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리라. 주님은 우리 구원이요 생명이며 부활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구원과 자유를 얻었네.
하느님, 성자께서는 죽음을 앞두시고 이 거룩한 만찬으로 새롭고 영원한 제사와 사랑의 잔치를 교회에 맡기셨으니 이 놀라운 신비에 참여하는 저희에게 넘치는 사랑과 생명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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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17일
성목요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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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만찬 성목요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17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탈출 12,1-8.11-14)
파스카 만찬에 관한 규칙. - 제 2독서
(1코린 11,23-26)
여러분은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3,1-15)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탈출 12,1-8.11-14
오늘 제1독서
파스카 만찬에 관한 규칙
그 무렵
1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2 “너희는 이달을 첫째 달로 삼아,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3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에게 이렇게 일러라. ‘이달 초열흘날 너희는 가정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집집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4 만일 집에 식구가 적어 짐승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사람 수에 따라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짐승을 마련하여라. 저마다 먹는 양에 따라 짐승을 골라라.
5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6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7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8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
11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12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14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1코린 11,23-26
오늘 제2독서
여러분은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23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요한 13,1-15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1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2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3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4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5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6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7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8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9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11 예수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팔아넘길 자를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13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14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성목요일 미사 생중계
2025년 4월 17일 20시
주님 만찬 성 목요일 미사
평화방송 명동성당 생중계
구요비 욥 주교 집전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시며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섬김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시며 우리에게도 그 모범에 따라 살아가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돌아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한 13,1 참조).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고 끝까지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당신을 배신할 유다와, 당신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에게도 가닿습니다. 유다와 베드로를 사도로 삼고자 하셨던 그 마음으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그들이 걸어온 삶의 모든 여정과 그 흔적을 바라보시고 사랑과 섬김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사람들 앞에 쉽게 드러내 보일 수 없이 더럽고, 돌부리에 치여 크고 작은 상처가 난 우리 발을 씻어 주시며 깨끗해지고 낫게 하십니다.
자기 발을 감추려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 앞에 자기 발을 내놓았듯이 우리의 약함이나 아픔을 온전히 내어 맡길 때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13,15).
예수님의 모범에서 섬김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가치를 배우고 서로 돕고 격려하며,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는 완벽한 재현 배우들
올해 성 목요일 묵상은 조금은 엉뚱한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데 이 만찬에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끼지 못하셨을까? 주님께서 어머니 마리아와 최후 만찬을 하셨을까? 십자가의 길에서 만나시고 십자가 위에서 작별하신 것이 다였을까?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마리아와 최후 만찬은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혹 어머니 마리아와 최후 만찬을 따로 하셨더라도 성경에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사적인 것이고 구원사적 의미는 아닙니다.
같은 맥락에서 제자들과만 최후의 만찬을 하신 것도 사적인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사도들과의 만찬이고 그러므로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만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신 것도 베드로만 씻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발도 씻어주신 것이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행위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신 것이 베드로의 개인적인 죄, 곧 주님을 배반하는 죄를 짓더라도 끝까지 사랑하시겠다는 그 사랑의 의지를 보이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베드로로 대표되는 인류의 모든 죄 곧 세상의 죄를 세상 끝날까지 다 없애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찬례 제정의 뜻입니다. 제자들과의 최후 만찬은 성찬례이지 제자들과 고별 식사가 결코 아닙니다. 제자들하고만 드신 식사가 아니라 그 이후에도 이 만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모든 사람에게 재현되는 거룩한 만찬입니다.
아시다시피 최후 만찬에 관한 복음은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이 다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그것을 재현하라는 것이고, 공관복음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시며 이 예를 기억하고 재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빵은 당신 몸으로서 우리를 위해 당신을 바치시는 사랑이고, 포도주는 당신의 피요 계약의 피로서 세상의 죄를 씻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기서 문제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옛날 우리말 미사 통상문에서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 흘리는 내 계약의 피”였는데 새 미사 통상문에서는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해 흘리는 내 계약의 피”로 바뀌었고 이때 논란이 있었지요.
