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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10/12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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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10월 12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8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일 군인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2열왕 5,14-17)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주님께 신앙 고백을 하였다.

  • 제 2독서
    (2티모 2,8-13)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 오늘 복음
    (루카 17,11-19)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2열왕 5,14-17
오늘 제1독서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주님께 신앙 고백을 하였다.

그 무렵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가 

14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나병 환자인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이 종이 드리는 선물을 부디 받아 주십시오.” 

16 그러나 엘리사는 “내가 모시는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결코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거절하였다. 그래도 나아만이 그것을 받아 달라고 거듭 청하였지만 엘리사는 거절하였다. 

17 그러자 나아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시다면, 나귀 두 마리에 실을 만큼의 흙을 이 종에게 주십시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2티모 2,8-13
오늘 제2독서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17,11-19
오늘 복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12일
서상범 티토 신부

 

✚ 국군중앙주교좌성당 소개 00:20

✚ 미사시작 01:27

✚ 강론시작 17:09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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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기다림에 응답합니까?

우리 삶에는 다양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월급을 저축하면서 내 집 장만을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은 즐거운 데이트를 하려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멀리 여행을 가면서 비행기나 열차를 기다리기도 하고, 회사에 출근하거나 학교에 가려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도 기다림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기다림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어 온 마음과 힘을 다하여 멀찍이 서서 소리를 지릅니다. ‘제발 살려달라.’고 ‘고쳐 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제에게 가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너희가 병이 나은 것을 확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 인사를 드리는 사람은 한 명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의 은사를 베푸시고 기다리셨는데, 응답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결하다고 욕하였던 사마리아 사람, 한 명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이 기다림에 응답하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삶이 힘들고 괴로울 때입니다. 병에 걸렸을 때, 금전적 어려움이 닥칠 때, 정신적 고통이 다가올 때,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올 때, 우리는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감사할 일이 있을 때입니다. 하는 일이 잘 풀려서, 자격시험에 붙어서, 고통이 사라져서 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의 이유로는 예수님을 자주 찾지만, 뒤의 이유로 예수님을 찾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기다림에 응답합니까? 모든 일에 주님께 응답하는 신앙인이 되겠다고 다짐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감사에 대하여

오늘의 주제는 감사입니다. 그런데 감사란 무엇이고 어떤 때 나오는 것일까요? 원하던 바가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을 때 그 은혜에 대한 보은이 아닐까요? 베트남에 가면 우리말의 감사에 해당하는 말이 ‘감온’입니다. 짐작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이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냐고, 곧 감은(感恩)이냐고 물으니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혜에 대해 보은하는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은혜를 입고도 유대 나환자들은 감사가 없습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아홉 전부가 그랬습니다. 집단적인 감사 부재요 집단적인 배은망덕입니다.  

그런데 같은 은혜를 입고도 왜 어떤 사람은 더 감사하고 어떤 사람은 덜 감사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감사할 줄 모를까요?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그 치유가 은혜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권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현상을 우리는 매일 같이 보며 살지요. 매일 그것도 지금까지 어머니가 밥해주고 빨래해 주시는 것은 하나도 고마워하지 않고 심지어 타박하는데 다른 사람이 어쩌다 한번 잘해 주면 그리 고마워하는 것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나 하느님 은혜를 알아드리는 것이 부모님이나 하느님을 위한 것 같지만 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왜냐면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처럼 은혜를 배반하거나 모르는 사람은 덕을 보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기에 자기 탓으로 불행하지만 은총에 감사하는 사람은 자신도 덕이 있고 남 사람 덕분에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덕이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하느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덕을 본 사람인데, 덕을 많이 그리고 잘 볼수록 덕이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른 이의 덕을 많이 봐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이의 덕을 하나도 보지 못해 불행합니다.  

그런데 우리말을 잘 보면, 사실은 은총을 못 받은 것이 아니고 은총을 많이 받아도 보는 눈이 없어 그 덕을 못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이 누구 덕을 보느냐입니다.  

덕의 원천인 하느님의 덕을 봐야지 인간의 덕을, 곧 내 덕이든 남의 덕이든 인간의 덕을 봐서는 덕 볼 일이 별로 없을 겁니다. 프란치스코는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극히 거룩한 덕들이여, 주님께서 당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여러분 모두를 지켜 주시기를!”  

모든 덕의 원천은 하느님이라는 말이고, 그러니 내가 보고 입은 덕을 찾아 올라가다 보면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어느 인간의 덕을 보고 그 덕이 어디서 왔는지 올라가 보면 하느님이 계십니다. 어느 의사 덕에 내가 살아났는데 그 의사 뒤에 하느님이 계시는 그런 식입니다. 오늘 주님께 치유를 받았는데 이방 나환자는 예수가 아니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 나환자는 병만 치유받고 끝났지만 이방 나환자는 치유에다 하느님을 만나는 구원까지 받습니다. 이럼으로써 유대인 나환자는 육신의 병만 치유받고 끝났지만 이방 나환자는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병까지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감사드려야 마땅한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주님의 치유가 못마땅하였기 때문일까요? 예를 들어 이방인도 같이 치유된 게 말입니다. 아니면 주님의 치유가 당연하였기 때문일까요?  

