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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9/14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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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리라. 주님은 우리 구원이요 생명이며 부활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구원과 자유를 얻었네.

하느님, 외아드님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으니 저희가 지상에서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천상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9월 14일 (일)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1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민수 21,4ㄴ-9)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 제 2독서
    (필리 2,6-1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오늘 복음
    (요한 3,13-17)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민수 21,4ㄴ-9
오늘 제1독서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4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필리 2,6-11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요한 3,13-17
오늘 복음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14일
이일환 바오로 신부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소개 00:06

✚ 서울 동작동성당 소개 01:10

✚ 미사시작 02:07

✚ 강론시작 16:55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방식을 따라야 해

오늘 제1독서에서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였습니다. 게다가 이 여정은 양식도 물도 부족하고 고생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 해방의 여정을 후회하고 불평하며 주님을 원망하였고, 주님께서는 이들의 죄에 불 뱀을 보내셨습니다. 이 장면만 보면 우리는 하느님을 벌하시는 분이시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오늘 독서 전체의 틀 안에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지 않았다면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불 뱀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통회할 수 있었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느님께 뱀을 치워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으라고 하시며,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 21,8)라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뱀이 없어지는 것을 구원으로 여겼지만, 하느님께서는 뱀을 바라보는 것으로 구원을 주셨습니다. 자신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에 따라 우리 죄와 그에 따른 결과를 마주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구원자로 보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바라보며, 우리는 죄인인 우리 자신의 모습과, 죄에 대한 그 값을 치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죄인이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사랑하시는 나를, 또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 안에서 그 값을 치른, 구원된 나를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죽을래? 살래?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그냥 십자가 현양 축일이 아닙니다. 그냥 십자가는 당시 가장 끔찍한 사형 틀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우리가 현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사형 틀에 주님께서 스스로 못 박히셨기 때문이고, 사랑 까닭에 또 승리하기 위해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선 주님의 사랑을 현양합니다. 성 십자가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겁니다. 떠밀려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는 보통 그리스도의 수난(Passio Christi)이라고 합니다.

수난(受難)을 직역하면 어려움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지만,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고, 사랑 까닭에 죽음의 십자가를 달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사랑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만 Passio이지 무의미하게나 억지로 받아들인 것은 Passio가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처럼 사랑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는 생명의 형틀로 바뀝니다.

사랑의 승리요 Passio의 승리이고, 이것이 죽음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믿고 현양하는 사람만이 죽음을 이기는데 이것이 오늘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생명과 승리의 처방이라는 뜻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불만으로 죽게 됩니다. 왜 불평불만을 하게 됐냐면 마음이 조급해졌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는 것이 다른 번역에서는 참지 못하여 또는 인내심이 바닥나서로 번역되는데 어쨌거나 눌러왔던 여행의 불만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터트린 것이 불평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편히 살고 싶은 것이 그들의 욕구이고,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그들은 지금 욕구불만이고 불평한 것인데 하느님께서도 그 불평을 내내 참아주셨다가 이번에는 작정하십니다.

참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도 이젠 더 이상 참지 않으시고, 극약처방을 내리시는데 죽을래 살래 물으시는 겁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싫어 광야에서 죽을래 고통스럽지만 끝까지 계속 가 살래 물으시는 것이고,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어쩔 수 없이 둘 중의 하나 선택해야 합니다.

고통을 못 견디겠다는 사람은 죽음을 선택할 것이고, 어떻게든 살겠다는 사람은 고통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백성들은 사는 쪽으로 선택했고 고통을 감수하기로 선택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리 뱀을 높이 달고 직시하고 직면하는 것입니다.