주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해 피를 흘리신 것 곧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모든’이라고 하지 않고 ‘많은’이라고 하는 것일까?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나? 이런 논란이었지요.
그런데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사랑에서 배제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신다고 가르치신 주님께서 죄 사함의 피를 흘리시면서 온 인류를 위해 흘리시지 않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실 리가 곧 소수라도 배제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요.
그러나 아무리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셔도 그 비와 햇빛을 받는 사람이 있고 받지 않는 사람이 있잖습니까? 그러니 선한 사람이 받고 악한 사람이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배제하시는 사람은 없지만 배제되는 사람은 있습니다. 주님께서 배제하시는 사람은 없지만 주님 사랑에서 배제되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 그 사랑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랑을 재현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아무리 주님께서 사랑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 봉헌하는 성 목요일 만찬 미사는 기억이요 재현입니다. 우리 죄를 씻어주시는 주님 사랑을 기억하고 재현하며, 우리를 위해 당신 전부를 바치시는 주님 사랑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재현 배우들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성체가 되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만감이 교차하는 식사자리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사랑을 나누는 마지막자리입니다.
이를 가리켜 요한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에게 유산을 나누어주십니다. 곧 당신의 유산으로 고귀하신 당신의 몸, 당신의 생명을 물려주십니다. 이름 하여, 성체성사를 설정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를 유산으로 주시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실, 예수님의 이 ‘발 씻김’은 쟝 바니어 표현을 빌면, 당혹스런 쇼크요 스캔들입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는 스캔들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할 분이 섬기신 까닭입니다. 영광스럽고 드높으신 분이 권위도 없이 천박하게 겉옷을 벗어 재끼고, 낮아지고 비천해지고, 노예나 하는 일을 하는 것을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이 말씀은 우리 주님의 ‘발 씻김’ 안에는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그 무엇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몫’에 대한 비밀입니다. 바로 여기에, ‘발 씻김’의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곧 ‘발 씻김’은 단지 섬김의 본보기로만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참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성사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의 무한한 행위요,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용서와 구원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투완 추기경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성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섬김’은 자신을 내어주는 ‘성체’가 됩니다. ‘성체’인 이 섬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 지고,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주게 됩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섬김’은 이렇게 구원의 성체가 됩니다. 곧 ‘섬김’은 성체성사가 현실 속에 실현되는 구체적인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몫을 나누어 가지게 될 것입니다. 곧 예수님의 유산을 물려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결국, 예수님과 함께 구원사업의 ‘몫’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섬김을 받은 자라야, 받은 바로 그 섬김으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기 양도’가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섬김’은 예수님을 내어주는 성체가 되고, 신적인 행위가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 생명의 전달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몫을 함께 나누고, 당신의 유산을 나누어받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섬김’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의 행위요, 성체성사가 됩니다. 동시에 죄를 씻어주는 용서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성 베르나르도는 말합니다.
“발 씻김의 성사는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화해성사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는 ‘발 씻김’으로 우리의 죄가 씻겨 지고, 또한 다른 사람의 죄를 씻어주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섬김’은 서로의 용서와 친교를 이루며, 화해성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신할 베드로와, 유다와, 십자가 아래서 옷마저 벗어버리고 도망쳐버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당신의 지극한 사랑으로 이미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요한 13,10)
이토록, 발을 씻는 일은 깨끗함을 완성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그러기에, 발을 씻는 일은 그 깨끗함의 완성을 가리키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이루며, 진정한 파스카를 이룹니다.
오늘, 우리는 이 거룩한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고 압도당합니다. 이 거룩한 섬김, 이 놀라운 ‘발 씻김’으로, ‘당신의 몫’을 건네받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전달하는 이 놀라운 감격의 성체성사요 화해성사인 ‘발 씻김’으로 하여, 우리는 당신 생명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마침내 ‘구원의 몫’을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도 이 고귀한 유산을 함께 나누고 전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요한 13,8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주님!
제 영혼을 씻어주소서.
당신 사랑을 입고
생명의 몫을 얻게 하소서.
섬김 받기보다
먼저 섬기게 하소서.
