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의 사제들이 의로움의 옷을 입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환호하게 하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특별한 은총으로 거룩한 비오 사제를 성자의 십자가에 참여하게 하시고 그의 사제 직무를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새롭게 베푸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를 그리스도의 수난에 결합시키시어 빛나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23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에즈 6,7-8.12ㄴ.14-20)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완공하고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 오늘 복음
(루카 8,19-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에즈 6,7-8.12ㄴ.14-20
오늘 제1독서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완공하고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그 무렵 다리우스 임금은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 관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7 “하느님의 집 공사가 계속되게 하여라. 유다인들의 지방관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 하느님의 집을 제자리에 다시 짓게 하여라.
8 이제 그 하느님의 집을 다시 짓도록 그대들이 유다인들의 원로들을 도와서 해야 할 일에 관하여, 내가 이렇게 명령을 내린다. 왕실 재산 곧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서 받는 조공에서, 지체하지 말고 그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비용을 내어 주어라.
12 나 다리우스가 명령을 내리니 어김없이 시행하여라.”
14 유다의 원로들은 하까이 예언자와 이또의 아들 즈카르야가 선포하는 예언에 힘입어 건축 공사를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명령과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와 다리우스와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명령에 따라 건축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15 그리하여 이 집이 완공된 것은 다리우스 임금의 통치 제육년 아다르 달 초사흗날이었다.
16 이스라엘 자손들, 곧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돌아온 나머지 유배자들은 기뻐하며 하느님의 집 봉헌식을 올렸다.
17 이 하느님의 집 봉헌식에는 황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양 사백 마리를 바치고, 온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 제물로 이스라엘의 지파 수에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를 바쳤다.
18 그런 다음 모세의 책에 쓰인 대로, 사제들을 저마다 번별로 세우고 레위인들을 저마다 조별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을 섬기도록 하였다.
19 돌아온 유배자들은 첫째 달 열나흗날에 파스카 축제를 지냈다.
20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일제히 자신을 정결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정결하게 되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돌아온 모든 유배자와 동료 사제들과 자기들이 먹을 파스카 제물을 잡았다.
루카 8,19-21
오늘 복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23일
신동민 프란치스코 신부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소개 00:06
✚ 미사시작 01:22
✚ 강론시작 09:08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을 뵙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예수님께 가족과 친척들이 찾아왔다고 알려 드렸지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만 보면 예수님께서 가족과 친척들을 매몰차게 대하시거나 적어도 거리를 두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친척들이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고 말하는 마르코 복음서를(3,21 참조) 보면 이 부정적인 인상은 더 강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말 의도하신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보통 가족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 여깁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그분 어머니와 친척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이 자기들보다 예수님께 더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하느님께서 너무나 소중하시기에, 하느님과 그분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무엇보다도 소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시기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의 아들과 딸, 곧 가족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직무를 수행하시고자 가족을 멀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마음 중심에 두는 삶, 그래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보여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중심에 둔다면 누구나 그들도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실제로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제자들로 제시합니다(사도 1,14 참조).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적 사춘기, 관계의 재편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으시고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 당신 어머니와 형제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당신 어머니이지 마리아는 이제 더 이상 당신 어머니가 아니라고 내치시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럴 리 없다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마리아야말로 하느님 말씀을 누구보다 잘 듣고 실행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럴 리 없고 그러므로 오늘 말씀의 뜻은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당신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초대의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주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전해 듣자마자 즉시 그리고 어찌 그리 단호하게 하실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즉흥적인 말씀일까? 아니면 오래전부터 준비된 말씀일까? 생각되면서 주님께선 실로 마리아를 내치신 건 아닐까? 도 생각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즉흥적인 말씀이 아니고 12살 때부터 이미 준비된 말씀입니다. 12살 되던 해 예루살렘 성전 방문 때 부모와 떨어져 성전에 남으셨을 때 어머니 마리아께 왜 부모와 떨어져 속을 썩이느냐는 나무람을 들으셨지요. 이때 주님께서는 오히려 어머니 마리아를 나무라십니다. 당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냐고 말입니다.
이때 이미 우리 사춘기처럼 주님도 갈라서기를 하신 걸까요? 제 생각에 사춘기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영적인 사춘기입니다. 혈육의 어머니 마리아를 떠나 하느님 아버지께 가신 것이고, 마리아가 친어머니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아버지임을 선언하신 것이니 주님께서 친어머니 마리아를 내치고 끊으신 것은 일정 부분 사실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매우 매정하게 보이지만 육신의 어머니이심은 끊으시고 어머니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할 하느님 딸일 뿐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제가 자주 하는 얘기가 있지요. ‘관계의 재편’이라는 말 말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사춘기를 거쳐 관계를 인간적 관계에서 영적인 관계로 재편해야 합니다.
