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아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 외치는 소리,
“높은 데서 호산나! 당신의 크신 자비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높은 데서 호산나! 당신의 크신 자비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구세주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으니 저희도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여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든
말씀과 연결되는 시간
2025년 4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오늘도 살아 있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환히 비춥니다. 지금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해요.
2025년 4월 13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온라인 매일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50,4-7)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제 2독서
(필리 2,6-1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22,14―23,5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이사 50,4-7
오늘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필리 2,6-11
오늘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네. 하느님은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네.
루카 22,14―23,56
오늘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14. 시간이 되자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셨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1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파스카 축제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다 이루어질 때까지 이 파스카 음식을 다시는 먹지 않겠다.”
17. 그리고 잔을 받아 감사를 드리시고 나서 이르셨다. “이것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1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마시지 않겠다.”
19.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21.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
22.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23. 그러자 사도들은 자기들 가운데 그러한 짓을 저지를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
24.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27.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28.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29.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30.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32.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33.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5.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나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 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말씀이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한다.”
38. 그들이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하자,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것이면 넉넉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39.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40. 그곳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42.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43.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
44.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45. 그리고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시어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4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47.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왔다. 그가 예수님께 입 맞추려고 다가오자,
48. 예수님께서 그에게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9. 예수님 둘레에 있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 하고 말하였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5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52.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잡으러 온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단 말이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는 너희가 나에게 손을 뻗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
54.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끌고 대사제의 집으로 데려갔다.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뒤따라갔다.
55. 사람들이 안뜰 한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끼어 앉았다.
56. 그런데 어떤 하녀가 불 가에 앉은 베드로를 보고 그를 주의 깊게 살피면서 말하였다. “이이도 저 사람과 함께 있었어요.”
57. 그러자 베드로는 “이 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하고 부인하였다.
58. 얼마 뒤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 하였다.
59. 한 시간쯤 지났을 때에 또 다른 사람이, “이이도 갈릴래아 사람이니까 저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게 틀림없소.” 하고 주장하였다.
60.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하고 말하였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61.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62.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63. 예수님을 지키던 사람들은 그분을 매질하며 조롱하였다.
64. 또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65. 그들은 이 밖에도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많이 퍼부었다.
66. 날이 밝자 백성의 원로단, 곧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여 예수님을 최고 의회로 끌고 가서,
67. “당신이 메시아라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말하시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렇다고 말하여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고,
68.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69.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을’ 것이다.”
70. 그러자 모두 “그렇다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이오?”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러하다고 너희가 말하고 있다.” 하시자,
71. 그들이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언이 더 필요합니까? 제 입으로 말하는 것을 우리가 직접 들었으니 말입니다.”
1. 그리하여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2. 그리고 예수님을 고소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자가 우리 민족을 선동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막고 자신을 메시아 곧 임금이라고 말합니다.”
3.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그분께서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4. 빌라도가 수석 사제들과 군중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5. 그러나 그들은 완강히 주장하였다. “이자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유다 곳곳에서 백성을 가르치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6.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7.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8.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9.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11.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12.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
13.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과 백성을 불러 모아
14.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백성을 선동한다고 나에게 끌고 왔는데, 보다시피 내가 여러분 앞에서 신문해 보았지만, 이 사람에게서 여러분이 고소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15. 헤로데가 이 사람을 우리에게 돌려보낸 것을 보면 그도 찾지 못한 것이오. 보다시피 이 사람은 사형을 받아 마땅한 짓을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소.
16. 그러니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17)·18. 그러자 그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그자는 없애고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19. 바라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였다.
20.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어서 그들에게 다시 이야기하였지만,
21. 그들은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22. 빌라도가 세 번째로 그들에게, “도대체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목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소. 그래서 이 사람에게 매질이나 하고 풀어 주겠소.” 하자,
23. 그들이 큰 소리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다그치며 요구하는데, 그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24. 마침내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25. 그리하여 그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자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풀어 주고, 예수님은 그들의 뜻대로 하라고 넘겨주었다.
26.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
27. 백성의 큰 무리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28.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29. 보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배어 보지 못하고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여자는 행복하여라!’ 하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30. 그때에 사람들은 ‘산들에게 ′우리 위로 무너져 내려라.′ 하고 언덕들에게 ′우리를 덮어 다오.′ 할’ 것이다.
31.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
32. 그들은 다른 두 죄수도 처형하려고 예수님과 함께 끌고 갔다.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그분의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34.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다.
35.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
36.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37.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38.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하며 그분을 모독하였다.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42.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다.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44.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5.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46.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47.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48.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
49.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50.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회 의원이며 착하고 의로운 이였다.
51.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유다인들의 고을 아리마태아 출신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52.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였다.
