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즈 9,5-9)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9,1-6)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에즈 9,5-9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저녁 제사 때에, 나 에즈라는
5 단식을 그치고 일어나서, 의복과 겉옷은 찢어진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주 나의 하느님께
6 말씀드렸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
7 저희 조상 때부터 이날까지 저희는 큰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죄악 때문에 오늘 이처럼, 임금들과 사제들과 더불어 저희가 여러 나라 임금들과 칼에 넘겨지고, 포로살이와 약탈과 부끄러운 일을 당하도록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8 그러나 이제 잠깐이나마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
9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들 앞에서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우고 그 폐허를 일으키도록 해 주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해 주셨습니다.”
루카 9,1-6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3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24일
이기성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51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하느님의 의로움은 자비이며 구원이다.
오늘 독서에서 에즈라는 주님께 온 백성의 죄를 장엄하게 고백합니다. 백성의 죄를 자기 죄처럼 여기고 하느님 앞에서 매우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이 백성은 끊임없이 주님께 반항만 하였음을 고백합니다.
다윗이 “정녕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시편 51[50],7)라고 고백한 것처럼, 어떤 행동들에 대한 뉘우침이라기보다 죄인이며 불충실한 존재이기에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존재의 비참함에 대한 고백입니다.
철저한 자기 인정이고 자기 낮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믿음 아래, 이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전쟁과 유배라는 벌을 내리셨음을 고백하고 그것이 옳았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에즈라의 시선은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봅니다. 하느님께서 백성을 전멸시키시지 않은 것은 백성의 죄악에 견주어 하느님의 벌이 가벼웠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에즈 9,13 참조).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살아남은 이들에게 터전을 마련하시고 되살려 주셨으며 하느님의 집을 새로이 세우도록 자애를 베푸셨습니다.
비록 유배로 백성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살아남은 이들을 통해서 당신 백성을 물리치시지 않고 당신과 맺은 계약을 변함없이 이어 나가셨으며 이 백성을 여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로마 11,1 참조).
에즈라는 주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남겨 주신 것이 하느님의 의로움 덕분이라고 고백합니다(에즈 9,15 참조). 그래서 하느님의 의로움은 자비이며 구원입니다. 여기에 에즈라의 희망이,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복음 선포의 세 원칙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
오늘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위해 열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의 세 가지 원칙을 이르십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아는 무소유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왜 무소유여야 합니까? 우리는 그것도 잘 알아야 합니다. 단지 여행의 수월함 위해서입니까? 그런 뜻도 없지 않지만 숨어 있는 뜻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아무것도 앞에 ‘집이나 장소’도 소유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덧붙입니다.
집이 의미하는 것은 안정입니다. 그리고 안정 안에는 안전함과 편안함에 안주함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지만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실 돌아다니다 보면 내 집이 편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되고, 그래서 점차 집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을 두고 떠나기 힘듭니다. 좋아하는 여행도 이런데 복음 선포를 위한 길 떠남은 오죽하겠습니까?
장소를 소유하지 말라는 것도 안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장소는 어떤 곳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곳과 저곳을 다니기 위해서 이곳에 안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복음 선포에 있어서 안주는 제일 큰 적이요 장애물이기에 복음적 불안정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또 다른 숨은 뜻이 있습니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말고 하느님께만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가 아니더라도 의존은 나쁘고 의탁은 좋습니다. 그러나 복음 선포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것 없이 복음 선포는 불가능하다 해선 안 되는 겁니다.
두 번째 복음 선포 원칙은 ‘한 집에 머물기’입니다. 한 곳에 안주하지 말아야 하지만 집은 한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씀인데 그것은 이집 저집 떠돌지 말라는 뜻이고 집 투정하지 말라는 뜻이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 집에 만족하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의 세 번째 원칙은 ‘발에 먼지 털기’입니다. 어느 곳과 어느 집이 복음을 원치 않으면 미련 두지 말고 떠나라는 뜻이고, 더 나아가 원하지 않는 그들과 복음을 강요하거나 다투지 말라는 뜻입니다.