앞서 말한 대로 주님의 치유가 당연하게 되면 나의 감사는 당연하지 않게 될 것이고 구원도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불행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의 감사가 마땅하고 옳은 일이 되게 해야겠지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 순종 그리고 감사

오늘은 연중 2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과 ‘순종’, 그리고 ‘감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방민족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예언자 엘리야가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나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아만은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고 씻으라는 엘리야의 전달을 받았을 때 무시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화가 나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장군님, 만일 엘리야가 더 어려운 일을 시켰더라면 틀림없이 장군님은 그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 해 보시지요’라는 부하의 말을 듣고서, 마음을 바꿔 엘리야가 시키는 대로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치유를 입은 것은 말씀에 ‘순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돌아설 줄을 알고, 한없이 낮아질 줄 알며, 치유해주신 분께 감사할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감사의 표현으로 선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제2독서>에서 초대교회공동체에서 고백하던 찬미가(2티모 2,11-13)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음에서 되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선언하면서 그분의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음을 기억하고, 그분의 성실하심을 찬미하면서 복음에 대한 순명과 믿음의 행동을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사이의 어떤 마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이 소리를 높여 말하였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셨습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그들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사제들에게 가던 중에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마치 <제1독서>에서 나아만이 엘리야의 말을 믿고 순명하여 나병이 나았듯이, 나병환자 열 명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명하여 치유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제1독서>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혹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까닭은 아닐까요? 그래서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자비를 다 누리고 있으면서도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 아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왔습니다. 그러니,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입니다. 곧 믿고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니 나병환자 아홉은 비록 자비를 입고 치유는 받았을지라도 그들에게 구원이 선언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에게는 구원이 선언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자비를 입고서도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여전히 아버지의 집 문밖에 서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치유 자체가 아니라 은총을 주시는 분께 드리는 감사와 영광입니다. 곧 치유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다. 치유를 주시는 분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리는 겸손한 자세로 감사하며 흠숭을 드리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감사함이 곧 구원이 됩니다.

이를 우리는 오늘도 <미사경문 감사송>에서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구원의 도리요 길이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이 감사제를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이토록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7,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주님!
감사하게 하소서.

청하기도 전에 
듣고 계시는 당신께 
감사하게 하소서.

베풀어지기도 전에 
이미 품으신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치유보다 치유시키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 깃든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감사하게 하소서. 

무감각하지 않게 하시고
치유를 받고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배은망덕은 말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소원을 하나만 쓸 수 있다면?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삶의 진정한 행복이 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깊이 성찰하고자 합니다. 재산이나 명예 같은 외적인 변화가 행복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주는 행복은 3개월을 넘지 못하고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아이에게 부모가 행복의 전부인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과 그분이 주시는 은총으로만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존감’이라고 하고, 이것이 우리 모두의 ‘기본 행복 수준’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행복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나의 가치를 깨닫는 ‘자존감’이 높아지는 동시에, 그것을 주시는 분에 대한 감사, 곧 ‘겸손’이 함께 커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마치 은총을 담는 그릇과 같아서 그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은총은 청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마치 김치가 우리 삶의 은총이라면 김치냉장고가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으면 김치가 상해서 오히려 우리 건강에 좋지 않게 됩니다.

일본의 유명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은총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그녀는 13세에 연예계에 데뷔하여 빠르게 톱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모델로서, 그다음엔 TV 배우로서, 그다음엔 가수로서도 노래를 부르자마자 오리콘 차트 1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이른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성공은 그녀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업계에서는 그녀의 안 좋은 인성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고, 급기야 2007년 한 영화 무대인사에서 기분이 “별로!”라는 발언(일명 ‘베쯔니 사건’)을 하여 대중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이후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나이 많은 영화감독과 결혼했지만, 당연히 그 관계가 오래갈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은총만 바라고 그릇은 준비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치유해 주시지만 감사하러 온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치유라는 기적 자체에 목적을 두었고, 당연히 자신들이 노력한 결과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은총을 받기 전과 받은 후가 같아야 합니다. 똑같이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되고, 받기 전이나 후나 다 ‘감사와 찬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총이 독이 되어 주님께서 계속 주실 수가 없습니다. 병이 치유되고도 감사하지 않은 나머지 아홉은 영혼의 나병으로 더 교만하여 하늘나라에서 더 멀어졌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누구나 겪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어 유학을 다시 나가라고 했을 때 마음 안에서는 큰 불만이 일었습니다. 공부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어 신자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는데 또다시 외국인 학생으로 짓눌리며 살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결국 몸으로는 순종한다고 로마로 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을 무렵 터키 성지순례를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바이러스가 들어가 한쪽 귀의 청력이 손상되었습니다. 결국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제야 잘 들을 수 있음에 단 한 번도 감사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데 교회에서 다 시켜주는데도 신세 한탄만 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은총을 충분히 받고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감사하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청해야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아내를 바꾸어달라고 청했다가 아내가 죽자, 사람들의 칭송을 듣고는 다시 살려달라고 청했습니다. 마지막 소원이 남자, 그는 예수님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처지에서 감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여라.”

