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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9/13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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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빛나고,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믿는 이들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 복된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에게 뛰어난 설교의 은사를 주시고 박해를 꿋꿋이 견디어 내게 하셨으니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굽히지 않는 인내심을 본받아 저희의 믿음도 굳세어지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9월 13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13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티모 1,15-17)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 오늘 복음
    (루카 6,43-49)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1티모 1,15-17
오늘 제1독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사랑하는 그대여, 

15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16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17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6,43-49
오늘 복음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46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47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48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49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13일
정재건 마르티노 신부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소개 00:06

✚ 미사시작 01:39

✚ 강론시작 09:04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집을 짓는 사람들의 두 부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집을 짓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십니다. 하나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루카 6,48) 다른 하나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6,49)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집을 짓는 데에 시간과 돈이 많이 들 것입니다. 저는 건축을 잘 모르지만, 잘 아시는 분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공사에서 시간과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부분은 기초 공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반석 위에 기초를 놓는 사람이 한창 집을 짓고 있을 때, 맨땅에 집을 짓는 사람은 이미 완성을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더 적은 비용으로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비교가 됩니다.

기초 공사를 하는 사람은 이미 완성된 다른 사람의 집을 보면서 자기가 택한 방식에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 반면 기초 공사를 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더 현명하다고 우쭐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완성된 그 두 집에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시련이 닥칠 때입니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칠 때 기초 공사를 한 집은 여기저기 부서질 수 있지만 금방 고칠 수 있으며,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기초 공사를 하지 않은 집은 완전히 무너져 버려서, 그 주인이 이제까지 한 일이 모두 헛되고 맙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말씀을 따르는 이는 삶이 그리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어렵고 고생스럽고 내적 갈등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반면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들은 더 빨리, 더 쉽게 성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련에 부딪힐 때 어떤 삶이 옳은지 드러납니다. 멀리 내다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빨래는 햇빛에 널어야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죄인들 가운데서 첫째가는 죄인이라고 하며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죄가 없으면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다는 말로 우리가 이 말을 알아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죄 없는 사람도 없지만 죄 없다고 자비에서 제외하실 하느님은 아니지요. 그렇습니다. 죄 없는 사람도 없고 하느님 자비에서 제외되는 사람도 없다! 이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제 생각에 자비란 사랑 중에서 죄인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죄와 자비, 자비와 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모든 죄인이 하느님 자비와 저절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하느님께서 모든 죄인에게 예외 없이 자비를 베푸셔도 그것을 바라는 사람도 있지만 원하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 자비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죄인인 것도 모르고, 죄인이기에 하느님 자비가 필요한 것도 모르며, 그래서 하느님 자비를 바라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아무리 자비를 베푸셔도 하느님 자비를 원천적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면서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았고, 오히려 하느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자기가 크나큰 죄인임을 깨닫게 되어 주님께 돌아서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도 바오로의 그 유명한 회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야 비로서 회개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가운데도 신앙이 없는 사람과 똑같은 죄인이 많습니다.  

하느님 은총은 만나지 못하고 자기 죄만 만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를 시작했어도 완성은 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 죄의 어둠에 파묻혀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옷으로 치면 더럽다고 방구석에 처박아 놓고 있거나 빨래한다고 했지만 아직 햇빛에 널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경우가 있는데 기껏 고백성사를 보고도 아직 하느님 자비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빨래는 햇빛에 널어야 합니다! 시작한 회개는 완성해야 합니다! 우리 죄는 하느님 자비를 꼭 만나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가?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인가?

오늘 <복음>은 좋은 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3)

구약에서 ‘열매’는 주로 ‘행동’을 가리키고(이사 3,10;예레 17,10;21,14;호세 10,13), ‘나무’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거짓 열매를 맺고, ‘참’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 참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가시나무가 무화과를 내지 못하고, 가시덤불이 포도를 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를, 오늘 <복음>은 두 가지로 말해줍니다. 곧 ‘말’과 ‘행실’ 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루카 6,43-45) 

그러니 ‘첫 번째 열매’는 우선 입으로 하는 ‘말’로 드러납니다. 곧 마음의 곳간에 어떤 말들이 담겨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이 입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곧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은 말의 곳간이며, ‘말’은 마음의 열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열매’인 말을 보면, ‘나무’인 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말’은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향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두 번째 열매’는 몸으로 하는 ‘실행’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루카 6,46) 

그렇습니다. 말씀의 ‘실행’이야말로 흩어져 사라지지 않는 진정한 향기일 것입니다. 비록 홍수가 들이닥쳐도 떠내려가지 않는 반석 위의 집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향기’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당신의 ‘일’로 삼으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그러니, 우리 역시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며,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일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가?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인가?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말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되게 하소서!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주님!
나무에 붙어 있게 하소서. 

붙어 있지 않고서는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려나가기 전에 
스스로 가지치기를 하게 하소서. 

