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말씀묵상

25/09/18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9. 18.
반응형

 

 

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느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9월 18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티모 4,12-16)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7,36-50)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1티모 4,12-16
오늘 제1독서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12 아무도 그대를 젊다고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니 말에서나 행실에서나 사랑에서나 믿음에서나 순결에서나, 믿는 이들의 본보기가 되십시오. 

13 내가 갈 때까지 성경 봉독과 권고와 가르침에 열중하십시오. 

14 그대가 지닌 은사, 곧 원로단의 안수와 예언을 통하여 그대가 받은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15 이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일에 전념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더욱 나아지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도록 하십시오. 

16 그대 자신과 그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 일을 지속해 나아가십시오. 이렇게 하면, 그대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이들도 구원할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7,36-50
오늘 복음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에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18일
신동민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07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인 시몬의 집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 여인은 그 고을에서 소문난 죄인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바리사이의 집, 곧 경건함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이기에, 가면 경멸받을 것이 뻔한 그 사람의 집을 찾아갑니다. 굉장한 각오를 하였을 것입니다. 미움과 경멸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에 모든 것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갑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거기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발치에 서서 참회의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지극한 존경과 감사와 사랑의 표시로 자기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어 발랐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여기 오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 만남이 개인적이었든, 군중 속에서 그분 말씀을 듣는 정도였든, 그 만남은 마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커다란 위로와 희망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하여 빚 탕감과 사랑에 관한 말씀으로 설명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큰 죄인임을 압니다. 어찌할 수 없는 처지임을 압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자신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심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받은 그 사랑은 다시 주는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라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그가 마을 공동체 안에서도 새 삶을 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신성모독이라고 비난받으시며 신변에 위협이 올 수 있음에도 아랑곳하시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여인이 주님 앞에 나타나기까지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많은 것이 궁금합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은 어떤 여인인가?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나? 그렇게 많은 죄를 지은 여인이 왜 어떻게 주님을 찾아오게 되었을까?  

여인이 외간 남자를 만나러 온 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여인은 죄를 지은 여인이라고 주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말하는 것을 보면 죄지은 여자라고 널리 알려진 여인인 것 같은데 그런 여인이 어떻게 주님을 찾아올 수 있었을까요?  

주님이 남자였으면 아무리 죄인이었을지라도 찾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죄지은 여자라고 알려진 것을 보면 여인이 어쩌면 윤락녀였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렇다면 여인은 남자가 아니라 구원자를 찾아온 것입니다. 용서해 주실 주님이라는 믿음을 갖고 찾아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믿음을 주고 믿음이 가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아무리 자신이 믿음이 좋은 사람 곧 잘 믿는 사람일지라도 상대가 믿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고 그래서 믿음이 가지 않으면 잘 믿지 못합니다.  

곧 우리의 믿음은 상대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고, 또 우리는 함부로 믿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사실 아무나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 정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 믿음은 나의 전부를 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이비 신앙일수록 전부를 내놓으라고 하고 전부를 다 바치곤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믿지 않거나 믿을 경우 누구를 어떻게 믿을까 신중히 판단한 다음 선택하여 믿습니다.  

오늘 여인도 예수님 앞에 나오기까지 고민이 엄청났을 겁니다. 밤의 여인이 대낮에 사람들 앞에 ‘Coming out’하는(나타나는) 것인데 주님이 아니라면 드러내지 않을 것을 주님 앞이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인은 나타나지 않고 드러내지 않던 여인, 아니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옷으로 치면 구석에 처박아 놓은 더러운 옷이었지, 빨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처박아 놓은 옷이었던 그녀가 빨래가 되어 주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자기 죄를 깨끗이 그리고 정성껏 빨아주실 뿐 아니라 햇빛으로 말려주시기까지 하실 분이라는 믿음이 섰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를 단죄하고 멸시만 하여 꼭꼭 숨어 나타날 수 없었는데 이분만은 죄인을 찾아오셨다고 하니 자기를 나타내며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죄를 깨끗이 빨아 햇빛에 말려 빛나는 옷으로 재창조하실 주님의 발을 자기 눈물로 씻어드리고 그 비싼 향유로 향기롭게 합니다.  

이런 주님과 여인을 바리사이 시몬은 싸잡아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고 아쉬운 것은 바리사이는 이름이 있는데 여인은 이름이 없고 그저 죄인으로 불린다는 점입니다. 루카복음은 왜 이렇게 할까요?  

