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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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10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로마 1,16-25)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1,37-41)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로마 1,16-25
오늘 제1독서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5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루카 11,37-41
오늘 복음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그때에
37 예수님께서 다 말씀하시자, 어떤 바리사이가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그분을 초대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시어 자리에 앉으셨다.
38 그런데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39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10월 14일
최문기 마티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50
고요한 새벽, 마음을 여는 미사
하루의 첫 순간을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새벽 5시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 매일미사 말씀묵상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
-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이미지 다운로드
-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매일미사 말씀묵상
이찬우 다두 신부
여러분은 어떻게 식사합니까?
인상을 쓰거나 울면서, 아니면 짜증 내면서 식사합니까? 사실 먹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로써 우리의 생명을 얻고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은 그와 함께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뜻입니다. 나의 밥, 나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음식을 나누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바리사이가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초대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식사하는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께서 손을 씻으시지 않는 것을 보고는 놀랍니다. 그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나누는 식사보다도 율법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살다 보면 자신만의 원칙들이 생겨납니다. 이 원칙들은 자신을 보호하기도 하고 올바른 삶을 꾸려 가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원칙이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을 때는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는 음식을 함께 먹는 일을 생명을 나누는 일로 소중히 여기기보다 율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오늘 하루 자신이 가진 삶의 원칙들을 살펴봅시다. 그리고 그 원칙이 사랑에 기초한 것인지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속 건강이 중요하다.
오늘 어떤 바리사이가 주님을 식사 초대합니다. 우리는 아무나 식사 초대를 하지 않지요. 존경하거나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이런 바리사이를 주님은 호되게 비난하십니다.
주님께서 식사 전 정결례를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가 비난한 것도 아니고 그저 놀라워했을 뿐인데 이것을 주님께서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비난하십니다.
이렇게 호의를 싹 무시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듯한 주님을 보면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너무 모질다는 생각이 들어 주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를 꼭 집어 비난하신 게 아니라 바리사이를 일반화하여 비난하신 거라고 변호도 하지만 어쨌거나 주님께서는 겉과 속이 다름을, 아니 겉치레를 거의 신경질적으로 싫어하시고 배격하십니다.
그것은 속 건강이 너무 안 좋아 피부에 뭐가 계속 나는데도 속병을 고치려 하기보다 화장을 통해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피부가 깨끗하고 아름다우려면 속병을 고쳐야 하고, 속병을 고치려면 몸에 해로운 걸 먹지 말아야 하며, 해로운 것을 먹지 않으려면 해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없어야 함을.
그런데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속병은 무엇이고, 무엇이 영혼에 해로운 것들입니까? 제 생각에 이 세상의 만족이 그것들입니다. 칭찬과 명예와 같은 좀 더 고차원적이고 고상한 만족에서부터 권력이나 부나 지식과 같이 이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과 옷이나 먹는 것과 같이 저차원적이고 사치스러운 만족에 이르기까지 우릴 천상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 이 세상에 안주케 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 것으로 만족하려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이런 것들에 대한 탐욕 대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우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것들에 대한 탐욕은 우리를 미움, 시기 질투, 분노 같은 것으로 채워 우리 안에 평화라고는 하나도 없고 오직 화가 가득 차게 할 뿐이니 이것들의 원인이 되는 탐욕은 비워내고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케 하라 하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가진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미움밖에 없는 사람은 미워할 수밖에 없고, 하느님 사랑이 없는 사람이 자비를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그때 우리가 가진 것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뜻일 것입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에 일어난 일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당혹스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먼저 손을 씻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루가 11,38).
왜 그렇게 놀랐을까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위생상의 관습이나 예의였을 뿐 아니라, 나아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정결례’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는 바리사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루가 11,39)
이는 진정한 ‘정결례’는 겉을 씻는 일이 아니라, 속을 씻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음식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루카 11,39)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속을 씻는 일이 겉을 씻는 일보다 낫다’는 것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속에 담고 있는 것’을 정당하게 취득한 것인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불의와 착취, 부정과 탐욕, 이기와 사악함을 질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속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지, 또 그것들을 어떻게 채웠는지, 왜 채웠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깨끗해지는 방법도 말씀해 주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그렇습니다. ‘깨끗해지는 길’, ‘더러움을 비워내는 길’은 형제와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입니다.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채운 속을 비우는 방법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이는 ‘정결법’이라는 율법의 본래의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밝혀줍니다. 곧 ‘정결법의 정신’은 깨끗하게 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니 속에 있는 것을 비워낸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비워지고 깨끗해지게 됩니다. 바로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2코린 4,7) 으로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사랑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1,41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주님!
제 속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탐욕으로 채운 것을
사랑으로 나누게 하소서.
제가 온전히 깨끗해지고
당신 얼굴 뵙게 하소서.
제 속에 당신의 뜻을 품고
당신의 향기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깨끗함이란? 생각보다 강력한 자선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위선을 꾸짖으시며 “속에 든 것을 자선으로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고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자선이 단순히 남을 돕는 행위를 넘어, 우리 영혼의 문을 열고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깨끗한 공간’을 만드는 가장 강력한 열쇠임을 알려줍니다.