우리에게 마지막 소원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바로 ‘겸손’입니다. 이런 마음이 은총을 받게 합니다. 겸손은 집을 짓는 바탕과 같아서 겸손이 없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는 세상의 성공한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가수 비는 박진영이 자신에게 “네가 아무리 잘 돼도 저 끝에 있는 막내한테, 세트를 만드는 망치질하시는 분한테 제일 잘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던 것을 기억합니다. 박진영은 비에게 성공이라는 은총을 주기 전에, 먼저 겸손이라는 그릇부터 준비시킨 것입니다.

메이저리거 오타니 쇼헤이가 경기장에서 쓰레기를 줍는 것, 삼성 이재용 회장이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 그리고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나는 미래를 알 수 없다.”라는 겸손한 자세로 장기 투자를 고집하여 노년에 더 큰 부를 이룬 것 모두, 더 큰 은총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겸손의 그릇을 키워나가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동네에 가끔 뻥튀기 장수 아저씨가 리어카를 끌고 오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분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얼마나 큰 은총을 주실 수 있는지 몰랐던 거지요. 어느 날, 그 아저씨가 동네 아이들에게 공짜로 뻥튀기를 나눠준다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공짜라니!’ 하며 그냥 맨손으로 터덜터덜 나갔지만, 다른 친구들은 저마다 커다란 바가지나 대야를 들고 달려 나왔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저렇게 욕심을 부리다니!’ 그러나 잠시 후, 저는 제 작은 손바닥에 몇 개만 받았을 뿐이지만, 뻥튀기 아저씨는 친구들이 가져온 그릇마다 가득가득 뻥튀기를 채워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 내가 주님을 알려고 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더 큰 은총을 받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한 소녀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구해줍니다.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말입니다. 나비는 천사로 변해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소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하자 귓가에 무언가 속삭이고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임종 직전, 그녀는 행복의 비결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속삭였어.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사하다고 말하면 평생 행복할 거예요.’ 그때부터 나는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던 거야. 사실 천사가 내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야. 누구든지 만족한 줄 알고 매사에 감사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신앙 여정은 바로 이 행복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너는 내 피로 값을 치른 존귀한 존재다.”라는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줍니다. 동시에, 나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더없이 작아지는 깊은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이 두 가지를 붙들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은총이 은총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겸손’을 붙들고 청하고 끝까지 키워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고대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는 반대가 많았고, 그 반대자로부터 테러를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 안에서 언제 암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가득했습니다. 어디서 올지 모를 암살자에 대한 두려움에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도록 사방팔방에 거울을 설치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거울을 통해 암살자를 막을 수 있었을까요? 아쉽게도 그는 결국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거울이 암살자를 숨지 못하게 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암살자는 그가 침실에서 자고 있을 때 암살한 것입니다. 깨어 있었다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거울을 통해 암살자를 발견하고 막을 수 있었겠지만, 눈 뜨고 잘 수 없기에 거울의 효과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세상이 나를 지켜주고, 나의 행복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지켜주고 참 행복을 가져다주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이 세상 삶은 채 100년도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하느님 나라에서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존재가 중요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만 집중하게 되면 주님께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행복도 멀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병이라는 끔찍한 병으로 고통스러운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나병 환자는 율법에 따라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기에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하고 이르십니다. 즉시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나병이 나았을 때 행해야 할 절차를 먼저 이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말씀만 믿은 사람만이 사제에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 모두 사제에게 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이 중에 단 한 명만, 그것도 유다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아홉 명은 ‘치유’라는 선물 자체에만 만족하여 서둘러 사제에게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병이 낫는 것, 즉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는 데에만 관심 있을 뿐, 그 은총을 베풀어주신 분과의 인격적인 관계에는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세상의 것과 분명 구별되는 것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기준만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라면서 영적인 구원을 이야기하십니다. 이제는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기준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준은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장애는 불편하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헬렌 켈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자연과 함께 모든 것이 익어가는 이 가을이 우리의 평화와 감사도 잘 익어가기를 기도드립니다. 치유의 본질은 감사이며 은총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진정한 구원의 시작입니다. 감사는 관계를 회복시키고, 삶의 상처까지도 살아야 할 의미로 바꾸어 놓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우리의 진정한 감사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감사로 드러납니다. 온전히 새로워지는 살아 있는 관계의 믿음입니다.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감사의 기쁨으로 드러납니다. 감사 없는 봉사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감사는 치유를 완성시키고 치유는 감사를 깊게 합니다. 믿음은 감사를 낳습니다. 믿음 없는 감사는 일시적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을 완성시키고, 믿음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치유와 구원을 체험합니다.

오늘은 감사의 마음을 새기고 기리는 군인 주일입니다. 나라와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군인들의 믿음과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군인들의 신뢰와 노고 안에서 우리는 평화와 희망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공동체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 것임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뜻깊은 감사의 주일 되십시오.

 

 

 

티모테오2서 2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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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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