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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5/09/26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5.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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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5년 9월 26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9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하까 1,15ㄴ―2,9)
    머지않아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 오늘 복음
    (루카 9,18-22)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하까 1,15ㄴ―2,9
오늘 제1독서

머지않아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15 다리우스 임금 제이년이었다. 

2,1 그해 일곱째 달 스무하룻날에 주님의 말씀이 하까이 예언자를 통하여 내렸다. 

2 “너는 스알티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와 나머지 백성에게 말하여라. 

3 ‘너희 가운데 이 집의 옛 영화를 본 사람들이 남아 있지 않느냐? 지금은 이 집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너희 눈에도 있으나마나 하지 않느냐? 

4 그러나 즈루빠벨아, 이제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아 대사제야, 용기를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일을 하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5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언약대로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에 머무를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마라. 

6 ─ 정녕 만군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머지않아 나는 다시 하늘과 땅, 바다와 뭍을 뒤흔들리라. 

7 내가 모든 민족들을 뒤흔들리니 모든 민족들의 보화가 이리 들어오리라. 그리하여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8 은도 나의 것, 금도 나의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9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루카 9,18-22
오늘 복음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9월 26일
승녕 가브리엘 신부

 

✚ 미사시작 00:20

✚ 강론시작 07:31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태훈 리푸죠 신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루카 복음서 9장은 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교육하시는 내용에 초점을 맞춥니다. 열두 제자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명을 받아 파견되고(루카 9,1-6 참조),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합니다(9,10-17 참조). 이 교육의 정점에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있습니다(9,18-22 참조). 이 신원을 바탕으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삶의 형태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9,23-27 참조).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마침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데, 이 고백은 하느님 계시의 선물입니다(마태 16,17 참조).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을 들으시며 흐뭇해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받은 이 선물에 다른 선물을 더해 주십니다. 수난 예고로 당신께서 누구이신지를 더 깊이 알게 해 주십니다. 베드로는 권능을 지니신 메시아만 알았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밑바닥까지 내려가시는 그리스도, 그래서 인간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실 만큼 인간을 사랑하시며, 그렇게 인간이 소중하다고 온 존재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물으실 것입니다. 먼저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18)라고 물으신 다음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9,20)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은 표현으로 대답하기보다는, 참으로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을 바탕으로 당신을 더 깊이 알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고통 중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 누구신지와 관련하여 두 번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한 번은 군중이 누구라고 하는지 다른 한 번은 제자들이 누구라고 하는지.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므로 이 두 번의 질문을 통해 볼 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들 곧 군중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내가 주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중요하지 않고, 아무리 수많은 사람이 주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해도 그것이 내겐 중요하지 않고 오직 내게 어떤 분인지가 중요하기에 주님께서는 “그러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신 겁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다 주님을 사랑의 주님이라고 알고 있어도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주님을 주지도 않고 가져가시는 분이라고 내가 믿는다면 주님이 아무리 사랑의 주님이시어도 내게는 고약한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제가 아직은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름대로 주님 체험을 한 다음부터 저는 주님이 사랑의 주님임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늘 풍성한 복을 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행 책임을 제가 주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주셨어도 그것이 저를 불행케 하려는 주님 뜻이라고 생각지 않고, 거기에 다 주님의 좋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면 그것은 주님 탓이 아니라 그 사람을 주신 주님의 뜻을 제가 헤아리지 못하여 불행해진 것입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는 주님을 이렇게 알고 믿고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믿고 살아갈지 그것이 관건입니다. 분명 인간적으로 제게 좋은 것은 점점 없어지고 고통은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게 고통이 없기를 빌지 않고, 고통 중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빕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벌어지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겪는 일

어제 <복음>에서는 궁중들과 헤로데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았습니다(루카 9,7-9). 오늘 <복음>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단지 ‘예언자’ 차원에서 이해했을 뿐, 메시아로 인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고 고백했을 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루카 9,21).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언은 이미 천사들과(2,11) 예언자 시메온과(2,26) 마귀들에게서(4,41) 선언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을 뿐입니다. 또한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지만, 잘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 곧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그리스도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를 깨우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당혹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라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9,23-29).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반드시 ~해야 한다.”(Dei)라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에는 ‘아버지께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맞게 될 일을 네 가지로, 곧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되살아난다.” 로 표현하십니다.

