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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9/1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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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9월 11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콜로 3,12-17)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27-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콜로 3,12-17
오늘 제1독서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6,27-38
오늘 복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11일
한정식 야고보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6:49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원수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원수’를 아주 좁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없을 수 있겠지만, 내가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원수라면 저마다 주위에 그런 사람은 꽤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가족이 원수인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소극적으로는 피하거나 상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뒷담화를 하거나 나쁘게 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구체적 모습까지 제시하십니다. 잘해 주고 축복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루카 6,27-28 참조).

솔직히 미운 사람에게 그렇게 해 주면 그들이 잘될 것 같아서 싫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모른 체하거나 거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우리는 늘 미움이라는 마음속 감옥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건강까지 해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싫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시간은 걸리겠지만, 차츰 그 마음에는 미움 대신 사랑이 자리 잡아 자신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우리 자신의 해방과 기쁜 삶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은총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 내용을 제가 이해한 대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무슨 은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데는 은총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당신 말씀을 따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 말씀을 실천하겠다는 우리의 응답도 있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바뀌어야 한다. 사랑과 원수에 대한 생각이! 

오늘 루카복음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태오복음에서 군중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릅니다. 그리고 마태오복음이 세리나 이방인과 비교하는 것에 비해 루카복음은 죄인과 비교하며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이나 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 꿔주는 것 등은 죄인들도 하는 것이니 우리가 진정 당신의 제자라면 그들과 달라야 한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진정 이런 자부심이랄까 영적 우월의식은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적인 우월감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고 죄이기에 가지면 아니 되지만 주님의 제자라면 죄인들과 달라야 한다는 우월의식,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는 초월의식은 꼭 가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우월의식 또는 초월의식을 가져야 하고, 그것은 죄인들의 사랑이나 자비와 비교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 내 사랑과 비교해 더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정도의 내 사랑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요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문제는 어떻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게 되느냐 그건데 제 생각에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원수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선 원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원수란 나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불행까지 이르게 한 사람이 아니면 아직 원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진 그가 나를 불행하게 만든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주님 말씀으로 행불행의 기준이 바뀌었습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누가 너희를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고 반대로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그 기준이 이 세상이 아니라 저세상이었지요.

여기서 행복하면 저세상에서 불행하고, 여기서 불행하면 저세상에서 행복한. 이 세상 행복에 만족하고 안주하면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지 않기에. 그래서 원수도 이제 바뀌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만족케 하는 자가 원수이고, 이 세상에서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자가 벗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 부끄러움, 모욕과 학대 순교와 죽임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그것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사랑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도 바뀌어야 합니다.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고 조건에 좌우되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라고. ‘어떤’이라는 조건에 좌우되어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되고, ‘사람’이면 무조건 사랑해야 참사랑입니다.

잘해 주는 사람이면 나도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미워한다면 그에 의해 곧 그의 조건에 의해 내가 좌우되는 곧 사랑도 미워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너에 의해 사랑하게도 되고 미워하게도 되는, 그런 사랑은 이제 안녕이라고 말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방법 4가지

세상에는 내가 잘했던 잘못했던,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거나 뺨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나요?  

만약 우리가 그들이 한대로 되돌려주거나 보복한다면 그것은 하책이요, 그들을 사랑하기를 멈춰버린다면 그것은 중책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다면 그것은 상책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상책을 행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신 뒤에,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대상을 가리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자비를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그것을 내어줄 수가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앞의 둘은 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뒤의 둘은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둘을 행하게 되면 나빠지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이요, 뒤의 둘을 행하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그것은 우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곧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엎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가 울려 퍼져 타인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주님!
제 안에 심으신 당신의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용서도 받아야만 할 수 있다. 그러나 받았음을 기억하지 못하면 가진 게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가장 어려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형제자매 여러분, 마음속에 ‘원수’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 내 삶을 망가뜨린 사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얼굴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오늘 말씀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이 명령 앞에서 우리는 깊은 무력감에 빠집니다. ‘주님, 다른 것은 다 하겠지만, 이것만은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용서하지 못할까요? 왜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상대를 판단하고 미워하는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내가 한때 ‘원수’였다는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도 용서받았음을 기억해낸다면 ‘양심상’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한때 부모의 원수였습니다. 부모님께 아무것도 드리는 것 없이, 그분들의 살과 피를 빨아먹는 모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들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살아있습니다. 이 기억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오직 자신이 가진 것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용서받은 기억이 없다면, 나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내어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저 사람은 용서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한 유다인 남자의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의 이름은 시몬 비젠탈,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나치 사냥꾼’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하던 중, 한 간호사에 의해 어떤 병실로 불려 가게 됩니다. 그곳에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죽어가던 21살의 나치 SS 친위대 병사가 누워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비젠탈의 손을 잡고 자신의 끔찍한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우크라이나에서 한 마을의 유다인들을 건물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학살했으며, 불타는 집에서 뛰어내리는 한 가족에게 총을 쏘아 죽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애원했습니다.

“나는 이제 곧 죽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유다인이니, 당신에게만이라도 용서를 받고 죽고 싶습니다. 제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비젠탈은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병사의 손을 뿌리친 채 병실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포기했습니다. 평생을 나치 사냥꾼으로 살다가 훗날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해바라기』라는 책을 썼고, 전 세계 지성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라면 그를 용서했겠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주님과 함께라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여기, 비젠탈과 똑같은 지옥을 겪었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마퀼레 일리바기자,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의 생존자입니다. 

