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느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1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티모 3,14-16)
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 오늘 복음
(루카 7,31-35)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1티모 3,14-16
오늘 제1독서
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14 나는 그대에게 곧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이 글을 씁니다.
15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16 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그 옳으심이 성령으로 입증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당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시어 온 세상이 믿게 된 그분께서는 영광 속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루카 7,31-35
오늘 복음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17일
신승우 도미니코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03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이런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루카 7,34)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만으로는 비난과 멸시의 어감이 있지만, 왠지 너무 근엄하고 거룩하셔서 우리와는 동떨어진 듯한 예수님을 오히려 사람 냄새가 나고 더 친근하게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표현에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살고 계셨는지가 확연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분께서는 함께 먹고 마시는 분, 곧 친교를 나누시고 흥과 기쁨을 누리시는 분으로 사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 얼굴은 크게 웃으시는 모습에 가장 가까운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와 계신 것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듯이(5,34 참조), 지금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신 기쁨과 행복의 때임을 온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누구도 가리시지 않고 모든 이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멸시와 미움을 받던 세리들과 죄인들과도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보는 파격적이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에게 환영도 받으셨지만, “먹보요 술꾼”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미움과 반대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맞추는 삶을 사시지 않고, “지혜”(7,35)라고 표현하신 하느님의 뜻에만 충실하셨습니다. 그래서 당당하시고 주체적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의 뜻이 옳다는 것이 드러나고, 마침내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을 따를 것이라고 확신하시면서 모든 이에게 열린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 - 십자가 씨름
이번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을 준비하면서 느닷없이 최민순 신부님의 <오늘의 기도>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주님, 오늘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딪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편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더욱 깊은 믿음 주소서. 주님과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 주소서.”
이 시가 떠오른 것은 이번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을 준비하면서 말년에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고통과 사랑을 똑같이 겪게 해달라고 청한 프란치스코처럼 저도 말년에 그리 청할 수 있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그제 있었던 일의 영향임이 틀림없습니다. 그제 저흰 제가 미국에 살 때처럼 Crab Party(게 잔치)를 옥상에서 했습니다.
요즘 게가 싸고 맛있다고 하여 저희 쉼터의 탈북자들과 하였는데 날씨도 좋았고 옥상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저희뿐 아니라 탈북자들도 기분 좋게 옛날얘기도 하며 아무튼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파티 전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즐기기만 했습니다. 월요일이 원래 식당이 바쁘고 손님이 많은데 그제는 더 많아서 일을 끝내고 난 뒤 너무 피곤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제가 프란치스코와 같은 소원을 말년에도 빌 수 있을까요?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의 소원은 죽기 두 해 전 소원만이 아닙니다. 나환자를 통해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다음 한평생을 관통하는 소원이었습니다. 전기는 십자가의 주님을 만난 다음의 프란치스코를 이렇게 전합니다.
“얼마 후 그의 마음의 사랑은 그의 육신의 상처로 인해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자기 눈앞에 언제나 어른거리는 듯 그리스도의 수난을 큰 소리로 외치고 슬퍼하며 울음을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기억하느라 길거리를 한숨으로 채웠고, 어떤 위로도 마다하였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십자가는 내 사랑의 의지로만 질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의 의지만으로 십자가를 지기 시작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의지에서 시작된 사랑은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프란치스코의 사랑도 처음부터 주님의 십자가 위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큰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기도와 실천을 매일같이 한 일생의 결과입니다.
매일의 십자가를 주님 사랑 까닭에 지되 주님의 사랑을 매일같이 청하면서 진 것입니다. 이는 씨름을 잘하기 위해서는 씨름 연습을 매일 성실히 하는 것과 영양 섭취를 매일 잘해야 하는 것이 병행돼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 씨름도 마찬가지입니다. 관건은 일생의 성실입니다. 성실한 기도와 실천입니다. 그래서 최민순 신부님의 <오늘의 기도>를 다시 읊조리는 오늘 저입니다.