라자로 얘기에서는 가난한 라자로는 이름이 있고 부자는 이름이 없는데 여기서는 여인이 이름이 없고 바리사이는 이름이 있나요? 이 세상에서는 이렇지만 천국에서는 달라질 것입니다. 여인이 이름이 있고 시몬은 이름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죄 많은 여인이 부은 사랑의 향유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 때 있었던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이 자리에서는 ‘죄 많은 여인’이 영광을 입습니다. 죄 많은 그녀는 감히 예수님의 앞쪽에 나서지도 못하고 뒤쪽 발치에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셨습니다. 자신의 머리 위에 간직한 가장 고귀한 머리카락으로 땅에 붙이고 있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 발에 당신 입을 맞추고, 그 발에 자신의 전부인 옥합을 부수고 깨뜨려 그 발에 붓고 발라드렸습니다. 하여, 그 옥합의 사랑의 향기는 온 집안, 온 고을로 퍼져나갔습니다. 

교부들은 이 ‘죄 많은 여인’을 교회에 비유합니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교회 말고는 누구도 그런 향유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죄인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교회가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루가복음 해설) 

이러한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교회”의 아름다움은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선언으로 그 향기를 뿜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안에는 ‘죄 많은 여인’(교회)이 부은 사랑의 향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나는 왜, 공동체에 파고 든 그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내게 사랑이 없어, 사랑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까닭이 아닐까요? 오늘도 내 형제들은 예수님을 섬기며 발을 닦아드리느라 여념이 없는데, 그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 것은 결코 닦아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구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향유를 자신의 치장을 위해 쓰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요? 값비싼 것을 낭비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물질에 애착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사실, 오늘도 ‘죄 많은 여인’인 교회는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사랑을 쏟는데, 아직 그 사랑을 보지 못함은 구린내를 담고 있는 자신을 깨부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감추어 둔 채, 다 부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결국,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온 집안, 온 공동체를 사랑의 향유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이제는 온 집안에 가득 퍼진 이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종일토록 취할 일입니다. 내내 토록 찬미할 일입니다. 그 향기 온 몸에 묻혀, 바다소라처럼 향기 되어 날릴 일입니다.  

오늘 하루 이 그리스도의 향기에 흠뻑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이 세상을 향기롭게 만드시길 바랍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의 불순한 입이 당신의 발에 입 맞추고 거룩해지게 하소서! 저 자신을 깨뜨려 형제들의 발에 입 맞추는 사랑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7,47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주님!
제 영혼의 막힌 코를 뚫으소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쏟듯 
제 온몸에 쏟아지는 숨 가쁜 
당신 사랑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저를 부수어 
진한 향기의 피가 흐르게 하고 
부서질수록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온 집안에 베인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를 
내내 토록 찬미하게 하소서. 

많이 용서 받았기에
많이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 용서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

오늘 우리는 루카 복음에서 매우 대조적인 두 인물을 만납니다.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지만, 그 어떤 환대의 예의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반면, 그 동네에서 '죄인'이라 불리던 한 여인은 아무런 초대도 없이 잔치에 불쑥 찾아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며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시몬은 여인을 속으로 판단했고,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행동을 칭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보였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종종 용서와 무관심을 혼동합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덮어준다'고 하면서 사실은 '관심을 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나는 저 사람을 용서했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용서는 용서받는 사람에게는 더욱 깊은 외로움과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안겨줄 뿐입니다. 피 흘림 없는 용서는, 어쩌면 그냥 '귀찮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관계를 끊고 싶기 때문에,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의 잘못을 '외면'하는 것을 '용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창동 감독의 한국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 씨가 겪는 처절한 고통과 깊이 연결됩니다. 자신의 아들을 유괴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찾아간 신애 씨. 그녀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나는 당신을 용서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범인은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다며 평온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오히려 신애 씨는 더욱 큰 절망과 분노에 휩싸입니다. 왜 신애 씨의 '용서'는 그녀를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렸을까요? 