최악인 죽음을 직시하면서 차악인 고통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리학에서도 얘기하는 두려움(Phobia)을 이겨내는 방법입니다. 두려움은 피하고 도망칠수록 더 두려워 지게 되어있기에 직면해야지만 이길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직면해야 하는데 직면할 수 없고, 사랑 그것도 Passio의 사랑으로만 직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범으로 보이신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선택이고,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 거룩한 십자가를 현양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십자가에 대한 묵상 네 가지

오늘 우리는 “감사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희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지난 9월 11일에 “원장좌 수도원” 곧 ‘모원 예속수도원’에서 ‘자율수도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수도원이 창설된(2016.4.10) 지 약 9년이 지났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우리는 오늘 감사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일들이 많은 사연과 함께 훌쩍 지나갔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작품이 기억납니다.

어느 날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한 천사를 불러, 산골에 살고 있는 어느 여인의 영혼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 천사는 혼자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너 혼자서 돌아왔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그 여인은 너무나 불쌍해서 도저히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여인의 남편은 어제 나무에 깔려 죽었고, 이제 막 쌍둥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를 데려오면 그 갓난아이들은 누가 키우겠습니까? 그래서 차마 그 여인을 데려올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질책하며 다시 천사에게 명령했습니다. “너는 속히 가서 그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 그리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해답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하늘나라에 되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할 수 없이 산골로 내려가 여인의 영혼을 빼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불어 천사의 날개가 떨어지고, 천사는 그만 땅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천사는 지상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어느 날 한 부인이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신발을 사러 구둣가게에 왔습니다. 천사는 두 아이를 한참 들여다 본 후에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어머니입니까?” 그러자 부인은 “아니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6년 전의 일이었지요. 이 애들의 아버지가 숲 속에서 나무에 깔려 죽고, 어머니까지 느닷없이 죽고 말았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 젖먹이 아이를 기르고 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이 갓난아이들을 나에게 부탁했지요. 그런데 그 다음 해 그만 내가 낳은 아이가 죽게 되었고, 결국 그래서 이 아이들이 나의 아이들이 되어 버렸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흘러나왔습니다. “오!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면 그 누구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로구나! 그래, 맞아. 사람은 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는 거야” 바로 그 때 천사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곧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천사는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왔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고서는 이 날, 이 자리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납니다.

특별히, 오늘은 ‘십자가’에 대한 묵상 네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때라야 비로소 십자가는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기보다 의인임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는 일은 억울하고 원망스런 일이 되고 맙니다. 부당한 처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둘째>로는 ‘십자가’는 ‘죽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일이요, 남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일이 아니라 물러나는 일입니다. 승리하는 일이 아니라 패배당하는 일이요,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변두리로 밀려나는 일이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 당하는 일입니다.

<셋째>로는 ‘십자가’는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곳’입니다. 그것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가 잘 되기를 바라며 하는 일이요, 그가 구원되기를 희망하여 자신을 건네주는 일이요,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을 향하여 자신을 바치는 봉헌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승리요, 구원이 됩니다. 곧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으로 참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넷째>로는 ‘십자가’는 ‘벌어지는 일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삶은 그 어떤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내가 만들지 않아도, 만들지 않은 일들이 마구 벌어져 다그쳐옵니다. 오히려 만들고 계획하고 꾸몄던 일들은 무색하리만큼 우리를 비켜갑니다. 반면에,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바로 그것들을 ‘사랑으로’ 마주하고 끌어안고 응답하는 일이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무력함이지만,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입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고, 패배이지만 승리가 됩니다. 지면서도 쳐부수는 승리의 깃발이 되고, 영광의 월계관이 됩니다. 그야말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요, 완전한 승리의 표상이요, 현양이며 영광이 되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삶의 의미가 되고, 우리 삶을 전환시키는 혁명이 됩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저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규칙서 머리말 30 참조). 아멘.
.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3,13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주님!
당신은 패배하셨지만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으셨지만 죽음을 넘어 
다시 살아나셨고, 
추락하셨지만 
드높이 들어 올려 지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내려갈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추락할 줄을 알게 하소서.

하여, 당신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하여, 제 안에 숨겨져 있는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십자가는 선택적 예언이다.

