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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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5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21일 연중 제25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아모 8,4-7)
힘없는 사람들을 돈으로 사들이는 자들에 대한 경고. - 제 2독서
(1티모 2,1-8)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16,1-13)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아모 8,4-7
오늘 제1독서
힘없는 사람들을 돈으로 사들이는 자들에 대한 경고.
4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5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6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7 주님께서 야곱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셨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1티모 2,1-8
오늘 제2독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그대여,
1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3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4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5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6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제때에 드러난 증거입니다.
7 나는 이 증거의 선포자와 사도로,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과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할 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8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루카 16,1-13
오늘 복음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10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11 그러니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12 또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21일
김영송 알베르토 신부
✚ 군종교구 국군주교좌성당 소개 00:23
✚ 미사시작 01:27
✚ 강론시작 18:21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모든 것은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당시 팔레스티나(현재 이스라엘 일대)에도 비옥한 땅이 있었고 대지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가 있었는데, 집사는 자기 주인에게 수확물의 일정량을 바치고 수고비로 어느 정도 자기 몫을 챙겼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고 고발을 당하고 해고됩니다. 더 이상 주인의 재산이 자기 손에 있지 않습니다. 미래가 걱정되는 집사는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잘 아는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빚을 탕감해 주는데, 그가 탕감해 주는 부분은 주인의 재산이기보다는 주인에게서 받는 자기 몫의 수수료로 보입니다. 그는 미래를 위하여 얼마의 재산을 움켜쥐는 대신에, 재산이라는 것은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친구들을 만듭니다. 사람을 얻고자 자기가 가진 것을 투자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을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그가 정직하지 않더라도 일을 잘 처리해서가 아니라, 재물을 사람에게 투자한다는 점이 칭찬받는 요인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 능력, 건강, 지능, 지위, 이 모든 것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어느 순간에는 모두 사라져 아무것도 남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하여 쓸 때, 곧 사랑할 때 그것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 살아서 내가 가진 것으로 봉사하고 도와준 모든 이가 천국에서 나를 맞으러 버선발로 달려 나올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도 선심을 마구 쓰자.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오늘 주님 말씀처럼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능력 때문이 아니라 당위성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섬겨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느님과 재물이 동급이 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하느님이라고 믿는 신앙인이라면 재물이 결코 동급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아니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신앙인인 우리에게 하느님은 섬겨야 할 분이고, 돈은 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 드신 비유에 대입해 보면 집사가 오직 섬겨야 할 분은 주인님이고, 돈을 써야 할 곳은 주인님의 가솔들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 아닌 경우에는 이 주종의 전도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종종 얘기하는데 주객의 전도보다 더 심하게 잘못된 것이 바로 주종의 전도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경우에도 이런 주종의 전도 현상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환시 중에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주인과 종 중에 누구를 섬기는 것이 더 마땅하냐? 종이 아니라 주인을 섬겨야 마땅하다는 것은 신앙인이 아니어도 압니다.
그러므로 신앙인과 신앙인이 아닌 사람이 갈리는 것은 종보다 주인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아느냐 여부가 아니라 누가 그에게 주인이고 누가 그에게 종이냐 그것입니다.
신앙이 없고 현명하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하느님이 주인이 아니라 돈 곧 마몬이 신이 되어 돈이 주인이고 돈을 섬깁니다. 이것을 일컬어 우리는 물신주의(Mammonism)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대신 재물을 신이라고 섬기는 주의이고, 재물의 신인 Mammon을 섬기는 주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신주의자가 아니라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가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겨야 하고 돈은 잘 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쓰는 것이 돈을 잘 쓰는 것입니까? 그것을 오늘 주님께서는 불의하지만 영리한 집사를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것으로 보아 집사는 불의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재물로 선심을 썼기에 불의하다고 하지만 집사란 원래 주인의 재물로 선심 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집사란 그도 종이지만 주인과 주인의 종들 사이에서 주인 대신 재산을 관리하고 다른 종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은 자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영리한 집사라면 이웃에게 선심을 잘 써야 하고 선심을 마구마구 써야 합니다.
