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22일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즈 1,1-6)
주님의 백성에 속한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님의 집을 짓게 하여라. - 오늘 복음
(루카 8,16-18)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에즈 1,1-6
오늘 제1독서
주님의 백성에 속한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님의 집을 짓게 하여라.
1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3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4 이 백성의 남은 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모든 지방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위한 자원 예물과 함께, 은과 금과 물품과 짐승으로 그들 모두를 후원하여라.”
5 그리하여 유다와 벤야민의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사제들과 레위인들,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 계신 주님의 집을 짓도록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이들이 모두 떠날 채비를 하였다.
6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저마다 온갖 자원 예물 외에도, 은 기물과 금과 물품과 짐승, 그리고 값진 선물로 그들을 도와주었다.
루카 8,16-18
오늘 복음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22일
신승우 도미니코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21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사람들과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혼자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해서 끊어 버리면 우리는 점점 죽어 갑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꽃피우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름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름에서 오는 문제를 자기 기준으로만 보면서 “저것은 틀렸다.”라고 할 때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소통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내가 너와 만날 때 우리는 두 명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여섯 명이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내 안에는 ‘내 부모님의 생각과 가치관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나’가 있고, 사랑받은 경우도 있고 상처받은 경우도 있는 ‘어릴 적의 나’가 있으며, ‘어른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이 세 가지 자아를 다 인식하지도 못해서 자기 자신마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여러 자아 때문에 관계와 소통이 얽히고설키게 됩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관계를 맺고 소통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관점으로 보고 듣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똑같은 모습으로 같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저마다 자기 관점으로 보고 듣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고 듣지 않고 ‘해석합니다’. 이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행복에 행복을 더해 갈 수도 있고, 불행에 불행을 더해 갈 수도 있습니다. 내 관점, 곧 해석의 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루카 8,18).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선행이 자랑이 아니라 빛이 되도록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나의 선행이 자랑이 아니라 빛이 되도록! 저는 오늘 강론 제목을 이렇게 잡았는데 등불을 켜서 감추지 말고 등경 위에 놓아 비추게 하라는 오늘 주님 말씀은 선행을 굳이 감추지 말고 사람들이 보게 하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요즘 저는 조용하고 선선할 때 운동하느라 새벽 4시쯤 걷기 운동을 하는데 요즘은 서울 어디를 가나 가로등이 잘 돼 있어서 아무 불편이 없습니다. 우리의 등불도 이렇게 가로등처럼 비추면 되는데 우리는 종종 등불을 켜고서는 감추려고 하거나 심지어 등불을 아예 켜지 않으려고까지 합니다.
짐작이 가는 것은 선행이 다른 사람을 비추는 등불이 아니라 선행을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기 때문이거나 반대로 자기 선행이 너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이 자랑이 아니라 빛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랑이 순전하도록 곧 교만이나 욕심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가난과 겸손의 덕을 갈고 닦는 한편 주님께 빛의 은총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의 빛이 내게 없다는 가난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편, 빛을 받아서 빛을 비추려는 겸손한 자세로 빛의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가난과 겸손이 밑바탕 되어야 하고 그래야지만 우리는 사랑에서 비롯된 선행을 할 수 있고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프란치스코는 주님을 가난과 겸손과 사랑의 주님이라고 하고, 그래서 가난과 겸손과 사랑을 프란치스칸 삼덕(三德)이라고 저는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삼덕의 선행 곧 가난과 겸손과 사랑의 선행을 할 때 우리의 선행은 빛이 되어 사람들을 비출 뿐 아니라 우리의 빛이 어디서 오는지 그 원천이신 하느님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빛에서 빛을 받아 비추는 우리가 되기로 결심하는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말씀의 등불
“씨 부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말씀을 들은 자에 대한 지시사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항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16)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그릇’은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그러니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사실, “말씀”은 숨겨 덮어지지도, 감추어 가려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마태 5,14)처럼, 감추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집안을 가장 잘 비출 수 있는 곳에 거룩한 교회인 “등경”을 올려놓고, 말씀인 “등불”을 켜서 밝혀두어야 할 일입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온 집 안과 집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비추어 밝혀줄 것입니다. 그 빛은 우리의 뼈와 살을 가르고, 우리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7)
이토록 ‘말씀’은 빛이 되어 세상과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그렇습니다.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마치, 율법학자가 “스승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라고 되물었던 것처럼) 곧 믿음과 사랑으로 희망하여 들어야 하고,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지향하여 듣는 일, 곧 들은 바를 믿고, 믿는 바를 응답으로 실천함으로써 말씀이 성취되게 하는 일입니다(이를 ‘렉시오 디비나’라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루카 8,18)이라는 말씀을 알아듣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8,16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주님!