“주님, 오늘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님과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 주소서.”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완고함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2)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곧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에 대한 호소에도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기쁨에도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합니다. 곧 이 세대는 자기 죄악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도 없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기쁨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는 원인이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그들의 완악함과 악의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무관심과 완고함의 심각함을 말해줍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도 없고 바닥도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완고함의 뿌리에는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이 이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요한의 외침을 듣고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을 뵙고는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악의에 차 조롱하였습니다. 결국, ‘완고함’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공격이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이미 아픔입니다. 사랑은 거부, 배척이라는 가시에 찔려,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을 때,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거부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비뚤어진 왜곡된 마음과 악의가 아니라, 호의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예수님과 계시에 대한 간절한 요청을 받습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는 일입니다. 그러면 바로 지금이 말씀을 영접하는 순간이요, 바로 오늘이 임을 만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임과 더불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비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반겨 받아들이는 영접의 마음이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 피리에 춤추게 하소서! 세상 죄악의 곡소리에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픈 이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부활하신 당신과 함께 기쁨을 선포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임과 더불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7,32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디어 진 까닭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해버린 까닭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목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이 헐리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진리와 평화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혜의 종착지는 겸손한 기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시대 사람들을 향해 깊은 탄식을 쏟아내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그들은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 주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32)
예수님께서는 앞서 세례자 요한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며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셨고(7,29-30), 당신 자신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구원의 기쁨을 나누려 하셨습니다. 요한은 단식하는 금욕주의자로 왔건만 그들은 “마귀 들렸다”고 비난했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기쁨의 잔치에 함께하셨건만 그들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며 손가락질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으며 그 어떤 상황에도 불평만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왜 사람들은 그토록 노골적인 방식으로 하느님의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 어떤 기쁨과 슬픔의 부르심에도 무감각하고, 심지어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을까요? 저는 오늘 이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그 깊은 뿌리에는 인간의 ‘교만’이 숨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내가 내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나를 나 스스로 온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는 교만 말입니다.
2003년, 스티브 잡스는 우연한 건강 검진 도중 췌장에 암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그의 췌장암은 매우 희귀한 유형으로, 의료진은 “바로 수술하면 99% 치유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생명을 살릴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잡스는 의료진의 권고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놀라운 직관력과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안다. 현대 의학은 불완전하다. 나는 나 자신을 내가 알아서 치유하겠다”는 오만함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수술 대신 과일 위주의 식단, 침술, 약초 치료, 영매 치료 등 온갖 대체의학에 매달리며 1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 버렸습니다.
1년 뒤,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마침내 대체의학이 무용지물임을 깨달았을 때, 이미 암은 다른 장기로 전이되어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제야 수술대에 올랐지만, 이미 치유될 확률은 10% 미만으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결국 스티브 잡스는 2011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천재였지만, 정작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다른 분야의 최고 전문가, 즉 의사들의 조언을 교만 때문에 거부했던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이 비극적인 사례는 우리가 겪는 또 다른 형태의 교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기쁘고 슬픈 감정을 내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착각입니다. 우리는 기쁨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외부적 성공에서 찾고, 슬픔은 내가 극복할 수 있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치부하며 하느님 없이도 온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며, 창조주이신 하느님 없이는 불안한 감정을 진정한 평화로 바꿀 수 없고, 세상의 덧없는 기쁨을 영원한 기쁨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20세기 인지 치료의 창시자로 ‘정신의학의 황제’라 불렸던 아론 벡(Aaron T. Beck, 1921-2021) 박사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우울증과 불안 장애 치료에 혁명적인 인지 행동 치료(CBT)를 개발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한 위대한 의학자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과 사고방식을 스스로 통제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그의 치료법은 전 세계 정신과 의사들에게 교과서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적 능력과 치료법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그에게 엄청난 명성과 권위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인간의 감정을 통제하는 법'을 가르치는 스승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말년은 깊은 고독과 허무함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의 딸이자 역시 저명한 심리학자인 주디스 벡(Judith S. Beck)은 아버지의 100회 생일을 기념한 인터뷰에서 이런 언급을 합니다.
“아버지는 평생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의 깊은 감정적인 허무함이나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셨습니다.”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와 비슷한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큰 명예를 추구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성공 중독’은 우리에게 피리소리처럼 유혹적으로 들리지만, 결국 우리를 더 큰 불안과 공허로 이끕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자신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는 쾌락이나 권력 추구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고 실현하려는 ‘의미 추구의 의지’이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 이 의미를 찾으려 할 때,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끝없이 허무함과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를 찾아야만 이 세상 모든 고통을 참아낼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이미 유신론자입니다. 창조자를 만나지 않고 자기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이고, 빅터 프랭클이 지혜의 자녀입니다.
부모는 압니다. 어린아이는 자기감정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음을. 아이도 압니다. 부모 없이는 맛있는 음식이나 장난감이 소용없음을.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품 안에서 사랑받고 보호받아야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고, 기쁨과 슬픔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법을 배웁니다. 아이가 부모의 부름에 순종하고 의지할 때, 그 아이는 평화로워집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들(Alcoholics Anonymous, AA)’ 모임은 바로 이 ‘피조물의 겸손’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했습니다. AA 모임의 첫 번째 단계는 “우리는 알코올에 대한 무력함을 인정했고, 우리 자신의 삶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인정했다” 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술을 끊겠다는 의지를 넘어, 자신 스스로는 자신의 중독된 감정과 행동을 결코 통제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한계에 대한 처절한 자각을 의미합니다.
