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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0/26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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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0월 26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30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집회 35,15ㄴ-17.20-22ㄴ)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

  • 제 2독서
    (2티모 4,6-8.16-18)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8,9-14)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집회 35,15ㄴ-17.20-22ㄴ
오늘 제1독서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

15 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 

16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17 그분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 주신다. 

20 뜻에 맞게 예배를 드리는 이는 받아들여지고 그의 기도는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 

21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살펴 주실 때까지 그만두지 않으니 

22 그분께서 의로운 자들의 송사를 듣고 판결해 주신다. 주님께서는 머뭇거리지 않으신다.

 

 

 

2티모 4,6-8.16-18
오늘 제2독서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6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7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16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나를 거들어 주지 않고, 모두 나를 저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이것이 불리하게 셈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17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18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8,9-14
오늘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26일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양주 올리베따노 소개 00:20

✚ 미사시작 01:45

✚ 강론시작 17:08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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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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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주님께 드릴 나의 명함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한 다음 주고받는 것이 있습니다. 명함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때, 전화번호를 주고받기 불편할 때, 우리는 명함을 주고받습니다. 만일 예수님과 우리가 만난다면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적은 명함을 드릴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이야기를 하십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께 명함을 드렸다면,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요?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사이는 당당히 예수님께 이런 명함을 드렸을 것입니다. ‘의인,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바치는 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명함을 받아 넣고 다시 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멀찍이 서 있던 세리는 예수님께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인 명함을 드렸을 것입니다. ‘죄인, 세리.’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을 받으시고 그에게 당신의 명함을 주셨을 것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과 만나기 위하여 세상에 온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세리는 예수님의 명함을 들고는 가슴이 설레어 돌아갔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은 우리가 주님 사랑에 맞갖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 많고 약한 모습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명함에 이런 글들을 적고 싶어 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이’, ‘날마다 미사에 나가는 이’, ‘무슨 무슨 봉사를 하는 이’, ‘세상의 무슨 직함을 가진 이’라고 말입니다. 이번 한 주간 나는 주님을 만난다면 무엇이 쓰인 명함을 건네드릴지 생각하며, 겸손하게 한 주간을 지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겸손한 자만이 기도한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와 세리가 같이 기도하러 성전에 갔다고 합니다. 같이 성전에 갔다고 하지만 바리사이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리사이가 정말로 하느님 앞에 갔을까? 다른 하나는 기도했다고 하는데 정말 기도했을까? 제 생각에 바리사이는 혹 하느님 앞에 갔어도 자랑하기 위해 갔고, 자랑하는데 세리와 비교하며 자랑합니다.  

사실 모든 자랑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고, 그러니 그는 하느님 앞에 있었지만 하느님을 뵌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본 것이고 비교 대상으로서 세리를 본 것입니다. 이는 친구에게 갔는데 자랑하러 간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친구를 만나보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자랑할 상대를 찾아서 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는 하필이면 하느님께 자랑합니까? 왜 하느님을 자랑 상대로 삼은 것입니까? 물론 어떤 다른 사람에게 자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까지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만한 사람이 하는 것이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만한 사람이 거지를 붙잡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거지는 아예 무시해 버리고 말지 그에겐 자랑하지 않습니다. 무시하기에 어떤 상대로 여기지 않는 것이며 말도 섞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자랑 상대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뵈러 간 것이 아닌 자랑하러 간 거라면 기도한 것도 아닙니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진실한 대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도는 세리가 하였습니다. 세리는 비록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눈을 들어 하느님을 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오롯이 하느님을 만나 뵌 것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입니다. 그는 바리사이에게 곁눈질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리고 오롯이 하느님만 뵙니다. 하느님을 뵙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고, 자비를 청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리는 가난하기도 하고 겸손하기도 하며 그러했기에 세리는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단언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있는 것, 이것이 겸손이며 기도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오늘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 평화방송 연중 제30주일 강론(루카 18,9-14): 수사님들 숙소 마련을 위한 모금 강론 -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가을이 익어갑니다. 들판에는 잘 익은 곡식이 고개를 깊이 떨구고, 거리에는 가로수 잎들은 떨어져 내려와 뒹굽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겸손의 계절입니다. 낙엽처럼 내려가기를, 이삭처럼 고개 숙이기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보시기에 나는 겸손할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벤시라는 ‘겸손한 이의 기도가 구름에까지 올라가리라’(집회 35,20-21 참조)고 말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합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위대하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늘나라에는 자신을 위한 의로움의 화관이 마련되어 있음을 말합니다.’(2티모 4,8 참조). 그런데 나는 ‘의로움의 화관’을 차지할 수 있을까요?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 

그런데 과연 나는‘오늘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사실, 오늘 <복음>인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루카 18,9)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 세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 뭐가 서로 다른 걸까요? 무엇이 이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걸까요? 