당신 말씀은 저의 등불입니다.
제 알량한 지식이나 능력으로
당신 등불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 빛을 가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 빛을 결코 덮어질 수도
가려질 수도 없는 까닭입니다.
제 영혼 위에 등경을 올려놓고
등불이 제 온몸을 비추어
제가 항상 당신 빛 안에 있게 하소서.
당신 빛으로
저를 밝혀주시고
빛을 받는 만큼
더욱 더 밝아지게 하소서.
제 뼈와 살을 가르고,
제 생각과 속셈을 밝히시어
제 안에 어둠을 몰아내시고
숨겨진 것은 환희 드러내소서.
말씀의 비추심으로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묵상기도의 핵심 원리: 빛을 원하면 먼저 등이 되어라.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진리의 등불을 숨기지 말고 비추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줄 아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말씀을 수용하는 것을 넘어, 깊이 묵상하고 깨달음을 얻는 기도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내어놓으려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더 깊은 은총을 얻게 된다"는 가장 좋은 기도법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얻은 깨달음을 자신만을 위해 숨기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내어놓으려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은총과 확신을 주십니다. '가진 자'는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줄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팀 호이트'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뇌성마비 아들 릭을 둔 아버지 딕은 아들에게 '삶은 포기하지 않는 도전'이라는 진리를 몸소 전해주려는 강렬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릭의 "달리고 싶어요" 한 마디에, 육상 선수도 아닌 딕은 아들을 휠체어에 태우고 마라톤과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했습니다. 육체적 고통을 초월한 '내어놓으려는 마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했고, 아들 릭은 "아빠가 달릴 때 저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느껴져요!"라고 고백했습니다. 딕은 '사랑과 의지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삶의 진리를 아들에게 몸소 전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딕 호이트 아버지처럼 '내가 이 말씀의 진리를 어떻게 하면 나의 삶과 모범을 통해, 나의 자녀들과 이웃에게 가장 깊이 내어놓을 수 있을까?'라는 마음으로 헤아려야 합니다. 이러한 '내어놓으려는 기도'는 단순히 나 자신의 만족을 넘어, 말씀의 진리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주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까지 가능하게 하는 영적인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려는 가르침과 모범이 ‘진리’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표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를 보십시오. 그는 인종 차별이 만연한 시대에 흑인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으며 사회적 비난과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승소 가능성도 희박했지만, 그는 자녀들에게 '정의와 진실'을 몸소 가르쳐주고 싶다는 강렬한 '내어놓으려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자녀들이 "아빠, 왜 저 흑인을 변호해요?"라고 물을 때, 애티커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너희가 사냥총을 가져다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울새는 죄 없는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 그 새는 우리에게 노래를 불러줄 뿐 아무것도 해치지 않는다.'고 일러 주렴."