더 이상 부모 곁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머물고, 자녀를 내 자식이라 하지 않고 하느님께 내어드리고, 이젠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하느님의 딸이요, 주님의 어머니들이 되는 관계 재편을 우리도 오늘부터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
오늘 복음은 “말씀을 실행하는 이”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됨을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루카 9,48;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시며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시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첫째는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둘째는 예수님과 함께 있되,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이나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또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셋째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이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8,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사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애정이 감옥 탈출법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혹시 ‘헬리콥터 부모’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자녀 주위를 헬리콥터처럼 맴돌며 모든 것을 대신해주고 간섭하는 부모를 말합니다. 최근, 명문대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간 아들이 회사를 그만두겠다며 어머니에게 소리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이제 숨 막혀서 못 살겠어요. 제 인생을 돌려주세요!”
아들을 사랑한 나머지, 그의 모든 걸음을 통제했던 어머니의 애정은 결국 아들에게 숨 막히는 감옥이 되었고, 아들의 삶을 망가뜨리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부모의 지나친 애정이 자녀를 망치듯, 방향을 잃은 애정은 우리의 영혼을 망가뜨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다.” (루카 8,21)
이 말씀은 혈연의 애정을 넘어, 하느님 안에서의 더 큰 사랑과 질서를 가르쳐주십니다. 오늘은 애정이 어떻게 우리를 파멸시키는지, 그리고 어떻게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는지 묵상해봅시다.
구약의 영웅 삼손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엄청난 힘을 받은 나지르인이었지만, 데릴라라는 여인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에 사로잡힙니다. 데릴라의 집요한 유혹에 넘어간 그는 결국 힘의 비밀인 머리카락의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그 순간, 삼손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노예로 전락한 그의 마지막은 비참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강했지만, ‘데릴라에 대한 애정’이라는 끈에 묶여 영적으로는 가장 무력한 존재가 되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더 큰 사랑을 선택한 이들은 세상의 애정을 끊어내는 용기를 보여줍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했지만, 하느님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키라는 에즈라 예언자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지만, 하느님과의 계약이라는 더 큰 사랑을 지켜냈습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극진히 사랑했지만, 프란치스코는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랐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은 물론,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어 돌려주며 선언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의 애정이라는 끈을 끊어내고 하느님이라는 더 큰 사랑을 선택했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얻고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작은 애정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하느님이라는 영원하고 더 큰 사랑을 온전히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명령이지만, 그 애정이 우리를 휘둘러 주님께 대한 의무를 저버리게 한다면, 우리는 삼손과 같은 비극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외딴 오지에서 선교사로 살다 선종한 한 노 사제가 임종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내 평생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작은 애정을 포기할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더 큰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저는 그 사랑 안에서 가장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누렸습니다.”
우리도 이 노 사제처럼, 세상의 작은 애정에 묶여 머무는 대신 더 큰 사랑이신 주님을 선택하는 용기를 냅시다. 그리하여 하느님 안에서 가장 완전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주님의 참된 가족이 되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어떤 아이가 오랫동안 키웠던 애완견이 병으로 죽었다며 크게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애완견을 키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 슬픔이 너무 컸고, 이런 슬픔이 또다시 반복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뒤, 이 아이가 자기 엄마에게 애완견을 다시 키우겠다고 말합니다. 엄마는 “그때, 또 이 슬픔이 반복되는 것이 싫다며?”라고 묻자, 아이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까?
“언젠가 이별의 순간이 오겠지만, 그전까지 열심히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
이별의 슬픔보다 행복을 주는 기쁨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과 달리 최고의 행복을 주고 싶다는 아이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마음이 어쩌면 주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우리 인간의 이 세상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 삶을 마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우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더 큰 사랑을 주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당신 사랑으로 주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 사랑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열심히 사랑을 나누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 사랑을 따르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회에서는 가족 관계가 사회적, 종교적으로 매우 강력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가족의 방문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혈연적 관계보다 더 중요한 가족의 정의를 제시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듣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혈연 중심 사회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하느님 말씀 안에서 맺어지는 영적 가족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기보다, 단순한 혈연관계에 더 집중합니다. 그러나 진짜 행복이 과연 이 안에 있을까요?
내 신앙 공동체를 ‘영적 가족’으로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단순한 혈연관계 등을 중시하면서, 가지고 있던 신앙까지도 남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자기 삶 안에서 “예, 그렇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얼마나 많이 주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담느냐가 중요하다(마더 테레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루카복음 8장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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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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