가끔 복음 선포가 거절당할 때 서운한 감정이 들 수 있고 내가 이 좋은 것을 너를 위해 주는데 왜 고맙게 받아들이지 않냐고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거나 심지어 다투기도 하는데 그래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는 불안정과 불편함과 거절을 각오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복음 들고 세상으로 파견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
오늘 <복음>은 열 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가지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이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먼저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과 권한을 부여하시어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루카 9,1)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그렇습니다. 길을 떠나면서 그 어떤 다른 것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몸 걱정도, 치장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칠 힘도 권한도, 말씀도, 예수님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미 이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왜 그 권능이 우리에게서는 드러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능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이는 우리의 초라함, 우리의 무능함, 우리의 허약함이 당신의 권능을 더욱 더 드러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앞세우기에 결국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능력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장면>에서, 파견 받은 자들이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알리고, 그 증거로 병든 자들을 고쳐주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루카 9,6)
오늘, 우리도 분명 예수님께 파견 받은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그분의 권능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들에게서는 치유가 일어나고 질병이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내가 무능하지 않으려하고 오히려 능력을 부리려다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지 살펴보아야 할 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9,3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번영 신학이 맞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묵상을 시작하며 저의 책 홍보를 먼저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에 제가 쓴 『사랑하는 조카들아, 이것만 읽고 냉담하면 안 되겠니?』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정가는 22,000원입니다.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출판사에서 이 책을 가져올 때 70% 가격으로 사 와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10권 이상 구매하시는 분들께는 15,000원, 30권 이상은 14,000원, 50권 이상은 13,000원, 그리고 100권 이상을 구매하시면 12,000원에 드리기로 했습니다.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여러분이 많이 사실수록 저는 조금 더 가난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hasasy@naver.com으로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지속할지 모르겠으나, 선교를 위해 제가 조금 더 가난해지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교구 사제는 수도자들처럼 가난 서원을 따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교구 사제는 가난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사제에게 가난은 너무나 당연하고 본질적인 것이라 굳이 서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저도 서품 초기에는 가난한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핑계가 생겼습니다. 너무 많이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아닐지라도 물질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너무 넉넉해서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저는 의식적으로 저 자신을 비우고 가난해지는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이 책 판매도 그중 하나이고, 제게 불필요한 것들은 최대한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이렇게 명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이토록 무방비 상태로, ‘빈손’으로 보내셨을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
우선 가르치는 처지에서, 가난하면 겸손해집니다. 부모도 선생도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생계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신자들이 주는 돈으로 삽니다. 자기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사제가 되면 신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존재가 되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받아들이는 처지에서 보면, 가난한 자의 선포만이 의미를 지닙니다. 겸손하게 만듭니다. 어떤 부잣집 아들이 유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부모는 자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지만, 그 가르침이 자녀에게 스며들지 못했습니다. 가난으로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교만이 죽지 못했습니다.
가난은 선포할 하느님 나라의 권능이 그들의 소유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을 보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거함입니다. 그들의 가난은 곧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표현입니다. 미래를 위해 부를 축적하며, 자신도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는데, 자녀가 어떻게 부모나 스승을 신뢰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이 진리를 잃어버릴 때, 설교자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조엘 오스틴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늘 ‘긍정의 힘’을 설파하며, 믿으면 부자가 되고 성공할 수 있다는 ‘번영신학’으로 수많은 사람을 끌어모았습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세상 부와 성공을 향한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7년, 허리케인 하비가 텍사스주를 강타하여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그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교회는 1만 6천 석 규모의 거대한 경기장을 개조한 것으로, 수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이재민들이 교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교회는 ‘침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SNS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고 비난이 폭주하자, 그는 마지못해 교회를 개방했습니다. 수십억 원짜리 호화 저택에 살면서 ‘긍정의 힘’을 외치던 그의 설교는, 정작 도움이 절실한 이웃의 고통 앞에서 힘을 잃고 위선적인 외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부유함이 그의 말을 무력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삶으로 가난을 증거한 이들의 말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지난 2024년 6월 선종하신 서울대교구의 유경촌 주교님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주교품에 오르신 후에도 그분은 주교관이 아닌, 사제관의 작은 방에서 지내셨습니다. 주교를 상징하는 지팡이와 반지, 가슴 십자가도 꼭 필요할 때 외에는 거의 착용하지 않으셨고, 늘 낡은 가방을 들고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셨습니다. 받는 모든 돈을 봉투째로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월급 0원’의 주교님으로 불렸습니다.