그녀는 후투족 학살자들이 칼을 들고 “바퀴벌레들을 찾아 죽여라!”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좁디좁은 화장실에 다른 일곱 명의 여인들과 함께 91일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녀가 사랑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오빠는 모두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살인자들을 향한 증오와 복수심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지옥 같은 화장실 안에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쥐여주셨던 묵주를 손에 들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묵주기도를 바쳤고, 기도가 깊어질수록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작은 거짓말들, 이웃에 대한 이기적인 마음들…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학살자들의 죄는 헤아릴 수 없이 크지만, 하느님 보시기에는 나의 작은 죄 또한 용서가 필요한 죄이구나.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용서해주시는데, 내가 뭐라고 감히 저들을 용서하지 못하겠는가?’ 그리고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녀 안에 ‘용서받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서 받은 기억을 되살리는 시간이 자녀에게는 음식을 먹는 시간이고, 신앙인에게는 성찬례입니다. 미사 때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그 신비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용서를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베트남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응우옌 반 투언 추기경님은 공산 정권에 의해 13년간 감옥에 갇히셨습니다. 그중 9년은 독방이었습니다. 그를 가두었던 간수들은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지만, 단 하나 빼앗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사를 봉헌하려는 그의 열망이었습니다. 그는 가족들이 몰래 넣어준 포도주 몇 방울을 감기약 병에 담고, 작은 빵 부스러기를 손바닥에 얹어, 매일 밤 자신의 손바닥을 제대 삼아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매일 밤, 성찬의 말씀을 통해 저는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 손바닥 위의 빵 부스러기는 저에게 ‘살아있는 제대’가 되었습니다. 그 제대 위에서 저의 모든 고통과 미움은 예수님의 고통과 사랑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를 가둔 간수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미사는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의 용서가 나의 용서가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의 사랑이 되는 기적의 장소입니다. 저도 미사 안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음성을 듣고 미워지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미사의 힘, 용서받은 기억이 한 인간을 얼마나 위대하게 만드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분이 바로 성녀 마리아 고레티와 그녀의 어머니, 아순타 고레티입니다. 

1902년, 그녀의 열한 살 난 딸 마리아가 이웃 청년 알레산드로 세레넬리에게 순결을 지키려다 열네 군데나 칼에 찔려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딸의 마지막 말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를 용서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용서 힘은 며칠 전에 했던 첫영성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순타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그녀에게 알레산드로는 평생을 증오해도 모자랄 원수였습니다. 수십 년이 흘러, 알레산드로는 27년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성탄 전야, 그는 마리아의 고향 마을 성당을 찾아가, 미사에 참례하러 온 늙은 아순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 아순타는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딸 마리아가 너를 용서했고, 하느님께서 너를 용서하셨는데,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지 않겠느냐?” 

용서는 받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온 마을 사람들이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딸을 죽인 그 원수의 팔을 잡고 함께 제대 앞으로 나아가 나란히 성체를 모셨습니다. 성체 안에서, 그녀와 알레산드로는 ‘피해자의 어머니’와 ‘가해자’가 아닌, 똑같이 용서받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서도 용서가 안 되면 더는 희망은 없습니다. 그만큼 용서받는 시간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어느 자매님이 세 번째 아이를 출산하였습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애국자 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너무 힘들었습니다. 사실 세 번째 아이니까 육아가 이제 익숙하고 훨씬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더 힘들고 다른 아이들도 보살펴야 했기에 더 바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아한 육아는 불가능했고, 한 손으로 애를 안고 집안 살림을 해야 하는 고된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당 반장님이 찾아와서는 어려운 반원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다면서 기도 목록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진짜 바쁜데, 내가 더 힘든데’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서 기도할 시간이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안 바빴다고 말할 때가 있었나? 여유 있을 때는 기도를 많이 했을까?’ 
 
그 뒤 틈틈이 기도했습니다. 애 안고 걸어가며 기도하고, 아기 재우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덕분일까요? 아이가 아프지도 않고 잘 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이라도 생각했던 아이가 더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를 찾으면서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자매는 말합니다. 기도는 결국 나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자기 마음부터 변화시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욕하겠습니까? 사랑의 마음이 자리 잡으면서 자기도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이 담기면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외면하면 더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을 강조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 각자가 잘 살 수 있도록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을 뛰어넘습니다. 적극적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루카 6,31)의 황금률을 말씀하시면서, 조건 없는 사랑을 즉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 되는 길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 6,38)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 머물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계산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이 많습니다. 이 정도 받아야 나도 이 정도 베풀 수 있다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의 자녀와 다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야 우리가 받을 상이 클 것(루카 6,35 참조)입니다.

 

오늘의 명언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랜터 윌슨 스미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모두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아가도록 부름받은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자비는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상대의 상처와 아픔을 깊이 품고 함께하는 하느님의 성품입니다. 자비는 힘 있는 사람의 베풂이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만나는 사랑입니다.

신앙인들의 관계를 살아 숨 쉬게 하는 힘은 자비입니다. 자비로운 마음이 없다면 공동체는 냉혹한 제도에 머물고,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지 못합니다. 자비는 신뢰를 낳고, 신뢰는 다시 마음의 문을 엽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는 선택이 아니라 본질입니다. 참된 자비는 타인에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필요합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큰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자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서와 이해로 드러나며, 그 결단은 함께 성장하기 위한 길입니다. 우리의 한계와 상처를 포용하지 않고서는 더 큰 차원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상처를 어루만지고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명령은 곧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죄인들과 식탁을 함께하신 자리에서, 십자가 위에서 원수까지 용서하신 사랑은 자비의 절정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늘 하루가 작은 이해와 따뜻한 배려로 채워져, 하느님을 드러내는 자비의 일상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자비는 오늘을 하느님 나라로 만드는 가장 좋은 실천입니다.

 

 

 

콜로새서 3장 15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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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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