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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9/12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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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9월 12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12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티모 1,1-2.12-14)
    나는 전에 그리스도를 모독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39-42)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1티모 1,1-2.12-14
오늘 제1독서

나는 전에 그리스도를 모독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1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나 바오로가, 

2 믿음으로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12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13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14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6,39-42
오늘 복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12일
왕원동 대건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12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선함을 발견하는 눈길

우리는 저마다 지닌 신념과 판단 기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저마다 다를 수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불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못이라고 판단하고 뒷담화를 하거나, 지적하고 고쳐 주려는 상황에서 충돌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자기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고집합니다. 실제로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형제의 잘못이나 분명한 허물과 흠집을 뜻하는 “티”(루카 6,41)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형제의 잘못보다 더 큰 우리의 잘못, 곧 “들보”(6,41)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 들보는 무엇일까요? 

저는 형제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형제의 잘못을 판단하는 우리의 기준 자체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형제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그분을 닮은 이, 곧 사랑을 지닌 이만이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에 사랑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잘못하고 있는 형제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 올바른 시선을 제시합니다. 분명 사도가 잘못을 저질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잘못을 바라보시기보다 그를 이해하시며(“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1티모 1,13]) 심지어 그에게서 선함을 발견하는 눈길(“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1,12])을 지니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은 사랑의 눈길로 우리 형제를 본다면, 그제야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고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시선성찰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요즘 조금 피곤하면 눈으로 피곤의 증세가 나타납니다. 오른쪽 눈 실핏줄이 종종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하러 가면 같이 일하는 자매가 신부님 또 눈이 빨개졌다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보지 못했기에 그때야 알게 됩니다. 이는 제가 저를 잘 보지 않는다는 표시지요.  

거울을 잘 안 보거나 거울을 보더라도 저를 잘 들여다보지 않거나 저를 보더라도 얼굴이나 머리가 흐트러졌나 보기는 해도 제 눈을 들여다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제 눈을 보지 않는 저에 대해 생각하곤 했는데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는 본다는 오늘 주님 말씀 덕분에 다시 제 눈을 보지 않는 저에 대해서 곧 ‘내가 무엇을 보는지’ 보지 않는 저에 대해 성찰했습니다.  

남은 잘 보고 자기는 잘 보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사실 우리 눈이란 게 상대를 보게 되어 있지 자기를 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면 자기를 보지 않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식 성찰이란 말이 있듯이 시선 성찰이랄까 관상 성찰을 해야 합니다. 내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주로 뭘 보고 있는지 나를 보는지 남을 보는지, 나를 얼마나 자주 보는지, 남을 보더라도 남의 단점만 보는지 장점도 보는지, 하늘을 보는지 땅을 보는지. 하늘을 보면 얼마나 자주 보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시선의 또 다른 문제도 성찰해야 합니다. 곧 나의 잘못을 보지 않기 위해서 남의 잘못을 보고, 나의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남도 잘못한다고 하며 나의 잘못은 작다고 하기 위해 남의 잘못을 크게 만드는 잘못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 돌을 던져서 죽이려고 했던 요한복음 8장의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죄를 간음한 여인의 죄로 감추려는 인간의 집단심리를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고 하시면서 자기 죄들을 보게 만들자 그들은 늙은이부터 모두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남의 죄를 보지 말 것입니다. 나의 죄를 보지 않기 위해 남의 죄 보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죄를 보려고 애써야 하고, 없애기 위해서는 더 애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없애기 싫어서 보기 싫어하는 것이고, 없애기 싫어서 내 죄에 대해 눈 감는 것이며 없애기 싫어서 남의 죄 손가락질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사랑으로 받아들여라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호의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호의로)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42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 눈의 들보를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거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형제자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총을 든 강도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분명히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기 눈에 들보가 박혀있는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이끌겠다고 나서는 ‘눈먼 인도자’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들보(δοκός)’는 단순히 큰 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 원어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면, 이 ‘들보’는 집의 구조를 떠받치는 거대한 ‘대들보’나 ‘기둥’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의 들보는, 나의 영혼이라는 집의 구조 자체를 뒤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즉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설 수 있다고 믿는 ‘옛사람’의 자아(에고) 시스템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 교만이라는 대들보가 나의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있기에, 나는 다른 사람은 물론 나 자신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소경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누군가를 이끌려 할 때, 가장 끔찍한 비극이 시작됩니다. 

옛 사람인 ‘자아’의 시스템대로 살면서 타인을 이끌려다가, 그들 모두를 구덩이에 빠뜨린 비극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21세기 실리콘밸리가 낳은 최악의 사기꾼으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홈즈입니다. 