그것은 그들은 ‘눈’입니다. 그들은 바라보는 ‘마음의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우선,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한편에는 ‘자신이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다른 한편에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보는 눈’이 있습니다. 곧 ‘자신을 높이는 바리사이의 눈’이 있고, ‘자신을 낮추는 세리의 눈’이 있습니다.

또, ‘타인을 보는 눈’도 서로 달랐습니다. 한편에는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이 있습니다. 곧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바리사이의 눈’이 있고,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세리의 눈’이 있습니다.

그리고 ‘눈이 향하는 곳’도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을 향하여’ 있었고, 세리는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곧 ‘마음의 눈’이 하느님을 향하여 있기에,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은혜를 구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수도승이 ‘서원’을 할 때에는 먼저 서원대상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수사님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그러면 서원 대상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더욱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그렇습니다. 수도승은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동행’이 아니면 결코 갈 수 없는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길은 ‘여러 동료들’과 ‘기도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라야 갈 수 있는 길이기에 ‘공동체에서’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수도자는 “하느님의 자비”와 많은 분들의 “기도”를 먹고 살아갑니다. 동시에, ‘기도하는 이’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자비를 입었기에 자비를 베풀면서 가야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끊임없이 기도에 사로잡힌 사람’이고자 하는 열망으로 살아갑니다. 

저희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2016년에 의정부교구의 승인을 받아, 현재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이제 ‘아홉 살’ 된 약하고 어린 수도원입니다. 

저희는 ‘기도하고 일하고 읽어라’(기도, 노동, 성경읽기; 렉시오 디비나)라는 세 기둥을 중심으로, 한 곳에 ‘정주’할 것을 서원하고 살아가는 ‘수도승들’입니다. 그러기에, 수도원 밖에서 하는 ‘사도직’은 없습니다. 단지,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하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정신에 따라서, ‘손님환대’를 통하여 수도원 내에서 사도직을 수행합니다. 그러기에 재정적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가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수도원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9년 전에 네 명의 수도승들로 시작하였고, 그 후 한 명은 미얀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꾸렸습니다. 현재 저희는 회원 수가 세 배로 늘어나 9명이 함께 살게 되었고, 작년부터는 ‘수도승들의 방’이 모자라 세탁실을 숙소로 개조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숙소가 부족하여 한 명의 ‘종신서원자’는 아직 ‘손님집’에 기거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곧 미얀마에서 3명의 수련자가 합류하게 되는데, 그들을 맞이할 ‘방’이 없는 실정입니다.

사실, 이는 성소자가 줄어들고 있는 지금의 교회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행복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다급한 처지이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삼가 도움을 간청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가련한 처지를 헤아려주시어, 부디 뜻있는 분들의 도움을 간청 드립니다.

저희 수도승들은 비록 부족하고 보잘 것 없지만,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여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이 되고자 애쓰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미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사람, ‘끊임없이 기도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도움을 주실 분들’께서는 ‘기도 내용’과 함께 연락을 주시면, 잊지 않고 ‘미사’와 ‘기도’로 함께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복음>의 반향을 되새겨 봅니다.

과연 나는 세리처럼,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사도행전>에서는 코리넬리우스가 베드로 사도에게 천사의 말을 전해줍니다.

“코리넬리우스야, 하느님께서 너의 기도를 들어 주셨고 너의 자선을 기억하고 계시다.”(사도 10,31)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8,13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제 자신을 보고
당신 안에서 타인을 바라보게 하소서.