이 말씀은 '죄 없는 약자를 편견과 불의로 해치는 것은 명백한 죄악'이라는 진리이자, 애티커스 자신의 예언자적 사명을 상징합니다. 그는 이 진리를 자녀들에게 '전해주려는' 마음으로, 나아가 세상의 등불로 만들려는 책임감으로 목숨 건 변호를 맡았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묵상 기도는 바로 이렇게 진리를 등불로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세상에 내어놓으려는 이들만이 참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줄 아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경고하십니다. 아무리 좋은 칼이라도 쓰지 않으면 녹슬듯,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여 얻은 깨달음을 '내어놓으려는' 노력 없이 우리 안에만 가두어 둔다면, 그 깨달음은 점차 빛을 잃고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내어놓으려는' 노력은 말씀을 더욱 갈고닦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고 촉구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묵상 기도의 가장 깊고 효과적인 방향을 제시합니다. 바로 진리를 자신 안에서 밝혀 실현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 성인은 어릴 적 받은 '꿈'의 계시, 즉 난폭한 아이들을 순한 양으로 변화시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만의 것이 아닌, '세상의 버려진 아이들에게 내어놓아 구원하겠다'는 강력한 '내어놓으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이 꿈이 하느님의 진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아이들을 위한 오라토리오를 시작하며 불가능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의 말씀이 육화된 것이었고, 그 결과 수많은 아이들이 구원받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나 자신만을 위해 움켜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아두듯, 얻은 깨달음을 다른 이들에게 기꺼이 전하고 나누어주려는 '내어놓으려는 마음'으로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어놓으려는 기도야말로 가장 깊이 '가지는' 길이며,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등불을 세상에 가장 밝게 비출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말씀을 '내어놓으려는 마음'으로 기도하여,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앤서니 플루’라는 영국의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면서, 신존재 증명에 관해 늘 비관적이었습니다. 즉, ‘증거가 없으면 믿을 이유도 없다’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그가 신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다음의 3가지 때문이었습니다.
1) 우주가 영원하며, 항상 있었고 항상 존재할 것이다. 원래 존재하는 것이기에 창조자가 없다.
2) 생명은 무작위적 화학 작용의 결과물이다. 생명은 저절로, 우연히, 또 무작위로 나온 것이기에 신에 의한 창조는 없다.
3) 하느님의 존재는 자기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악과 하느님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주로 사용하는 말은 지극히 비논리적인 것이었습니다. ‘원래, 저절로, 우연하게’ 등의 말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2004년에 “나는 더 이상 무신론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자연 세계의 복잡성, DNA 구조 등을 근거로 어떤 지성이 우주 기원에 개입할 수 없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세상 삶에는 항상 목적이 있습니다. 그냥 저절로, 우연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있음이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등불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등불은 하느님의 말씀과 믿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감추어두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드러내고 비추라고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제자들은 받은 빛을 숨기지 말고, 등경 위에 놓아 다른 이들에게 비출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 모든 이에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 말씀처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야.’(루카 8,18) 합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듣고 어떻게 살아내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더 풍성한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세상의 관점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주님의 목적보다 나의 목적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때 이미 받은 은총마저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목적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보다 나의 목적만을 밝히려고 하고, 세상의 뜻만을 찾으려 한다면 당연히 주님의 은총 안에서 머물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의 성장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습니다(헨리 포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빛은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라, 열매처럼 드러나며 가을 하늘 아래 희망의 등불이 됩니다. 어둠은 빛을 숨기지 못하고 빛은 자기 자리를 찾아 세상 위에 놓입니다.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진리를 감추라 하지 않고 비추라 하십니다.
등불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은폐되지 않고 드러나야 하며, 진리의 존재목적은 다른 이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총의 진리를 감추지 않고 삶으로 비추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모든 사람을 향한 초대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나누어지고 드러날 때 더욱 충만해집니다.
우리의 신앙 또한 개인적인 내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일터와 사회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등불을 등경 위에 올려놓듯이 일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빛의 맑은 삶입니다.
빛은 나눌수록 더 밝아집니다.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연결될 때 빛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등불은 등경 위에서 작고 소박한 빛이지만 나누어질 때는 누군가의 길을 밝히는 투명한 희망이 됩니다.
루카복음 8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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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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