그것은 그녀의 용서가 '피 흘림의 용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신애 씨의 용서는 범인과 '같은 공동체로 함께 살아가려는' 용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용서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 모든 고통을 초월하여 당신을 용서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자기 의(義)를 증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용서 안에는 범인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함께 같은 공동체 안에서의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진정한 사랑의 피 흘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용서는 외려 범인에게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무관심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뿐입니다. 그 결과는 더욱 깊은 고립과 상처였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됐어, 알아서 해. 이제 너한테 더 이상 신경 안 쓸 거야'라고 말하며 등을 돌립니다. 겉으로는 '용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관심'과 '방임'입니다. 이 아이는 물리적인 학대를 당하지 않았을지라도,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깊은 외로움과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아무도 자신을 위해 애쓰려 하지 않는다는 절망감은 아이의 자존감을 짓밟고,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어른으로 자라게 합니다. 이러한 용서는 아이를 변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어둠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왜냐하면 그 용서 안에는 아이와 '같은 가족으로 함께 하기 위한 피 흘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고통과 희생이 담기지 않은 용서는 아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 나는 혼자다'라는 메시지만 전달할 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쿨한 용서'의 한계입니다. 나는 상처받기 싫어서, 더 이상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아서, 상대의 잘못을 '잊거나' '외면'하는 것을 용서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상대방을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진정한 사랑의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부모는 자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설령 그 잘못이 부모에게 큰 상처를 주었을지라도, 절대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와 함께 하기 위해 피를 흘립니다. 자녀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자녀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자 애씁니다. 그 과정에서 부모는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하고, 마음 아파하며, 때로는 희생과 고통을 감수합니다. 한 가족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용서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짜 용서인 것입니다. 

제노바의 성녀 가타리나(Catherine of Genova)는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과 세속적인 쾌락에 빠져 "행복한 날이 단 하루도 없었던 5년"을 죄악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결혼 10년째 되던 1473년, 고해성사를 받으러 간 성당에서 그녀는 황홀경에 빠져 자신의 죄악과 주님의 무한한 사랑, 그리고 그분께 자신이 얼마나 큰 고통을 드렸는지를 분명히 깨닫는 결정적인 체험을 합니다. 

며칠 후, 그녀는 다시 환시를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온몸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주님께서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가타리나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피가 보이니? 이 피는 너에 대한 사랑과 네 죄에 대한 보속으로 흘리는 것이다!’” 

이 주님의 말씀은 가타리나를 전율케 했습니다. 그녀는 이 환시를 통해 자신을 용서하시기 위해 창조주께서 어떤 고통과 피를 흘리셨는지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 피는 그녀의 죄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큰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개하며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돌보며 주님과 "하나 된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성녀의 고백처럼, 우리를 만드신 분만이 우리를 용서할 권한이 있으시며, 그 용서는 바로 당신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 피를 묵상할 때 우리는 비로소 '더 많이 용서받았다'는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마움에 그만큼 자신을 봉헌하며 그만큼 죄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용서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관계를 지속하고 회복시키기 위한 '함께 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가리옷 유다를 끊임없이 용서하셨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품어 안으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피 흘림을 동반하는, 끝까지 함께 하고자 하는 진정한 용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이 덩치에 맞지 않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벌레’입니다. 인간은 이 벌레보다 훨씬 큰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벌레 한 마리가 나타나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실험이 생각납니다. 
 
커다란 거미를 보여주고는 “이 징그러운 거미가 당신에게 뛰어오를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거미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귀여운 거미는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까이 가서 보려고 했습니다. 
 
어떤 이름표를 붙이느냐에 따라 생각과 행동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 안에서 이름표를 붙이곤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게을러. 나는 미루는 악습을 가지고 있어. 나는 아무 능력이 없어. 나는 필요 없는 사람이야.’ 등등의 이름표를 붙이고 또 그 이름표에 맞게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에게만 붙이는 이름표만 문제가 아닙니다. 남들이 나에게 붙이는 이름표, 또 내가 남에게 붙이는 이름표 역시 문제가 됩니다. 
 
실제로 이 이름표의 이름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름표를 붙여야 할까요? 긍정의 이름표, 되고자 하는 바람의 이름표, 무엇보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담긴 이름표를 붙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시몬의 집으로 초대받으십니다. 그런데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향유 옥합을 들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당시 여인의 머리카락은 명예와 신분의 상징인데, 이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은 것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는 행위인 것입니다. 
 
바리사이 시몬은 속으로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라고 말합니다. 시몬은 이 여자에게 ‘죄인’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채권자와 빚진 이들의 비유로, 누가 더 하느님께 더 큰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응답하게 되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라고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이름표를 붙여주십니다. 그리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하시면서, 새로운 이름표로 죄를 넘어 평화를 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이름표를 붙이고 있나요? 나에게 또는 나의 이웃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시합에서 져도, 머리가 터져버려도 상관없어. 15회까지 버티기만 하면 돼. 아무도 거기까지 가본 적이 없거든.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두 발로 서있으면, 그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뭔가를 이뤄낸 순간이 될 거야(영화 ‘록키’ 대사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루카복음 7장 50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오늘 성경 구절 이미지
다운로드

250918_오늘성경구절이미지.jpg
0.27MB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