타인의 존귀함을 볼 줄을 알게 하시고
제 자신의 가슴을 칠 줄을 알게 하소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진정 제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오니
당신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살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참된 예배와 거짓 예배, 그에 따른 참된 감사와 거짓된 감사

오늘 우리는 성전에 올라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 당대 최고의 신앙 엘리트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세리, 민족의 반역자이자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 모두 주일 미사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결론은 충격적입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 다 똑같은 미사에 참례했는데, 어째서 한 사람은 '의롭게 되어' 돌아가고, 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갔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이 두 사람의 예배, 이 두 사람의 행복을 갈라놓은 것입니까? 

오늘 복음은 단순히 기도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사람의 '예배 방식'이 달랐음을 지적합니다. 예배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의 행복해지는 방법은 ‘비교’를 통해서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 어느 시대보다 풍요롭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 불행한지도 모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비교' 때문입니다.

SNS를 열면,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해 보입니다. 나보다 더 좋은 곳에 가고, 나보다 더 좋은 것을 먹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절망합니다. 이러한 현대의 불행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의 행복 방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의 기도를 보십시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의 행복은 '비교 우위'에서 나옵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만난 적이 없기에, 오직 남보다 낫다는 것을 확인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비교 행복'에 중독된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천사가 서로 질투하는 두 상인 앞에 나타나, 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단, 조건이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구하든, 옆의 상인에게는 그것의 두 배를 줄 것이다."

만약 집 한 채를 구하면, 옆 상인은 두 채를 갖게 됩니다. 금 100냥을 구하면, 옆 상인은 200냥을 갖게 됩니다. 천사의 제안을 받은 상인은 밤새도록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은 좋지만, 저 인간이 나보다 두 배 더 부자가 되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긴 고민 끝에 상인이 마침내 천사에게 소원을 말했습니다.

"제 눈 한 쪽이 보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래야 옆 상인의 두 눈이 멀게 될 테니까요. 이것이 바로 바리사이의 예배, '비교 감사'의 실체입니다. "저는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라는 기도는, "저 세리의 두 눈을 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저주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그리고 이 '비교 감사'의 예배는 우화 속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고 반드시 공동체를 파괴하는 비극을 낳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 '거짓된 감사'가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낳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세일럼(Salem) 마을'에서 일어난 '마녀 재판'의 광풍입니다.

당시 세일럼 마을 사람들은 신대륙에 거룩한 '언덕 위의 도시'를 세웠다고 자부하던 독실한 청교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성전에 모여, 자신들이 타락한 유럽의 구교도나 방탕한 자들과 같지 않음을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바로 '선택받은 바리사이'였습니다.

그런데 1692년 겨울, 마을 목사의 딸과 조카딸이 알 수 없는 발작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들은 원인을 밝히지 못했고, 마을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것은 악마의 짓이다! 우리 거룩한 공동체 안에 마녀가 숨어있다!"였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하기에 자신들의 고통은 다른 누군가의 탓이었던 것입니다.

재판관 존 해손과 같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마녀'나 '악마의 하수인'들과 같지 않음을 하느님께 감사하며, 자신들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이웃들을 심판대에 세웠습니다. 불과 몇 달 만에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발당하고, 20명의 무고한 생명이 교수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적 예배자들의 모습입니다.

반면, 세리는 어떠합니까? 그는 '비교'하러 성전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외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세리는 남보다 더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교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자신의 존재를 구원해 줄 '자비'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습니다.

가수 '비', 정지훈 씨는 수백억, 어쩌면 수천억 원의 재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평생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백억을 버는 것보다, 돌아가신 어머니 품에 한 번 안겨보는 게 소원입니다."

그에게 '어머니의 품'은 100억, 1000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입니다. 세리가 성전에서 찾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과 명예와도 바꿀 수 없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안아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품'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핵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미사는 '비교 우위'를 확인하러 오는 자리가 아니라, '비교 불가능한 지위'를 선물 받으러 오는 자리입니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천민 아이’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그 기둥은 아들에게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어머니의 자비' 그 자체였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으신 어머니의 희생을 만난 것입니다. 이 소년이 미사에 온 우리와 같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 서는 이 제대는 우리를 위한 '사람 기둥'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그분의 '자비'가 영원히 서 있는 기둥입니다.