‘고난을 겪는 일’이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로 많은 고난을 여러 차례 겪는 일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겪는 일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그 고난은 곧 ‘배척을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 일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곧 ‘벌어지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여 겪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죽기까지 믿고 복종하는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믿음과 순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반드시” 살아야 할 삶인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9,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사랑으로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그러니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으렵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렵니다.
당신과 함께 그러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의 영성 수준 측정법: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군중은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그리고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던져집니다. 우리는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인식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까?

한국의 어떤 개신교 목사가 설교 단상에서 “하느님, 까불지마. 내 말 안 들어주면 나한테 혼나”라고 외치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금송아지를 하느님이라 부르며 자신들이 주는 여물이나 받아먹고 밭이나 갈아줘야 할 존재로 인식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그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 혹은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는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어떤 분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성장은 인간적인 관계의 성숙과 매우 흡사합니다. 마치 부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성장하면서 변하듯이 말입니다. 어떤 자녀는 부모의 헌신과 재산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심지어 부모를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봉' 정도로 생각하다가 결국 관계를 파괴하고 폐륜까지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는 부모를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아닌 도구로 전락시킨 교만한 인식에서 비롯된 비극입니다. 그러나 다른 자녀는 성장하여 자신 또한 부모가 되어보니, 비로소 자신들의 부모가 얼마나 위대한 사랑과 희생으로 자신을 키워냈는지 깨닫고 진정으로 공경하게 됩니다. 이처럼 부모를 향한 인식이 성숙할수록 그들의 삶 또한 더욱 풍요롭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점점 예수님을 그분의 참된 모습, 곧 온 우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느님으로 온전히 인식해 나가야 합니다. 이 과정은 때로는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 앞에서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깊은 겸손과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구약성경의 야곱은 처음에는 불콩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형 에사우처럼 하느님의 선물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장자권을 가로챈 결과로 형 에사우가 군사 400명을 이끌고 자신에게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나 두려워 떨며 밤새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이때 야곱은 비로소 자신이 속임수로 얻으려 했던 장자권의 무게와 그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며 겸손해진 야곱은, 결국 형 에사우와 극적인 화해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점점 우리가 편하게 여겼던 예수님을 참 하느님으로 인식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마지막 때, 온 우주의 주인이신 그분을 감당할 수 없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가장 가까운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지만, 타볼 산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 그들은 두려워 몸을 떨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어졌습니다. 그들은 평소의 친근한 스승 예수님이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룩한 하느님의 현존을 마주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따르던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비로소 온전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였던 사도 요한도, 요한 묵시록에서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보았을 때 죽은 듯이 그 발 앞에 엎어졌습니다(묵시 1,17 참조).

