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 성령을 통하여 복된 데레사를 뽑으시어 교회에 완덕의 새로운 길을 보여 주셨으니 저희가 언제나 그의 거룩한 가르침을 따라 참된 성덕의 열망으로 불타오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2,1-11)
하느님께서는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모든 이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1,42-46)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로마 2,1-11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모든 이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1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3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4 아니면,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5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6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7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8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9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10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11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루카 11,42-46
오늘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43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45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15일
이동철 베드로 신부
✚ 예수의 성녀 데레사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7
✚ 강론시작 08:36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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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말한 것을 삶에서 지키기
우리는 고해성사를 볼 때 ‘저는 안 그러려고 하였는데 …….’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에 대하여 고해하기도 합니다. 본당에서 어울리는 사람들, 때로는 가족들이나 친한 친구들, 회사 동료들과 지내며 갈등을 겪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고해하면서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탓하게 될 때도 있지만, 자기 잘못은 없다는 듯이 상대에 대해서만 말하기도 합니다. 머리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함을 알면서도 결국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립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불행을 말씀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로는 정의와 사랑을 부르짖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당 문을 두드리는 사람 가운데는 예수님의 복음을 알아듣고 찾아오기보다는 신자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고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실망해서 다시 성당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는 말한 것을 삶에서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찾고 싶게 만드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과 의무
“너희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의무와 사랑> 오늘 복음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대한 계속적인 질책입니다. 십일조는 잘 내지만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이 말이 사랑은 없고 의무만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의무도 다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의무를 다하니 이것만도 칭찬받을 만하지요.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칭찬은커녕 이것을 나무라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왜 나무라시는 것일까요?
첫째는 의무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 때문입니다. 자기는 의무를 다했으니 할 것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우쭐하고, 다른 사람은 의무를 하지 못하니 아무것도 안 한 거라고 업신여기는데 교만 보다는 숫제 의무를 못하더라도 겸손한 것이 낫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의무를 다한 것으로 자기는 의롭다고 자처하는 것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께 해야 할 의무를 다한 것으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다한 것만으로 의로운 건 아니고 이웃에게 해야할 것을 다 해야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이웃에게 불의하게 하며 의롭다고 할 수는 더더욱 없다고 하십니다.
셋째는 아무리 의무를 다했다고 해도 사랑을 다한 것이 아니기에 할 바를 다했다고 자만하고 으스대는 것을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 말씀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이고 이웃 사랑도 이에 못지않다. 사랑이 없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의무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불행선언 세 가지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정결법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혀주셨습니다. 이어서 여섯 가지의 예를 들어가면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에게 불행선언을 통하여 신랄하게 질타하십니다. 그러나 이 질책은 저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에로 부르는 더 강력한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에서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 세 가지와 율법 교사들에 대한 불행선언 한가지 입니다.
<첫째>는 십일조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형식주의와 맹목적인 태도를 질타하십니다.
구약의 레위기(27,30-33)와 신명기(14,22-29)에는 곡식, 포도주, 기름과 같은 주요 농산물과 기축에 대한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아주 사소한 것에까지 세분화하였고, 심지어는 뗄 나무까지도 십일조를 바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규정 이상으로 열성적이고 철저하고 엄격했던 반면, 율법의 정신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정의를 행하는 일을 실천하지는 않았습니다.’(루가 11,42). 이에 예수님께서는 단지 질책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십니다.
“십분의 일을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이것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루카 11,42)
이는 예수님께서 철저한 율법준수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만큼 율법의 정신에 대해서도 철저해라는 요청입니다. 산상설교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도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준수를 질책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결여된 율법준수를 질책하시며, 동시에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파괴자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시키시는 분이셨습니다(마태 5,17)
<둘째>는, “너희는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찾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루카 11,43)고 질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두 가지 면모, 곧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찾는” 교권적 교만, 특권적 우월의식, 과시욕과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세속적 명예욕입니다.
<셋째>는 바리사이들을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다”(루카 11,44)고 질타하십니다. 구약의 <민수기>(19,16)에서는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무덤에 회칠을 하여 부정을 범하지 않도록 배려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 곧 표시하지 않는 무덤’처럼, 자신들의 부패를 눈으로 볼 수 없도록 은폐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넷째>는 율법 교사들에 대한 첫 번째 불행 선언입니다.
“너희 율법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가 11,46)
언행의 불일치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은 율법보다도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존중했고, 더구나 그것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모세의 율법 외에도 613개의 규범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을 실행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는 짐을 지웠던 것입니다.