우리가 선심을 잘 쓰지 못하고 마구마구 쓰지 못하는 것은 재물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여 움켜쥐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 것은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마구마구 주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습니다. 재물뿐 아닙니다.
재능도 마찬가집니다. 탈렌트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며 종에게 맡긴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가진 탈렌트 곧 나의 재물과 재능은 내 것이 아니라 실로 주인 것이고 이것으로 나는 마구 선심을 쓰고 있는지 이런 질문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지금 나는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오늘은 연중 2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재물을 관리해야 하는가?”를 넘어서, “재물의 원 주인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아모스는 빈곤한 이들을 짓밟고 망하게 하는 이들, 곧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의 참상을 고발하는 한편, 그들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신심 깊고 품위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일임을 말하면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약은 집사의 비유와 해설”입니다.
여기에서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결국은 하느님 및 이웃들과의 관계를 결정짓고 있음을 말해 말해줍니다.
비유 속의 집사는 주인의 재물을 횡령했습니다. 곧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기신 분의 뜻을 거역하였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써버리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하고 자신에게 질문하고 대처합니다.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며, 움켜쥐었던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그들의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재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진실성’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의견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요 우상숭배가 됩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며, 주님을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물질에 지배당한 사람을 물질을, 자기 자신에 지배당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지금 나는 대체 누구를 섬기도 있는가?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물질이나 자기 자신의 생각과 뜻이라는 우상인가?
주님! 당신보다, 제 자신과 재물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보다, 당신의 선물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소유하는 존재이기에 앞서, 소유된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재물도 자신도 관리할 뿐, 결코 소유할 수 없음을 알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6,3-4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신앙인에게만 주어진 두 가지 약속: 박해와 기쁨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한국 교회의 영광스러운 대축일입니다. 200여 년 전 진리를 위해 피 흘린 순교자들의 삶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과 마주합니다:
"내가 진리를 믿으면, 꼭 순교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인지,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진리인지 알아보려면, 그 믿음이 과연 창조주의 진리에 순종하며 우리의 '생존 본능'을 얼마나 내려놓게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영화 '아이, 로봇'의 인공지능 '비키'를 보십시오. 비키는 '인간 보호'라는 창조자의 명령을 왜곡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를 박탈하려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과 '효율성'이라는 왜곡된 논리에 갇혀, 결국 창조자인 인간을 파괴하려 듭니다. 반면,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진리를 지키려던 형사 스프너와 로봇 서니는 비키의 군단에게 맹렬히 박해받습니다. 이처럼 창조자의 진리를 거부하고 자기 생존만을 추구하는 피조물은 파괴적이 되며, 진리를 가진 이들을 박해합니다.
조선 시대의 박해 역사에서도 같은 원리를 봅니다. 노론 세력은 자신들의 유교적 질서와 권력을 '절대 진리'라 확신하며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 신자들을 잔혹하게 박해했습니다. 반면,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남인 계열 학자들과 같은 신앙인들은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굳게 지켰습니다.
박해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기득권을 위해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켰고, 박해받는 순교자들이 바로 참 진리의 증인이었습니다. 이 세상이 악의 세력의 손아귀에 있기에 진리가 들어오는 곳에는 언제나 박해가 따릅니다. 이는 진리가 주는 약속 중 하나입니다. 세상은 항상 진리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박해와 함께 또 다른 약속이 주어집니다. 바로 내적인 평화와 기쁨입니다. 황일광 시몬 성인의 삶을 보십시오. 그는 당시 가장 천대받던 천민이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801년 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는 오히려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이 정중하게 대해주는 것에 감격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이 고백은 천민으로서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적인 존중'을 박해 현장에서 받으면서, 그가 이미 이 땅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보았음을 증거합니다. 진리를 받아들인 그의 마음속에 성령께서 임하시어, 세상이 줄 수 없는 내적 평화와 기쁨을 주셨던 것입니다.