낮아져 높일 줄 알고
작아져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쪼개지고 부서져 내어주고
파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왜 성체를 영해도 힘이 생기지 않을까?
오늘은 주님 만찬 성 목요일입니다. 성체성사와 이를 위한 사제직이 세워진 거룩하고 복된 날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 예수님은 목숨을 바치셔야 하는 수난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성찬례가 발을 씻어주는 일과 같음을 보여줍니다. 부모가 당신 살과 피를 자녀에게 먹고 마시게 하는 것은 또한 부모가 마치 종처럼 자녀의 생존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예식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리옷 유다와 같습니다. 그는 성체를 영했어도 바로 예수님을 배신하러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안 그럴까요? 베드로는 이 예식을 거부하지만,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이 효과가 발생할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나중”은 언제일까요? 베드로가 회개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언제 온전한 회개가 일어났을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명확히 알아차린 바로 그 순간일 것입니다. 그 순간이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 뵐 때입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좀 더 알게 되어야 성체성사가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기는 하였지만, 죽어도 부활하실 분까지는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을 믿게 하시기 위해 성경을 설명해 주신 것처럼 그분을 알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뿐입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우리가 매번 성체를 영 할 때마다 어떤 마음으로 돌아와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주인공 ‘혜원’은 도시 생활에 지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 시골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부엌에서 만들어 주던 음식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엄마는 집을 비운 상태라 집에는 혜원 혼자 남습니다.
여름과 겨울을 번갈아 가며 거친 들판 속에 혼자 서 있을 때, 혜원은 문득 엄마가 오랫동안 가꾸어 온 텃밭이 눈에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잡초만 무성해 보이던 밭을 조금씩 고쳐 나가며, 엄마가 남긴 수첩 안의 레시피를 따라 몇 가지 음식을 만들어 봅니다. 도시에서 빠듯하게 일했던 시절에는 겨우 끼니를 때우듯 밥을 먹었지만, 시골집에 돌아와서 하나하나 과정을 거쳐 직접 요리를 하게 되자 오래전 엄마가 주방에서 땀 흘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릴 때 혜원은 엄마가 만들어 주던 음식이 맛있기는 했지만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고, 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준비 없이 텃밭을 돌보려 하니 한 번에 되는 일은 없습니다. 물 주는 시기와 양부터 비료의 종류, 햇빛의 세기까지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습니다.
엄마가 이 텃밭을 얼마나 정성스레 가꾸었는지 느낄수록, 혜원은 엄마가 남긴 레시피대로 음식을 차릴 때마다 단순한 한 끼 식사를 넘어 삶을 보듬는 느낌을 받습니다. 묵은 재료를 버리듯 상처나 슬픔을 털어내고, 새로운 씨앗을 심듯 내일을 기대하게 됩니다.
차차 계절이 바뀌며 농사가 무르익어 가듯, 혜원은 땅을 일구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도 조금씩 단단해져 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혼자 지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마가 왜 이런 음식을 만들어 주었을까?”라는 물음이 자주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혜원은 수첩 속 레시피를 꺼내 하나씩 시도해 봅니다.
양이 조금 달라도, 재료가 달라도, 정성스럽게 밭에서 얻은 재료로 요리를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엄마 손맛이 떠오릅니다. 그 맛은 순간적인 허기를 달래 주는 것이 아니라, 혜원이 지쳐 있던 도시 생활에서 맛보지 못했던 평안과 위로를 줍니다. 그렇게 혜원은 하루하루 밭에서 수확한 재료를 손질하고, 뜨거운 불 앞에 서서 엄마의 흔적을 되새깁니다.
시간이 지나며 엄마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도 희미해지고, 오히려 엄마가 가르쳐 준 요리들이 혜원을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어느덧 텃밭은 채소와 과일로 풍성해지고, 그 재료들로 만들었던 음식은 혜원에게 마음을 치유하는 양식이 됩니다.