이번 주일은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냅니다.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핵심입니다. 이 십자가 현양 축일이 나에게 의미 있는 날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로 구원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 구원의 핵심이 되게 할 것인지에 대해 묵상하겠습니다.

인간은 본래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자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탈출기에서 당신을 ‘나다!’로 표현하십니다. 우리 안에 ‘나’가 있는데, 당신을 ‘나’로 표현하시니 헛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 짓눌린 상태의 상징적인 모습이 탈출기에 나옵니다. 우리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면 우리는 옛 자아인 ‘파라오’의 명령에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존 욕구, 곧 탐욕-성욕-지배욕으로 우리를 종살이시킵니다. 이 욕망 때문에 고생하며 죽어간 이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예언’이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시어 파라오의 뱀을 물어 죽이는 또 다른 뱀을 모세에게 주신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뱀으로 변하여 파라오의 뱀을 잡아먹습니다. 광야에서 이 상징은 더 완전한 예언이 됩니다. 바로 구리뱀을 장대에 매다니 뱀에 물렸던 이들이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구리뱀은 어떻게 내 안의 뱀의 독을 없앨 수 있을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예언을 ‘성취하고 실현’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대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마치 죽지 않는 구리로 된 뱀처럼, 당신을 죽이셨지만 부활의 영광으로 되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덕분으로 이제 뱀의 예언이 십자가의 예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예언을 성취하면 구원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을 성취한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는 못합니다. 구리뱀의 예언 자체가 예수님께 구원이 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예언은 우리 안에서 성취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믿음과 구원은 그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예는 영화 ‘매트릭스’만 한 것이 없습니다. 네오가 믿음을 찾아가는 과정을 SF로 그린 영화입니다.

네오는 모피어스에 의해 자신이 선택된 자, 바로 ‘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네오는 잘 믿지 못합니다. 모피어스에게 훈련도 받지만, 점프 프로그램에서는 언제나 땅에 고꾸라지고 맙니다. 그는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믿음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네오는 예언자를 찾아갑니다. 예언자 오라클은 “넌 ‘그’가 아니야. 미안하구나, 얘야.”라고 말합니다. 이는 정말 ‘그’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아직은 그 믿음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을 해 줍니다.

“모피어스는 널 너무나 굳게 믿고 있어서…. 널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거야. 너는 선택을 해야만 해. 한 손에는 모피어스의 생명이, 다른 한 손에는 너 자신의 생명이 달렸지. 너희 중 한 명은 죽게 될 거야. 누가 죽을지는 네게 달렸어.” 

네오는 모피어스가 스미스 요원에게 붙잡히자, 오라클의 예언이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그리고 ‘선택’을 합니다. 모피어스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기로. 모피어스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네오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매트릭스의 규칙을 서서히 무시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믿는 만큼 강해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믿음은 마지막 시험대에 오릅니다. 스미스 요원과의 최후의 대결에서 네오는 총에 맞아 심장이 멎고, 그의 생체 신호는 끊어집니다. 트리니티는 죽은 네오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오…. 난 더 이상 두렵지 않아. 오라클은 내가 사랑에 빠지게 될 거라고 했고, 그 남자가 바로 ‘그’가 될 거라고 했어. 그러니 넌 죽을 수 없어. 넌 죽을 리가 없어. 사랑해.” 