AA의 공동 창시자인 빌 윌슨(Bill Wilson)은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지성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 빌 윌슨은 병원의 침상에서 “하느님, 당신이 계시다면,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절규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자만과 통제하려는 의지를 내려놓고, 자신보다 훨씬 위대한 어떤 존재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놀라운 영적 체험이 일어났고, 그 후 그는 더 이상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경험을 바탕으로 AA의 두 번째 단계인 “우리보다 위대한 힘, 즉 하느님께서 우리의 온전성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가 탄생했습니다. 이 단계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창조주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는 영적 여정으로 이어집니다. AA 모임은 회원들에게 어떤 특정 종교를 강요하지 않지만, 모든 회원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자신보다 더 큰 ‘힘’, 즉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영적 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겸손한 고백을 통해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회복했습니다. 술은 자기 스스로 감정을 기쁘게 만들려는 노력이었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창조자와 그 창조자를 믿는 공동체에서 힘을 얻지 않으면 감정 회복이 불가능함을 안 이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가장 큰 피리를 불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의 사랑과 자비의 복음이며,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는 은총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깊은 곡을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눈물이며, 우리의 죄와 고통에 대한 당신의 연민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우리를 위해 흘리는 피와 눈물로 알아볼 수 있듯, 기쁨 또한 그 슬픔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믿음의 초대에 응답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2014년, 영국 뱅거대학교 연구진이 자기 대화의 효력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자전거를 더는 탈 수 없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는 ‘탈진 소요 시간’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2주 후에 다시 자전거를 타러 온 참가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었습니다. 한 집단은 스스로에게 “잘하고 있어!”, “해낼 수 있어!” 같은 격려의 말을 하게 했고, 다른 집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게 했습니다.
스스로 응원한다고 성과가 달라질까요? 크게 달라졌습니다. 자전거를 더 탈 수 없을 것 같은 탈진 소요 시간이 눈에 띄게 증가한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응원해도, 즉 나의 응원단이 되면 생산성이 향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응원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편이 없다고 힘들어하고, 자기의 부정적 결과를 다른 사람의 응원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먼저 스스로 나의 응원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고, 무엇보다 주님께서도 우리 편이 되어 힘을 주십니다. 자기 응원단의 자리가 없으면 주님의 자리를 비롯한 그 어떤 사람의 자리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 번 크게 스스로에게 외쳐보십시오.
“힘내라 힘! 잘하고 있다! 아자~~”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이 했던 모습을 이야기하십니다. 요한은 극도의 금욕 생활을 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마귀 들렸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를 나누셨는데, 또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난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그 어떤 방식이든 하느님의 손길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닫힌 태도를 꼬집으시는 것입니다. 이를 장터의 아이들 비유를 통해, 기쁨의 메시지도 또 회개의 메시지도 거부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루카 7,35)
지혜의 모든 자녀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닫힌 세대의 거부와 달리,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길을 따르는 이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편견과 완고한 마음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본질은 보지 않고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주님의 자리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자리를 만드는 사람만이 자기 응원단도 만들 수 있고, 이웃들과 함께하며 기쁨의 시간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존 메이너드 케인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계절도 우리와 공감하며 우리들 삶으로 들어옵니다. 공감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가장 아름다운 관계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는 기쁨으로, 때로는 슬픔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마음이 굳어 있으면 그 어떤 부르심에도 우리는 반응하지 못합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으로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춤추지 않고, 울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구원 사건 앞에서 응답하지 않는 우리의 영적 무감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타자의 기쁨과 슬픔에 반응하며 공동체적 존재로서 성장합니다. 인간의 고립과 단절은 공동체적 삶의 상실을 드러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민감성이 중요합니다. 공감은 단순한 감정이입이 아니라, 타인의 삶과 정서를 함께 경험하는 영적 동행입니다. 무감각한 마음은 영적 성장의 큰 장애물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하신지요. 타인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고, 타인의 슬픔에 함께 울며 살아가고 있는지요? 공감 없는 삶은 하느님의 지혜와 멀어진 삶입니다. 공감하지 못하는 마음은 하느님께 응답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공감은 영적 열림이며 참된 응답이며 진정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공감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마음의 길이자,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우리의 영적 능력입니다. 참된 공감으로 진정한 인간다움을 살아가는 공감의 오늘 되십시오.
티모테오1서 3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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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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