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그 행복은 세상의 기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이었고, 하느님 편이 아니라면 선택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모두가 세상을 내 편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을 내 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행복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의 모든 성인을 기리는 오늘, 성인들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을 내 편으로 모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분만이 진정한 내 편입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가치 있는 행동을 하지 아니한 날, 그날은 잃은 날이다(자콥 보바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가을의 단풍이 땅으로 떨어져 생명의 거름이 되듯, 모든 성인들의 삶도 세상 속에 참된 사랑을 남겨 다음 세대의 신앙을 키웠습니다.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의 위대한 작품입니다. 성인들의 삶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둡니다. 성인들은 자신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우선시했습니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의미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성인들은 비범한 기적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살아냈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 안에 당신의 사랑을 새기신 살아 있는 복음서입니다. 그들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한계와 연약함을 지녔지만, 그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성인들의 삶은 철저히 공동체적 삶입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성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세상을 위한 사랑의 봉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깊은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으로 복음을 써 내려간 복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사랑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복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성인의 길은 우리 안에 깃든 사랑의 가능성을 깨우는 거룩한 초대입니다. 우리 또한 자신을 비우고, 세상의 찬란함이 아닌, 하느님의 빛으로 물든 이들이 됩시다. 저마다의 일상에서 뜨겁게 사랑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 사셨던 모든 성인들의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요한1서 3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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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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