유경촌 주교님의 강론은 특별히 화려하거나 수사학적으로 뛰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언어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말씀은 신자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분의 삶이 바로 강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청빈하고 겸손한 삶으로 증명되었기에, 그 어떤 웅변가의 말보다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유 주교님의 모습에서 재물이 아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빈손의 목자’를 보았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모든 본당 사제의 수호성인이신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의 삶에서도 똑같이 드러납니다. 그분은 정규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강론 준비를 매우 힘들어했고, 설교 자체도 유창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전 유럽에서 사람들이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 아르스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그의 극심한 가난과 희생의 삶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하루에 삶은 감자 몇 알로 끼니를 때우고, 딱딱한 나무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며, 하루 16시간 이상을 고해소에서 지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어눌한 말속에서 세상의 지혜가 아닌, 거룩한 삶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느님의 지혜를 들었습니다. 그의 가난한 삶이 그의 말을 ‘살아있는 복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빈손’으로 파견하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힘은 오직 우리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울 때, 즉 ‘가난’해질 때 주어지는 하느님의 권능입니다.
베트남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응우옌 반 투언 추기경님입니다. 그는 공산 정권에 의해 13년 동안 감옥에 갇혔고, 그중 9년을 독방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밤 손바닥에 포도주 세 방울과 빵 부스러기를 올려놓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감옥 안에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소유했습니다. 훗날 풀려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9년 동안 독방에서 살았지만, 그 순간들은 제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하느님과 단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만이 줄 수 있는 말의 힘입니다. 가르치면서도 가난하지 않다면, 지혜가 없으면서 지혜를 주려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가난은 가르치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다면 어떻게 지혜를 줄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어느 번화한 도시에 성공한 상인 두 명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수완으로 계속 번성하고 있었지만, 서로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에 대한 미움과 시기심이 커질 수밖에 없었지요. 특히 한 상인의 마음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상대 상인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고,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보내서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네 안에 있는 미움과 시기심을 보았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오히려 선물을 주시겠다고 한다. 네가 무엇을 원하든 다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네가 얻는 것의 두 배를 상대 상인이 받을 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가 청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돈, 명예, 땅….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워하는 그 상대 상인은 두 배를 받는다니 말입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의 한쪽 눈을 멀게 해 주십시오.”
한쪽 눈 실명은 상대에게 양쪽 눈 실명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남에 대한 미움이 이런 결정을 가져온 것이지요. 하지만 함께 잘 되는 것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남과의 비교보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손해를 보더라도 남에게 피해만 줄 수 있다면 괜찮다는 어리석음에서 머무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그 비교가 자기 불행을 가져온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미워하는 사람과도 함께하는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신 뒤에 파견하십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루카 9,3)입니다. 지팡이, 여행 보따리, 빵, 돈, 여벌 옷조차도 금지됩니다. 제자들이 세속적 편안함이나 자기 보호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와 사람들의 환대에 의지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음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복음 선포의 자유를 위한 조건이 됩니다. 많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느님 뜻에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과의 비교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적 기준에 또 자기 보호에만 의지하려는 마음에서 하느님 뜻을 찾지 못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라며 제자들의 성공 사례를 증언합니다. 바로 자기 뜻에서 벗어나 하느님 뜻에 머물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뜻에 머물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성 요한 보스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루카복음 9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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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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