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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0/27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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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0월 27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8,12-17)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3,10-17)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로마 8,12-17
오늘 제1독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2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3,10-17
오늘 복음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27일
정찬웅 루카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54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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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나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너그럽게

부제품을 받기 직전이었습니다. 손목 관절의 뼈들이 으스러졌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생살을 째고 뼈를 끄집어낸 다음, 그 뼈에 철심을 박아 다시 집어넣었으니 안 아플 리가 없습니다.

 밤새도록 끙끙대다가 겨우 눈을 잠깐 붙였다가도 저절로 눈이 떠졌습니다. 온몸에 고통이 들이닥쳤기 때문입니다.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를 하다가도 어디까지 하였는지 잊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나오는 기도는 ‘제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손목에 있는 흉터를 보면 그때가 생각납니다.

오늘 복음에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나옵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습니다. 상상해 보니 몹시 괴롭고 불편할 듯한 모습입니다. 이 여자가 바란 것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제가 수술 뒤에 통증이 빨리 사라지기를 빌었던 것처럼, 자기가 겪는 아픔이 사라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 여자에게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 모습을 본 회당장이 분개하며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자기 아들이나 딸이었다면, 또는 자기 자신이었다면 그렇게 말하였을까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13,15)라고 하십니다. 자기들은 안식일을 제멋대로 지키면서 다른 이에게는 너그럽지 못하고 매몰차게 구는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늘 ‘다른 이’와 ‘나’를 나누어 생각합니다. 다른 이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럽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엄격하고 다른 이에게 너그러운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성 생활이란? 그리고 영적으로 건강한 삶이란? 

영성 생활(Spiritual Life)이란 무엇인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오늘 독서와 복음은 놀랍고도 중요한 단서를 알려줍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오늘 로마서는 성령도 얘기하고 우리 영도 얘기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에게 뭔가를 증언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밖의 성령과 우리 안의 영이 각기 있으며 서로 조응(照應)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밖의 영이 성령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병마가 있고 복음의 다른 곳에선 악령도 있고 더러운 영에 관해서도 얘기합니다.  

그리고 우리 밖의 영만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영도 하나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육의 영과 기도와 헌신의 영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이 가르침을 볼 때 건강한 정신이나 영은 병마는 물리치고 성령과 조응하는 기도와 헌신의 영입니다.  

반대로 우리말의 썩어빠진 정신에 해당하는 육의 영은 악령이나 더러운 영과 조응합니다. 제 생각에 오늘 복음의 병마에 시달린 여인은 악령이나 더러운 영에 의해 병이든 사람인 것 같은데 악령이나 더러운 영에 의해 침범받게 된 것은 그녀가 그것들을 물리칠 만큼 그의 정신이나 영이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면역력이 강한 건강한 사람은 웬만한 균의 침입을 막아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온갖 균에 전염되듯 그녀의 정신이나 영도 약하고 건강하지 못했기에 악령들을 물리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한 정신과 영은 사실 악령만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조그만 악도 견딜 힘이 없어서 고통과 두려움을 직면하지도 물리치지도 못하기에 그저 도망치기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은 물론 죄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여기서 말하는 악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고통과 죽음을 우리는 악으로 경험하는데 우리의 기도와 헌신의 정신이 우리 안에 모셔 들인 성령 때문에 사랑 충만한 사람은 어떤 고통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감수하고 감당할 수가 있으며 악령들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영성 생활이란 기도와 헌신의 영으로 성령을 모셔들임으로써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자는 삶이요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덕분에 이것을 깨닫고 감사드리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 강론을 올리지 못합니다. 전화도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 주 일요일 또는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안식일의 참된 의미, 해방의 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려 허리가 굽은 여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루카 13,12)

그 여인이 치유를 간청하거나 믿음을 고백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의 ‘말씀’과 ‘안수’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께 대한 분노를 안식일에 몰려든 군중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율법위반으로 단죄합니다.

<신명기>(5,12-15)와 <탈출기>(20,8-18)에 따라, 안식일에 노동할 수 없다는 구실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한 일은 치유를 받았을 뿐, 노동을 한 것은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신 활동도 ‘말씀’과 ‘안수’ 밖에 없었고. 치유자체는 하느님의 권능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회당장은 치유를 하느님이 이루신 해방으로 보지 않고, 인간적 노동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치유를 하셨지만, 회당장은 그것을 율법위반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정신은 <탈출기>(20,8-11)에 따르면, 선행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행을 멈추고 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안식일은 장차 있을 휴식의 표상으로, 죄의 짐을 지지 말고 선행을 쌓아 미래의 안식을 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회당장은 병마에 묶여있던 여인처럼, 문자(율법)에 묶여있고 질투(어둠과 죽음)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실, 그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 그가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예수님께서 찬양받는 것에 대한 질투였습니다. 그는 질투에 묶여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위선자라고 질책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루카 13,16)

이처럼,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더라도 가축을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날인 ‘안식일’에 아브라함의 병든 딸을 고쳐주시는 것을 당연한 일, 아니 반드시 해야 할 일로 여기셨습니다. 생명을 바로 세우고 살리는 일,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의 정신이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통하여 안식일의 정신을 실현하시고, 하느님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이를 본 군중처럼,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루카 13,17)하며, ‘허리 펴진 여인’처럼, 우리 주님 “하느님을 찬양”(루카 13,13)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3,16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주님!
꺾인 제 영혼에 
당신 손을 얹으소서.