과연 깨끗함이란 무엇일까요?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깨끗함이란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깨끗한 집에라야 귀한 손님을 맞이할 수 있지요. 사제로서 집 축복을 다니다 보면, 집이 지저분해서 사제를 들이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하며 축복을 거부하는 신자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깨끗함이란 객관적인 상태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판단하는 ‘양심’이 있습니다. 이 양심이 “너는 죄로 가득 차 있다. 너는 더러운 집이다.”라고 판결을 내리면,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가장 귀한 손님이 문을 두드리셔도 차마 그 문을 열어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아서왕 전설의 기사 랜슬롯은 성배를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나는 왕을 배신한 죄인이다. 이런 더러운 몸으로 어찌 감히 거룩한 성배를 마주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양심이 스스로를 ‘합당하지 않다’고 판결했기에, 가장 큰 은총 앞에서 스스로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미사 때 성체를 영하기 직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특히 제 안에 ‘주는 사랑’이 메말라 있음을 느낄 때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주님, 저는 주님께 무엇을 드렸습니까? 아무것도 드리지 못한 제가 어찌 감히 주님을 받아 모실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받기만 하는 나’와 ‘다 주시는 주님’ 사이의 불균형이, 제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입니다.
이 무거운 양심의 짐을 어떻게 가볍게 할 수 있을까요? 가수 박진영 씨가 가수 비에게 했던 조언에 그 실마리가 있습니다. “나한테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대신에 너와 함께 일하는 스태프나 후배들에게 잘해라. 그러면 네가 나를 볼 때 빚진 마음 없이 편안하고 떳떳하게 볼 수 있을 거야.” 우리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준 높은 분에게 직접 보답하기 어려울 때, 그 사랑을 다른 이들, 특히 우리보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흘려보낼 때, 우리의 양심은 비로소 평화를 얻고 그분을 떳떳하게 마주할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가 바로 이 원리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기 직전, 군중을 향해 외칩니다.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제가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신 ‘자선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런데 자선을 한 번도 행하지 않은 이기적인 내가, 어떻게 감히 ‘자선 자체’이신 분을 내 안에 모실 수 있단 말입니까? 자캐오는 자신의 ‘속에 든 것’을 이웃에게 나누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깨끗한 집을 마련한 것입니다.
미국 금융가 조지 피바디는 명성을 얻으려는 세속적인 동기로 런던의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 사업에 막대한 돈을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아파트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과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보면서, 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순수한 기쁨을 체험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시작했던 나눔이, 도리어 그의 영혼을 정화시켰습니다. 그는 더 이상 외로운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런던의 아버지’로 불리며 진심으로 사랑받았습니다. 그의 이기적인 행동이, 그의 양심을 “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도록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는 거창한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매일같이 자선을 베푸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상 가장 미움받던 부자, 존 록펠러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기계적으로 거액을 기부했지만, 마음의 평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병원에서 수술비가 없어 죽어가는 소녀를 위해 마지못해 돈을 내주었고, 그 소녀의 감사 편지를 받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돈이 한 생명을 살리는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그날 이후 ‘주는 기쁨’에 눈을 떴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선 자체’이십니다. 그분을 우리 안에 깨끗하게 모시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작은 오세올라가 되어봅시다. 내가 마실 커피 한 잔 값을 아껴 더 어려운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작은 습관을 시작해봅시다. 그 작은 나눔이 우리의 양심을 씻어주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기쁘게 머무시는 가장 깨끗하고 거룩한 성전으로 우리를 빚어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창의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고정관념을 지워야 창의성이 나올 텐데,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있게 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본당 미사 후에, 종종 “신부님, 죄송해요.”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해설에 문제가 있었다고, 독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미사 준비에 미숙한 부분이 있었다고, 때로는 미사 시간에 스마트폰 울린 것을 사과하십니다. 솔직히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의외의 상황이 오히려 습관적인 전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실수로 미사에 집중한다면 그게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 복사들이 참 예쁩니다. 특히 미사에서 실수할 때가 더 예쁩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복사는 미사 내내 울상입니다. 틀리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틀렸다는 것도 별것 아닙니다.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데 왼쪽으로 잠깐 방향을 잡은 것, 조금 늦게 포도주와 물을 가져온 것, 종을 늦게 친 것…. 이렇게 틀린 것이 전례의 근본정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은 과거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볼 수 있게 하며, 이로써 지금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합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바로 인간적인 고정관념에 쌓여 있어서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유다교에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단순히 위생의 문제로 손을 씻은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과의 접촉으로 더러워진 자신을 정화하는 정결 예식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의 닫혀 있는 마음을 지적하십니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루카 11,39)
겉으로 보이는 율법 조항 지키는 것을 누구보다 열심히 지켰지만,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쓸데없는 고정관념뿐입니다. 그보다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있는 길은 ‘자선’이라고 하십니다. 즉,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루카 11,41)라고 말씀하십니다. 속에 담긴 것은 그들의 소유와 재물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쌓아둔 재물을 가난한 이웃에게 자선으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있다고 하시지요.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단순히 고정관념으로 외적인 종교적 ‘열심’이나 ‘형식’만을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하늘 나라에 가깝게 하는 것은 자선, 즉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을 더 많이 가지려는 자가 아니라, 더 많이 주려는 자들이다(H. 잭슨 브라운 주니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음 깊은 곳의 깨끗한 사랑을 바라보십니다. 자선을 통해 이루어지는 내면의 정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깨끗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깨끗한 마음은 가장 깊은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 깨끗해질 수 없으며,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마음을 정화할 때 가능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깨끗해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며 만남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또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자선을 통해 우리는 이기심의 먼지를 털어냅니다.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우리의 깨끗한 마음입니다. 사랑과 나눔을 실천할 때,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레 깨끗해집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겉이 아닌 속을 정화하는 참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서로를 비추는 하느님의 빛입니다. 참된 사랑으로 하느님을 닮는 맑은 날 되십시오. 마음의 정화는 사랑과 자비의 실천입니다.
루카복음 11장 4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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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말씀 한 구절이 하루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주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오늘을 위해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려진 6가지 성경구절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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