어머니가 기둥이 되어 아들이 '사무라이'라는 지위를 얻었듯, 하느님께서 친히 십자가라는 기둥이 되셔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라는 비교 불가능한 지위를 선물하셨습니다. 창조자를 만나 받는 이러한 지위는 지상의 모든 가치들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누가 쓰레기를 많이 모았다고 부러워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굿뉴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지우'(설경구 분)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었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국적을 잃고 10년 넘게 '주민등록증' 하나 없이 유령처럼 살아갑니다. 그는 냉동 창고에서 일하며 온갖 고초를 겪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소원은 '주민등록증'을 되찾아 평범한 시민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영화 속 다른 인물들, 예컨대 젊은 조직원(홍경 분)이나 그를 이용하려는 국정원장 등은 더 많은 돈과 명예, 더 높은 지위를 원합니다. 그들은 '바리사이'처럼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더 높은 곳을 탐합니다. 하지만 주인공 지우는 다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이 무엇을 가졌든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그저 '국민'이라는 기본적인 지위, 주민등록증 하나만을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지위를 되찾았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잃었던 그 고통에서 벗어나 비로소 만족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사를 통해 얻게 되는 지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많은 돈과 명예를 비교하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이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라는, '천국의 시민'이라는 주민등록증을 받습니다. 이 지위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세상 그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 없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남과 비교하며 나의 의로움을 확인하러 왔습니까? 아니면 세리처럼, ‘하느님의 자녀'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위를 선물 받으러 왔습니까? 

미사가 끝나고 성당 문을 나설 때, 우리는 더 이상 밖에서 만나는 그 누구와도 나를 비교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돈이 없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건강하지 못한데..."라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늘 미사에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증을 받았다. 나는 하느님의 상속자다."라는 절대적인 감사와 자부심을 안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에 무조건 찬미하며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오늘 하느님을 참으로 만나고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미국의 유명한 자기 계발 작가이자 강연가인 데일 카네기의 말 중에서 “비난하지 말고, 진심으로 칭찬하라. 그리고 어떤 부탁도 다정하게 표현하라.”가 있습니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칙은 말의 겉모습만 신경 써서는 안 되고,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진정한 소통은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듣고 싶은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는 예의를 차리면서, 정작 가까운 사람에게는 마음을 놓습니다. 부모, 연인, 오래된 친구 등에게 ‘이 정도는 괜찮겠지.’ 라는 마음으로 툭 내뱉는 말과 행동에 큰 상처를 주곤 합니다. 가까울수록 더 단단한 신뢰가 필요하고, 더 섬세한 배려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는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아 보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말하고 행동합니다. 때로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불만의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도 표현하지 못합니다. 주님과 다정한 관계, 진정으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두 사람을 이야기하십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바리사이와 로마 제국을 위해 동족의 세금을 징수하며 부정을 저지르기 쉬워서 ‘공적인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세리입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기도’합니다. 하느님 앞에 떳떳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혼잣말로 하는 그의 기도는 하느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독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단식과 십일조를 이야기하면서, 적극적인 방식으로 자기 의로움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기도에는 자비와 용서가 전혀 없습니다. 
 
반면, 세리는 멀찍이 서서 기도합니다. 스스로 성소 가까이 나아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하느님 앞의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특히 그의 기도에는 바리사이와 달리 비교나 자기 공로의 나열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실상(죄인)과 하느님의 자비만 있을 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누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가냐는 것이지요.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 바리사이가 아니라, 자기 죄를 솔직히 고백한 세리가 하느님께 의롭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 은총을 받는 유일한 조건은 ‘자신의 한계와 죄를 인정하는 겸손(humility)’입니다. 이 겸손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과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다정한 관계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많은 이가 큰 행복을 기대하며 소소한 기쁨을 잃어 버린다(펄 벅).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떨어지는 단풍이 가리키는 것은 언제나 겸손한 생명입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만, 세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많은 말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심을 나누는 우리의 마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참된 겸손이 참된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를 진실하게 인정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교만의 허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 겸손은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듭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올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정한 기도는 타인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비교를 멈추는 것이 기도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닌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겸손한 기도가 우리를 진정 의롭게 하는 은총의 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길은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얼마나 맡겼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리는 성전에서 죄인으로 나아갔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새로운 존재로 귀환합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되찾는 참된 기도의 시간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리처럼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하며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를 따뜻이 받아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을 만나는 감사의 주일 되십시오. 맡겨드리는 것이 기도이며, 비워내는 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집회서 35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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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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