혜원은 이 과정을 통해 엄마가 전하려던 것이 단순히 “맛있는 한 끼”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가꾸고 마음을 채워 가는 방법이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결국 혜원은 엄마가 남긴 레시피와 텃밭을 통해 머물 곳을 찾고, 내면의 허기까지 달래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며, 도시에서 쌓인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 갑니다.
혜원은 다시 도시로 나가 이전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1년 정도 지나니 다시 허기가 집니다. 그래서 돌아옵니다. 이전처럼 텅 빈 집이지만, 엄마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음식을 하고 텃밭을 가꾸면 다시 힘이 생길 것을 압니다. 그렇게 다시 엄마는 보이지 않지만, 엄마의 작은 숲에서 힘을 회복해갑니다.
양식은 음식과 다릅니다. 그 양식을 주던 이의 희생이 서려 있습니다. 그 희생을 알려는 노력이 더해질수록, 그분을 더 알아갈수록 음식은 양식이 되어갑니다. 음식은 몸만 채우지만, 양식은 영혼을 채웁니다.
제가 어머니가 가져다주신 단팥빵과 흰 우유의 맛을 어떻게 천상의 맛으로 느낄 수 있었을까요? 그동안 어머니를 알려고 하는 작업이 곁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보입니다. 김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을 때도 그랬습니다. 돌무더기만 있는 곳에 가서 감동하려면 알고 가야 합니다. 성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려는 노력 없이 왔다가는 그냥 밀가루일 뿐입니다. 성체를 영해도 발전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알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지 않기 때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도 성체성사를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어주신 사랑을 대신 넣은 것입니다. 성찬의 전례 전에 말씀의 전례가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성체성사는 항상 ‘나중’에 더 느끼게 될 그런 성체성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나에게 나쁜 일이 생겼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하겠다.”
“나에게 나쁜 일이 생겼다. 그리고 이런 선택을 하겠다.”
한 단어, ‘하지만’과 ‘그리고’의 차이일 뿐이지만 전혀 다른 내용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은 나쁜 일을 이겨내겠다는 의미가 있고, ‘그리고’는 나쁜 일을 인정하고 그냥 함께 살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둘 다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한 단어만으로도 포기, 좌절하지 않고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하지만’이나 ‘그리고’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면, 뒤 이어 나오는 ‘이런 선택을 하겠다’라는 말도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나에게 나쁜 일이 생겼다’라면서 기분 나빠하고 힘들다면서 불평불만으로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계속할 수 있는 한 단어의 사용으로 인해 지금과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많은 변화, 많은 노력, 많은 힘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에 정말 많은 것이 필요할까요? 앞서 본 것처럼 단어 하나만으로도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과 행적에 소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처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힘으로 많은 성인·성녀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 만찬 성목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만찬에 앞서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면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시면서 마지막 만찬을 행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미사를 통해서 재현됩니다.
단순히 연중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과 행적에는 커다란 힘이 있기 때문에, 이를 재현하면서 우리는 그 힘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 힘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에서도 극복할 힘이 생기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더 나은 길로 갈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참여가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오늘 미사로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합니다. 이 기간에 주님의 사랑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 영광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내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가 할 일은 오늘이 좋은 날이며 오늘이 행복한 날이 되게 하는 것이다
- 시드니 스미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뜨겁게 다시 만나는 행복한 오늘입니다. 오늘은 사랑의 파스카 성삼일의 첫날입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언제나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위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빵이 되시어 우리를 섬기는 사랑입니다. 빵이 되는 사랑은 서로를 씻어주는 끝없는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사랑은 이와 같이 씻어주는 사람의 지극한 사랑으로 흐릅니다. 삶의 기쁨은 사랑의 진정한 기쁨입니다.
삶의 비극은 맑게 씻어주지 않는 우리의 욕심으로 빚어집니다. 맑게 씻어주면 맑게 보입니다. 사랑 그 자체로 돌아가는 파스카의 진실한 여정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치유됩니다.
우리의 사랑을 되찾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우리 삶에 닿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사랑을 고쳐주십니다. 그래서 사랑은 영원합니다.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완성되는 것임을 진실로 믿습니다. 사랑은 빵이 되는 우리의 실천으로 가능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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