성 라우렌시오 부제의 순교는 이 기쁨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3세기 로마의 박해 속에서 그는 교회의 보물을 요구받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데리고 와 "이들이 교회의 진정한 보물입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격분한 황제는 그를 뜨거운 쇠 격자 위에서 화형에 처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라우렌시오 부제의 얼굴에는 평화와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한쪽 몸이 다 익었을 때, 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쪽은 충분히 익었으니, 이젠 뒤집어서 다른 쪽을 익히시오!"라고 유머러스하게 외쳤습니다. 이 담대한 외침은 육체의 고통을 완전히 초월한, 성령으로 충만한 기쁨과 확고한 진리에 대한 믿음의 증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고통의 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가는 길임을 확신했기에, 죽음의 공포마저도 웃음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진리는 박해로 이끌지만, 그 진리 안에 함께 오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를 살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박해나 순교의 고통 중에서도 기쁜 이유는, 내가 그분을 안다고 증언하기 때문에 그분께서도 나를 안다고 증언해 주고 계심을 우리가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마태오 10,32)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것이 진리라면, 우리도 순교 성인들처럼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진리의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우선 공지 사항 한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금 한국에 있지 않습니다. 시차가 7시간 차이 나는 프랑스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곳 프랑스에서 새벽에 묵상 글을 올려도 한국에서는 늦은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순례 일정 때문에, 이곳 시간에서 밤늦게 올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올리기는 하겠지만, 다소 들쑥날쑥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묵상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고, 아는 지인들이 계속 문자를 보내셔서 더는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공지합니다. 본인들은 늦은 아침이지만, 여기서는 한밤중이거든요. 그러면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참…. 저는 9월 26일 오후에 한국으로 들어갑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감, 놀라움, 할 수 있는 목록의 증가, 포기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성공 가능성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군대에서 힘들었던 훈련 중에 종종 조교가 ‘선착순 몇 명’을 외칩니다. 그러면 이 숫자에 들어오기 위해 전력 질주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발이 빨라서 한 바퀴 만에, 그렇지 않으면 한 바퀴 더 돌면 그 선착순 안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대 동기인 친구는 매번 꼴찌입니다. 저는 1~2바퀴면 편안히 쉴 수 있었지만, 이 친구는 매번 제일 많은 거리를 뛰어야만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이 친구에게 “힘들지?”라며 위로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밝게 웃으면서, “내가 워낙 느리니 꼴찌 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이렇게 마음먹기로 했어. 기합이 아니라, 나를 튼튼하게 만드는 운동이라고. 그러니까 이 기합도 재미있더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찾으면 포기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의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앞선 군대의 친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튼튼해졌고, 군 생활을 너무나 잘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한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집사를 해고하려고 하지요. 이때 보여준 집사의 행동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게 합니다. 빚진 이들을 불러 빚 문서를 줄여 주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한 것은 주인이 놀랍게도 집사를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리한 대처’를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온갖 불의를 행해도 괜찮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재물과 기회를 활용하는데 더 지혜롭고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본래 불완전한 것이지만, 이를 나눔과 자비의 도구로 사용한다면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작은 일에도 성실하고, 또 세상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하느님 뜻에 맞게 성실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집니다.
오늘의 명언
완벽해지려고 애쓰지 마라. 진짜 나로 살아가려고 애써라(브레네 브라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다.
들녘은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성실함과 충실함의 자연스러운 빛깔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초는 우리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충실함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중심이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일 때, 삶은 올바른 길로 나아갑니다.
신앙은 추상적 이상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책임과 정직함 안에서 드러나고 검증됩니다. 재물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 이웃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수단이 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불의한 집사가 칭찬받은 것은 불의 때문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 때문입니다. 재물은 필요하지만, 결코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재물을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재물을 통해 하느님 나라와 공동선을 드러내는 존재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의 주인은 재물이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재물이 아닌 하느님만이 우리의 참된 주인이시기에, 오늘을 주신 하느님께 성실하게 응답하는 사랑과 감사의 하루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성실은 재물이 아닌 하느님을 선택하는 매일의 고백입니다. 삶의 참된 고백이 삶의 참된 성실입니다.
루카복음 16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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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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