트리니티의 입맞춤과 함께, 멎었던 네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매트릭스 안에서 쓰러졌던 네오가 눈을 뜹니다. 이 ‘부활’의 순간, 네오는 마침내 모든 의심을 떨쳐냅니다. 그는 더 이상 매트릭스를 현실로 보지 않고, 그 본질인 녹색의 데이터 코드로 꿰뚫어 봅니다. 스미스 요원들이 쏘는 총알은 그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총알들을 허공에 멈춰 세웁니다. 이때의 네오는 더 이상 ‘믿는’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는’ 단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완벽하게 깨달은 ‘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모피어스는 모세입니다. 네오는 모세의 예언을 살리기 위한 그리스도입니다. 오라클은 모든 것을 계획하신 하느님 아버지와 같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의 예언을 성취한 십자가에 달린 네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십니다. 그래서 트리니티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죄에서 해방하실 분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도 나에게는 여전히 ‘예언’입니다. 이 예언을 나에게 그리스도처럼 실현해야 합니다. 저도 사제로 불림을 받았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고 계심을 믿고 싶었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생애는 그분의 뜻에 그리스도를 위해 나 자신을 내어놓기로 선택합니다. 이 ‘선택’이 믿음을 주었습니다. 바로 신학교 들어가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 성령을 받음이 곧 나 자신의 죽음이요, 새로운 정체성으로의 부활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분께서 나를 사제로 부르셨음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작은 죽음으로 많은 이들의 죄가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내가 먼저 하나의 예언으로 실현시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예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듯, 그분 십자가의 예언은 나에 의해 성취되고 실현될 때 그것이 나의 구원이 되고 이웃의 치유가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내 뜻을 못 박아보십시오. 이건 선택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한다.

본당 신부에게 하루 휴식은 월요일 새벽 미사 후의 시간입니다. 저 역시 온전히 쉬기 위해, 월요일만큼은 약속을 잡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종종 어쩔 수 없이 모임에 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모임이 중요하기에 빠질 수도 없습니다. 이때 기분이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당연히 좋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일주일 중에 하루 쉬는 날인데, 굳이 이날 모임을 해야 하냐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막상 모임에 참석하고 나서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모임 전에는 짜증이 나지만, 모임 후에는 기쁨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지향은 대부분 편안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면 힘들어하면서 화를 내기도 합니다. 이 불편함을 실패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반대로 편안하고 쉬운 삶을 성공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삶 안에서 보면, 불편함을 피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일단 뛰어들었을 때, 더 좋은 상황을 맞이할 때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 안에서 더 발전된 ‘나’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뇌는 게을러서 편안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려 합니다. 문제는 이를 선택했을 때, 당연히 더 나은 상황을 맞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성당 가는 일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굳이 가야 하나 싶고, 하루의 편안함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보다 불편함을 선택하면서 얻는 기쁨이 훨씬 큽니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합니다. 행복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스마트폰을 보고, 또 이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 가장 편안한 순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마트폰에 빠져서 하루를 보낸 뒤에, “오늘 좋은 하루였어.”라고 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삶을 보낸 뒤에야 “그래도 잘 산 하루였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려고 몸소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굳게 믿을 때, 우리의 죄와 상처는 치유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고,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듯,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구리 뱀을 본 사람만이 살아난 것처럼, 주님을 보고 주님을 믿는 사람만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각자를 위해서도 반드시 주님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보다 다른 것에 더 집중합니다. 진정한 편안함은 주님 안에 있는데, 그냥 순간의 만족이 진짜 편안함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주님을 선택하고 따르는 것을 영원한 불편함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에 집중하면서 진정으로 편안함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강인한 사람만이 너그러울 수 있다(레오 로스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십자가 현양(顯揚) 축일은 십자가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절정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며, 우리의 상처와 죄까지도 껴안으신 포용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사랑의 깊이를 배우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현양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말씀처럼, 사람의 아들의 정체성은 십자가에서 사랑을 완성하신 분임을 드러냅니다. 십자가 없이는 예수님의 사명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세상 눈에는 십자가가 패배처럼 보이지만, 사실 십자가는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어 올려지는 순간이며,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십자가와 사람의 아들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참된 경배는 단순한 외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현양하는 자리이며, 인간의 죄가 드러났지만 동시에 그 죄가 용서받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구원에 동참하게 됩니다. 모든 이가 그분 안에서 생명으로 초대받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생명이며, 생명은 십자가로 드러난 하느님 사랑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바로 생명과 구원의 오늘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필리피서 2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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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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