악행을 멈추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소서.

무거운 등짐을 내려놓고
하늘을 우러러 
찬양하게 하시고
당신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사는 법

※ 공지: 화요일과 수요일 복음 묵상은 추계 사제연수 관계로 쉽니다. 너무 자주 쉬어 죄송합니다 ^^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당당하고 자유로운 한 분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그것도 모두가 지켜보는 회당 한가운데서, 18년 동안 허리가 굽은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이 행동은 당대의 종교적 규범과 공동체의 암묵적인 룰을 정면으로 깨트리는, 그야말로 '눈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회당장이 분개하며 나섭니다. 그는 예수님께 직접 대들지는 못하고 군중을 향해 소리칩니다. "일할 날이 엿새나 있으니, 그런 날에 와서 병을 고치시오!" 이 말은 사실 예수님을 향한 비난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며 "이 위선자들아!" 하고 호통치십니다. 

"너희는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이러 가면서, 18년이나 묶여 있던 이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이 당당함, 이 자유로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왜 예수님처럼 살지 못할까요? 우리는 왜 늘 다른 사람의 시선에 갇혀, 그들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눈치' 보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처럼, 나의 생존을 그들에게 맡겨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없다면 형제들이 부모가 됩니다. 

우리가 남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단 하나,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공동체에서 쫓겨나지 않아야, 미움받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Asch)는 이것을 증명하는 유명한 '동조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은 간단합니다. 한 사람의 피실험자를 7명의 연기자 사이에 앉히고, 명백히 답이 보이는 선의 길이를 맞추게 했습니다. 처음 몇 번은 모두가 정답을 말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7명의 연기자가 일제히 명백히 '틀린 답'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의 눈으로는 A가 정답인 것이 확실한데도, 공동체(다른 7명)가 모두 B라고 말하자, 피실험자는 괴로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이 결국 자신의 눈(진실)을 버리고, 공동체의 '틀린 답'(거짓)을 따라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바보라서가 아닙니다. 이 공동체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찍혀 배척당할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생존 본능'이, 진실을 보려는 이성보다 더 강하게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눈치'의 메커니즘입니다.

그런데 이 '눈치' 보는 삶이 일상이 될 때, 우리는 '가스라이팅'에 빠져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주인공 '노라'의 삶이 바로 그 비극을 보여줍니다.

19세기 말, 노라의 '사회적, 경제적 생존'은 전적으로 남편 '토르발'에게 의존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남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만 했습니다. 토르발이 자신을 "내 귀여운 종달새", "작은 다람쥐"라고 부를 때마다, 노라는 그 '인형'이 되어 재롱을 부렸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남편 토르발은 그런 아내의 의존적인 모습을 "여자는 남편에게 의지해야 아름답다"고 칭찬하며, 그녀의 독립적인 자아를 억압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서운 '가스라이팅'입니다. 노라는 '생존'을 남편에게 맡긴 대가로, '눈치' 보는 인형이 되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비극은 단지 문학 속에만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자신의 생존을 '하느님'이 아닌 '사람'에게 맡겼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왕권 유지가 '백성들의 지지'에 달려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 후,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백성들이 탐내는 좋은 가축들을 살려둡니다. 사무엘이 그를 질책하자, 사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백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1사무 15,24)

'백성의 눈치'를 보다가 '하느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생존을 하느님이 아닌 공동체에게 맡겼을 때, 그는 왕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버림받게 됩니다.

본시오 빌라도는 어떻습니까? 그는 예수님이 무죄라는 '진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생존'은 유대 지방의 안정과 '황제의 신임'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는 군중의 눈치를 봅니다. 바로 그때, 군중은 그의 약점을 파고드는 가스라이팅을 시전합니다.

"그 사람을 풀어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친구가 아닙니다!"(요한 19,12)

결국 빌라도는 '진리'가 아닌 '생존'을 택합니다. 그는 군중의 눈치를 보며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은 손을 씻으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노라, 사울, 빌라도... 이들 모두가 자신의 생존을 '공동체'에게 맡겼기에 눈치를 보았고, 결국 자신을 잃거나 진리를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어떻게 그토록 자유로우실 수 있었습니까? [인형의 집]의 노라처럼, 그냥 그 공동체를 박차고 떠나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노라가 집을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참된 보호자'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는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돌아갈 곳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존은 회당 공동체나 율법학자들에게 의존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생존과 정체성은 오직 '아버지 하느님'께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가 '부모'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는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참된 부모'가 없으면, 우리는 '형제'들을 '부모'로 착각하고 그들에게 생존을 의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그들의 눈치를 보는 노예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눈치 보지 않고 사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내 생존이 다른 누군가에게, 영원하고 절대적인 분에게 확실히 맡겨져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해리 포터] 이야기가 바로 이 과정을 보여줍니다. 고아인 해리는 이모인 더즐리 가족에게 얹혀삽니다. 그의 '생존'(음식, 잠자리)은 전적으로 이 '형제 같은' 공동체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벽장 속에서 그들의 눈치를 봅니다.