찬란해 보이는 잎도
아름다워 보이는 꽃도
버려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의 껍데기 위선을 벗기고
숨겨둔 기만을 도려내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반석 위의 집 : 말씀 기초 신앙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섬뜩한 경고를 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리고 뒤이어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만으로 충분할까요?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의 깊이를 다시 한번 성찰하게 합니다. ‘주님’이라는 고백은 종종 표징과 기적을 보고 생겨나는 믿음입니다. 마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 제자들이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며 그분을 ‘하느님’으로 인정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체험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에서 당신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넘어, 그분을 삶의 ‘스승’으로 여기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신앙이 우리를 구원한다면, 스승 신앙은 우리를 성화시킵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우리는 ‘표징’만을 쫓는 신앙을 너무나 자주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것을 굳게 믿지만, 정작 그분의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은 부족한 경우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고 주장하거나, 무슨 환시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준의 신비 체험은 성인 성녀의 삶을 살면서, 자신을 완전히 죽여 소유욕과 육욕, 교만이 완전히 사라진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삶도 없이 표징만을 찾는 이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좋은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나쁜 열매를 맺게 되고, 그런 신앙은 집이라는 ‘주님’은 있지만 말씀에의 순종이라는 ‘반석’이 없기 때문에 쉬이 무너져버립니다.

2000년대 초, 미국의 유타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브라이언 데이비드 미첼(Brian David Mitchell)이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십계명을 재해석하고 있으며, 다처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맹세하며, 14세 소녀 엘리자베스 스마트를 유괴하여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의 아내들과 추종자들은 그가 하느님의 특별한 예언자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 역시 미첼의 ‘표징’과 ‘음성’을 맹신했고, 미첼의 말이라면 그 어떤 악행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미첼의 지시를 따라 유괴된 소녀를 감금하고 세뇌하며, 자신들의 행동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합리화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는 고백했지만, 그분을 ‘스승’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인 ‘사랑’과 ‘정의’를 완전히 저버렸습니다. 결국 미첼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그의 추종자들도 범죄에 연루되어 처벌받았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 주님과 스승, 이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복음은 끊임없이 ‘스승’을 선택하라고 권고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려는 사람이었고, 마리아는 그분을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마리아는 나의 주님이라 하지 않고 나의 스승님이라 불렀습니다. 기초가 없다면 그 위에 집을 짓는 일은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드 라 살(Jean-Baptiste de La Salle, 1651-1719) 성인은 원래 매우 부유한 귀족 가문의 상인이자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표징을 쫓는 데 만족하지 않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가난한 이들을 가르치는 사명’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려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부유한 아이들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가난한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로부터 소외되어 범죄와 방황의 길로 빠져들기 쉬웠습니다.

드 라 살 성인은 이러한 사회 현실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특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그의 삶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으라 명하셨으니,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부와 명예를 버렸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고급 저택을 팔아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학교 운영 비용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교사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라고 가르쳤고, 자신도 직접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가르쳤습니다. 그는 세상의 표징을 쫓기보다,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가셨던 그 발자취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견고한 ‘반석 위의 집’이 되었습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성인이자 가르멜 수도회 개혁가였던 아빌라의 테레사 성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을 닮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의 몸이 되어주실 다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으십니다. 우리 말고는 다른 손도, 다른 발도 갖고 있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눈으로, 당신의 연민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시고, 우리의 발로, 당신의 자비로운 발로 세상을 걸어 다니시며, 우리의 손으로 당신이 하시는 일을 해나가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예전에 감기 몸살로 동네 병원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이 병원 대기실에는 많은 환자가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번호표를 뽑고 의자에 앉아 저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 앞에 한참 많은 사람이 대기하고 있어서 한참 동안 기다리겠구나 싶었는데, 의외로 제 차례가 금방 왔습니다. 이 의사 선생님의 환자 보는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어떤 환자를 향해 큰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파서 온 환자를 야단치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차례가 되어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는데, 또 하나의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의사 선생님의 책상 위에 커다란 성모상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성모상은 좀 치우지.’
 
어느 신자분이 운전하면서 과속하고 교통법규도 잘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침 그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성물은 치워놓고 그렇게 운전해.”
 
주님께서는 불법을 지켜주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악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존재로 주님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차라리 성물을 치웠으면 합니다.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습니까?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루카 6,43)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믿음과 올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한 마음으로 가득 찬 사람은 말과 행동으로 그 악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과 올바른 마음으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과 올바른 마음보다 말로만 고백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전혀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실천 없이 말로만 주님의 자녀인 척하는 것입니다. 
 
남들 보기에 부끄러운 모습이지만, 무엇보다 주님께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반석 위의 집처럼 튼튼한 기초로 어떤 시련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또 어떤 사랑의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삶의 안정과 구원을 원하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좋은 나무,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 안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으며, 조금의 고통과 시련에도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깊이 성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기억하는 것들이다(장 르누아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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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루카복음 6장 43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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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5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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