사실,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은 그 당시의 종교적 길잡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이요, 신앙의 참된 길잡이로 살아가라는 강력한 경각심을 일깨워줍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1,42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
제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당신을 믿으면서도
의로움과 사랑을
행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불의와 부패,
무관심과 냉대 속에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당신의 의로움과
당신의 사랑을 행함으로
진정한 행복을 얻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녀에게 사랑 받으려면 십일조를 가르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일조의 목적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가 그래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봉헌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자녀에게 봉헌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녀가 행복하게 살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가르친 사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어머니께서는 주일 미사에 갈 때마다 헌금하라고 50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왜 내 소중한 동전을 헌금함에 넣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성당을 빠져나와 그 돈으로 오락실에 가곤 했습니다. 그 50원으로 즐기는 게임이 하느님께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느껴졌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어떻습니까? 이제는 제 수입의 일부를 십일조로 봉헌하고 있습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어머니의 50원을 가로채던 어린 시절의 저와, 지금의 저 중에 과연 누가 부모님과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하고 있을까요? 답은 명확합니다. 봉헌이라는 사랑의 언어를 배우고 실천할 때, 우리의 사랑은 비로소 깊어지고 성숙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루카 11,42)
그들은 봉헌이라는 ‘행위’는 철저히 지켰지만, 그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봉헌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참된 목적은 무엇일까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봉헌을 통해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 참된 자존감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원래 주님의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일부를 돌려드릴 때, 우리는 돈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됩니다. 돈은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원래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는 모든 것을 바꾸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아버지와 사람들 앞에서, 그는 입고 있던 값비싼 옷까지 모두 벗어 던지며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저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 그는 재물을 봉헌함으로써, 돈이 주는 거짓된 안정감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오는 참된 자유와 자존감을 얻었습니다. 돈을 잃었을 때 크게 슬퍼하지 않는 사람,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 바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입니다.
둘째, 봉헌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떳떳이 나아갈 수 있는 ‘의로움’의 표현입니다.
자녀가 평생 부모에게 받기만 하고 단 한 번도 감사의 선물을 드린 적이 없다면, 그 부모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을까요? 아마 죄스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하느님 앞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실제로 죄책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부모를 찾아뵙지 못하고 다리 밑이나 외딴 산속에서 숨어 사는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우리는 종종 듣습니다. 그들은 부모님께 용서를 청하고 싶지만, 닳아빠진 옷과 빈손으로는 차마 그 사랑 앞에 나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봉헌은 바로 이 부끄러움의 벽을 허무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물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그것은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랑의 증표가 되어, 우리를 ‘돌아온 탕자’처럼 아버지의 품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합니다.
셋째, 봉헌 곧 나눌 줄 아는 삶은 우리를 이웃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가수 비(정지훈)는 연습생 시절, 스승인 박진영에게 이런 조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조언을 철칙처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박진영은 갓 데뷔를 앞둔 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잘하려고 하지 말고 무대를 설치하시는 분들, 운전하시는 분들, 후배들에게 잘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정지훈 씨는 이 가르침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덕분에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받은 재능과 부를 이웃에게 나눌 때, 우리는 하느님께도 이웃에게도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봉헌이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만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왜 부모는 자녀에게 작은 심부름이라도 시키고 용돈을 주며, 때로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달라고 요청할까요? 자녀가 ‘내어주는 아픔’을 통해, 자신을 위해 평생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부모님의 ‘희생의 마음’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봉헌할 때 느끼는 그 작은 아까움, 그 작은 희생은 우리를 위해 외아들마저 내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그 엄청난 고통과 사랑을 아주 조금이나마 체험하게 하는 창문이 됩니다. 나의 작은 희생을 통해 이 말씀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은 비로소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자녀’의 신앙으로 성장합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존 록펠러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용돈을 줄 때마다 장부를 함께 주며 이렇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들아, 네가 받은 모든 돈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란다. 그러니 수입의 십분의 일은 반드시 먼저 떼어 하느님께 바치고, 나머지를 사용하거라.” 어린 록펠러는 이 가르침을 평생의 철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첫 월급 20달러에서 2달러를 떼어 봉헌했고,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서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수입의 십일조를 계산하여 봉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도 똑같이 가르쳤습니다. 그는 봉헌을 통해 자신이 돈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임을 고백했고, 그 믿음 안에서 더 큰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나눔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록펠러는 누구에게 가장 감사해했겠습니까? 그것을 알려준 어머니가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영국에서 3주간 마사지 수업을 함께 들은 부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가 흥미롭습니다. 배우자에게 마사지를 해준 사람과 마사지를 받은 사람 중에 누가 더 기쁘고 행복한가를 본 것입니다. 누가 더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마사지를 받은 사람이 더 행복했을 것 같지만, 결과는 똑같이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똑같이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받는 데에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자녀 사랑이 크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막상 자녀들은 그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자기를 간섭하고 힘들게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부모가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는 사랑은 느끼기 힘듭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주는 사랑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역시 똑같은 행복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결국 행복은 자기 의지만 확고하게 세운다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을 주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불행의 길로 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특히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종교 지도자들의 삶이 불행으로 가고 있음에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이 다른 사람까지 불행으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뜻은 잃어버리고 형식과 외적인 모습에만 치중했습니다.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2)
바리사이들은 십일조를 매우 철저하게 지켜서, 심지어 정원에서 나는 아주 사소한 박하, 운향, 채소 등의 십일조까지 계산해서 마쳤던 것입니다. 대단한 종교적 열심입니다. 이 열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율법의 가장 큰 정신인 정의와 사랑을 저버린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만과 명예욕, 그리고 숨겨져 있는 죄들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겸손한 삶이고, 자기를 온전하게 주님께 드러내는 마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반대인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온전히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작지만 “고맙다.”라는 말에는 마법이 들어 있다(아나스 로에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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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11장 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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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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