더즐리 가족은 해리에게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합니다.

"네 부모는 쓸모없는 인간들이었고, 너는 정상이 아니야."

해리는 이 공동체 안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해그리드가 찾아와 폭탄선언을 합니다. 

"너는 마법사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너의 '참된 부모'는 너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위대한 영웅들이었다."는, 그의 '참된 정체성'을 알려준 것입니다.

자신이 '짐'이 아니라 '사랑받은 존재'였음을, 자신의 생존이 '희생'이라는 값을 통해 이미 보장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더즐리 가족의 모든 협박과 가스라이팅이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해리를 괴롭힐 수는 있었지만, 더 이상 해리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는 없었습니다. 해리에게는 덤블도어라는 '참된 보호자'와 호그와트라는 '참된 공동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회당 공동체는 더즐리 가족처럼 예수님을 "안식일도 모르는 이상한 자"라고 가스라이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정체성과 생존은 이 땅의 공동체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는 절대적 보호자를 둔 아들은, '형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형제'들이 얼마나 위선에 빠져있는지, 그들의 규칙이 얼마나 생명 없는지를 꿰뚫어 보고 그들을 꾸짖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생존은 어디에 맡겨져 있습니까? 직장 상사의 눈치, 자녀의 눈치, 배우자의 눈치, 심지어 본당 공동체의 눈치를 보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을 '부모'로 착각하고, 그들에게 내 생존을 맡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은 나의 '형제'이지, 나의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부모', 우리의 영원한 생존을 보장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입니다.

다니엘 예언자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거대한 공동체가 "왕 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진다"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생존'을 걸고 협박한 것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어떠했습니까? 그의 생존은 페르시아 왕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께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공동체의 눈치를 보며 기도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을 열어 놓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자기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다니 6,11)

그의 보장이 하느님께 있었기에, 그는 사자 굴이라는 공동체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미사를 봉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미사는 '해그리드'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너는 세상의 눈칫밥을 먹는 고아가 아니라, 내 아들 예수가 목숨을 바쳐 구해낸 나의 자녀다!"라는 '참된 정체성'을 확인받는 시간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 나의 생존이 세상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께 보장되어 있음을 깨달은 사람은,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더 이상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안식일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995년 3월, 일본 도쿄 지하철 3개 노선에서 옴진리교 신도들이 맹독가스 사린을 살포해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13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의 부상자가 나왔지요. 단일 종교 단체가 저지른 범죄 중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옴진리교의 최종 목표가 ‘국가 전복’이었고, 신도들은 이 결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984년 아사하라 쇼코가 설립한 옴진리교는 처음에 요가, 명상 수련 등으로 일반인의 관심을 받았고, 교세가 확장되면서 사이비 종교로 변질되었습니다. 특히 1990년 초, 일본의 버블 붕괴 후 오랜 경기 불황과 사회적 혼란이 있었는데, 이때 교주는 “이 세계는 썩었고, 진실을 아는 우리는 곧 탄압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국가 전복을 꿈꿔왔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내가 아니라 네가 잘못되었다.”라면서,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면서 폭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1995년의 그 사건 하나만 있지 않았습니다. 현재에도 이런 모습은 계속 나타납니다. 
 
나만 맞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고 따라서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나만 맞을 수 있을까요? 또 나만 맞기 때문에 틀린 사람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어떻게 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사는 세상에서 함께 사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땅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 소외되고 위축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손을 얹으십니다. 이에 곧바로 일어나 하느님을 찬양하지요. 이는 단순한 신체적 치유를 넘어, 한 인간의 존엄성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느님 나라의 질서가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여기에 어떤 문제도 없어 보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한 여자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기쁨을 얻게 된 것이 어떻게 문제입니까? 문제는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했다는 율법 조항 위반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행위인 치유를 노동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 바로 나만 맞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을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보지 않고, 자기 판단만을 따르려고 한다면 예수님께 “위선자들아!”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위선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이 ‘원래’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로빈 로우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묶여 있던 아픔들은 풀어져야 합니다. 사랑의 시간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얽매인 이들을 풀어주는 자비의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인간 존재의 존귀함을 회복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사람을 일으키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사랑은 때를 가리지 않습니다. 율법을 넘어서는 참된 사랑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고통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 중요합니다. 치유의 행위가 바로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율법의 파괴가 아니라, 사람 안에서 실현되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안식일은 자비가 멈추는 날이 아니라 우리의 굽은 과거를 벗고 속박에서 풀려나는 자유의 날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완성은 속박된 이를 풀어 주는 하느님의 자비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 자비를 닮고 따르는 자비의 사람이 되십시오. 속박에서 풀어 주는 날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안식일임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오늘 되십시오.

 

 

로마서 8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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