그녀는 19살에, 피 한 방울로 200가지가 넘는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테라노스’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녀는 검은 터틀넥을 입고 스티브 잡스를 흉내 냈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비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술은 처음부터 거짓이었습니다. 기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사기였습니다. 그녀의 ‘자아 시스템’, 즉 소유욕(수조 원의 투자금)과 지배욕(세상을 바꾸는 기술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은 그녀의 눈을 완전히 멀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에게 자신의 들보를 비춰줄 거울이 없었을까요? 그녀의 부모는 딸의 ‘성취’에만 열광했고, 실패를 감추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훗날 거대한 사기극으로 무너진 엔론의 부사장이었습니다. ‘성공하는 나 = 사랑받는 나’라는 등식 속에서 자란 그녀에게,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곧 존재 가치를 잃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자기 눈의 거대한 들보를 보지 못한 채, 수많은 사람들을 ‘혁신’이라는 이름의 구덩이로 함께 끌고 들어간, 우리 시대의 가장 무서운 ‘눈먼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은 너무나 잘 보이지만, 정작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들보는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참모습을 비춰줄 깨끗한 ‘거울’이 필요합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 수도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수사가, 성당 창문을 닦고 있는 늙은 수사에게 다가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수사님, 저 형제는 너무 게으르고, 저 자매는 너무 말이 많습니다. 이 수도원은 온통 고쳐야 할 것투성이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늙은 수사는 말없이 젊은 수사를 데리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낡은 거울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소매로 거울의 한가운데, 젊은 수사의 얼굴이 비치는 부분만을 깨끗하게 닦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먼지투성이 거울 속에, 젊은 수사 자신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늙은 수사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형제여, 세상을 바꾸고 싶거든, 가장 먼저 이 거울부터 닦아야 한다네.”

우리 신앙인에게 이 거울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나는 네게 내 목숨까지 다 주었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기심이라는 들보를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비추시는 유일한 거울입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바라바 역할을 맡았던 이탈리아 배우, 피에트로 사루비의 이야기는 이 진실을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그는 원래 베드로 역할을 맡고 싶었지만, 멜 깁슨 감독은 그의 험악한 인상을 보고 바라바 역을 맡겼습니다. 감독은 그에게 한 가지 이상한 요구를 했습니다.  

“촬영 마지막 날까지, 절대 예수님 역할을 맡은 배우의 눈을 쳐다보지 마시오.”

마침내 군중 앞에서 예수님과 나란히 서는 장면을 촬영하던 날, 그는 처음으로 예수님 역할을 맡은 배우 짐 커비즐의 눈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의 충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눈은 원망이나 증오가 아닌, 한없는 사랑과 자비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피에트로,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 눈빛 앞에서, 제 삶의 모든 교만과 폭력, 더러움이 한순간에 드러났습니다. 저는 제 영혼의 밑바닥을 보았습니다.” 

그는 촬영이 끝난 후에도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고,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회개하여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우리의 들보를 보게 하시는 가장 맑은 거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들보는 이기심인데,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사랑 앞에서 자신의 추함을 보고도 견딜 수 있는 자아는 없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모든 것을 잃고 감옥에 갈 위기 속에서, 그는 C.S. 루이스의 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내 삶의 모든 교만과 오물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이었는지를 깨달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자비 앞에서 흐느껴 울었다.” 

그는 자신의 ‘옛 자아’가 죽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덤에 들어갔다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다시 태어난 후에야 비로소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참된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럼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이 몸이 무력해져,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6)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간디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의 자녀 삶을 추적한 연구였습니다. 결론은 그 자녀들의 대부분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본능은 부모를 넘어서는 것인데,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부터 불행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아이의 가장 불행은 비범한 아버지를 두는 것이 아닐까요? 
 
자녀는 부모와의 비교를 통해 자기가 잘났는지 못났는지를 판단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일부러라도 자녀에게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도 있더군요. 따라서 자녀의 일에 감탄해 주고, 아이의 잘난 점을 키울 수 있도록 칭찬과 지지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자녀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부모는 계속해서 자녀를 이기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 가르치려고만 하고, 자극이 필요하다면서 혼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잘되길 진정으로 원한다면 자녀에게 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굳이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잘못을 꾸짖고 벌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가장 겸손한 모습을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기쁨과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모범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가족, 친구, 이웃들이 진정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겸손의 삶을 잃어버릴 때, 제대로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6,39)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영적 분별력 없이 남을 이끌려 한다면, 자기도 또 자기를 따르는 사람 모두 멸망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율법의 규정만을 내세우면서 꾸짖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보기보다, 하느님께 대한 무서운 공포심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티와 들보의 비유로, 남의 작은 허물(티)은 잘 보면서, 정작 자기의 큰 잘못(들보)은 외면한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남을 고치려 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위선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판단에 앞서서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은 자기 성찰이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정화해야 형제들을 도울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이의 ‘티’만을 집요하게 보는 우리는 아닐까요? 그렇다면 내 안의 ‘들보’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겸손한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의 커다란 ‘들보’를 빼낼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순간을 소중히 여기다 보면, 긴 세월은 저절로 흘러간다(마리아 에지워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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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루카복음 6장 39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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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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