이는 예수님을 인간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던 한계를 넘어, 그분의 신적인 영광을 온전히 인식했을 때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사랑 가득한 분이시기에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동시에 그분을 인간의 범주에 가두지 않고 하느님으로 인식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영적 성장은 아이들이 부모를 알아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아이들은 처음엔 부모가 자신들에게 당연하게 모든 것을 해 주어야 한다고 여기지만, 나중에 자신들도 부모가 되어보면 부모의 희생과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한 것인지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 자체가 자신이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점점 더 예수님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토는 '베네딕토 규칙서'를 통해 수도자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겸손의 사다리'로 제시했습니다. 이 사다리는 단순히 고개를 숙이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갈수록 그분의 위대함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미미한지를 깊이 깨닫는 영적 인식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겸손의 사다리'의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면, 수도자는 더 이상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자신의 참된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 베네딕토는 이 겸손의 사다리를 통해 인간의 교만을 벗어던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한낱 인간적인 스승이 아닌, 지극히 높고 거룩하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으로 온전히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께서 온 우주의 주인이신 창조주이심을 빠르게 인식해 나갈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 가득한 분이시라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그분을 인간적인 친구나 소원 성취의 도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여겨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우리가 마침내 그분을 온전히 마주할 준비를 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드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인간으로 볼 때가 아니라 하느님으로 볼 줄 알 때 나도 하느님이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드디어 성지순례를 모두 마치고, 오늘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열흘간의 일정이 눈깜빡할 사이에 지나간 것 같습니다. 이제 이곳 성지에서 얻은 힘으로 다시 저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요. 금요일 오후에 한국 도착 예정이라, 이렇게 새벽 묵상 글을 미리 올립니다.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긴장하지 마세요.”라는 말입니다. 병원에서 주사 맞을 때, 간호사는 이렇게 말하지요. “긴장하지 마세요. 긴장하면 바늘이 안 들어갈 수 있어요.” 한의사가 침을 놓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기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바늘이나 침에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바늘 들어갑니다. 조금 따끔할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아프지는 않아요.”
 
“이 바늘이 조금 두꺼워서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에요.”
 
어떻게 말해야 진짜 긴장을 풀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말을 쉽게 말하곤 합니다.
 
“아파하지 마. 신경 쓰지 마. 내버려둬.”
 
그러면서 아파하는 사람을, 신경 쓰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자기 말이 더 아프게 하고, 신경 쓰게 만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파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아야 하는 것, 또 내버려두는 것은 당사자의 몫일 뿐입니다. 이를 나의 말과 행동으로 억지로 만들 수 없기에 우리는 그저 따뜻한 말로 인정하고 지지하고 격려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사랑을 말씀하시고 당신 삶으로 그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 사랑에 집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여러 소문을 전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났다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가 되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인식이 예수님을 특별한 인물, 하느님과 관련된 인물로 보았지만, 그분의 참된 정체성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과거의 틀 안에서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할 뿐, 새로운 구원자이신 주님의 본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 각자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카 9,20)
 
군중의 여론이나 소문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누구로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베드로의 고백처럼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변할 수 있다면, 절대로 주님의 뜻에 반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사랑에 집중하면서, 다른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지 않게 됩니다. 진정한 위로와 힘이 나는 응원을 이웃들에게 힘차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언제나 초심자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매 순간을 새롭고 신선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한 경지를 맛본다(조셉 골드 스타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늘도 주님은 세상의 소음 한가운데에서 우리 각자에게 조용히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아무도 삶의 의미와 진실한 인격적 고백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전해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적인 고백과 만남임을 보여주십니다. 이 물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매일 새롭게 들려오는 신앙의 근본적 초대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단순한 입술의 말이 아니라, 삶의 선택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물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정체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에 응답하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삶을 규정하는 궁극적 가치는 주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뭐라 하느냐?”가 아니라 “너는 뭐라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는 비교가 아닌 우리의 고유한 응답을 바라보시는 질문입니다. 

AI가 아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존재적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 당신은 제 삶의 참된 중심이십니다.”라는 대답입니다. 오늘 이 질문 앞에, 나의 말과 삶이 하나 되어 조용히 대답합니다.

 

“주님, 당신은 나의 길이요, 나의 빛입니다.”

 

고백의 정점에는, 나를 나답게 만드는 주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까이서 1장 9절
오늘 성경 말씀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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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지혜
놓치면 후회할 성경구절

 

성경 말씀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을 비추는 빛이 되어 하루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요. 말씀 한 구절이 오늘을 새롭게 하고 큰 기적을 이끌어냅니다. 하루를 변화시키는 성경구절 6가지, 지금 만나보세요! 한 말씀이 오늘을 바꾸는 기적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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