53. 그리고 시신을 내려 아마포로 감싼 다음,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셨다. 그것은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무덤이었다.
54. 그날은 준비일이었는데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55.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온 여자들도 뒤따라가 무덤을 보고 또 예수님의 시신을 어떻게 모시는지 지켜보고 나서,
56.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쉬었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5년 4월 13일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
✚ 주님수난성지주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54
✚ 강론시작 15:41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
누군가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
오늘 수난기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바라보며 동정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느끼며 감사드립시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루카 23,4).
빌라도가 말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인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자 자신을 내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늘 그러하셨듯이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당신보다 우리를 더 생각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23,28).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백인대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죄와 죽음을 이기는 승리의 사건입니다. 가장 짙은 어둠의 순간을 은총으로 비추며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건너게 하는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희망을 품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승리를 믿으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오늘의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품도록, 주님께서 주신 생명에 감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계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겸손과 희생 그리고 구원의 승리에 감사드리며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의 구원이신 분? 나의 도움이신 분?
성지주일 복음만 읽으면 저는 제 오래전 그러니까 첫 미사 때 강론이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앞으로 저의 사제 생활이 어린 나귀의 삶이 되게 하겠노라고 말했지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을 보고서 어린 나귀가 혹시 자기를 보고 환호하는 줄 착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제 등에 태운 주님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저도 사람들이 저를 반기고 사랑해줄 때 제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 등에 태운 주님 때문에 그런 것이니 내가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주님을 태우기에는 힘도 경험도 없는 어린 나귀이니 겸손해야 한다고.
더욱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광 받으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수치스럽고 참혹한 형벌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서 주님이 들어가시는 것이니 그런 주님께 어울리는 어린 나귀여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과 떼어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인데 사람들은 자주 자기 좋을 대로 착각합니다.
오늘 입성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주님을 “호산나, 다윗의 후손”하며 찬양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호산나란 ‘구원하소서.’라는 뜻과 ‘만세’의 뜻이 같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니 구원해주시는 분 만세라고 환영함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구원이 그때도 지금도, 어제도 오늘도 늘 문제입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출하시어 다윗의 왕조를 재건하시는 분으로 착각하고 ‘만세’ 하며 환영하였는데 그러나 주님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고,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잖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시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착각은 우리 인간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저도 구원 착각을 자주 하는데 주님의 구원 사업에 함께하는 가운데서 자주 착각이란 것을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제가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합니다. 그런데 시작은 그런 마음으로 하지만 중간에 하느님 일이 제 일로 바뀌면서 제가 하느님 일의 도구가 아니라 자주 하느님이 제 일의 도움이 되십니다.
북한 사업을 할 때 처음에는 그저 인도적인 사업을 하다가 수도자가 그저 인도적인 사업만 해서 안 되지 않는가, 복음화 사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자각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평양에 종합 복지관 건립을 저와 형제들의 상주 조건으로 추진했는데 당연히 어려움이 많았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하느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일을 완전히 접었습니다.
그런데 한 보름 지나서 다시 타협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너무 기뻐 서둘러 경당으로 가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그때 감사하는 저를 보면서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하느님께 감사하는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진 것 때문에 감사하는가? 아니면 나의 뜻이 이루어져서 감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 사업이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고, 이것이 이루어지도록 내가 하느님 도구로 애쓴 것일 뿐이라면 하느님께서 내게 감사할 일이지 왜 내가 하느님께 감사하는가? 내 일을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어 감사하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성찰과 반성이 되면서 저는 또 하느님의 일을 제 일로 만들었음을 봤고, 저의 구원이시어야 할 하느님을 저의 도움이신 분으로 만들었음을 또 봤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의 일을 도와주러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를 빼내 저세상으로 데려가려고 오시어 당신 죽음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주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 나의 도움이신 분인지, 나의 구원이신 분인지 깊이 성찰하며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이 아니라 골고타를 향한 십자가 길을 가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주님 성지 주일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주님 성지 주일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주님 수난 주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영하는 상징적 행위로 성지가지를 축성하여 성당에 들고 들어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들었습니다.
오늘 <전례> 역시,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호하고 환영하던 행렬은 배척과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뀌고, 하늘높이 흔들던 영광과 축복의 성지가지는 저주와 모욕의 채찍으로 바뀝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바로 그들이, 이제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가고, 나귀위에 오르셨던 바로 그분은 이제 십자가 위에 매달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왕으로 성 안으로 모셔진 바로 그분이, 죄인으로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일을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미리 예언하고 있고,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찬미노래로 부릅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는 부활성야 때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은 우선 사랑을 거절한 까닭이 아닐 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까닭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아드님이 왔건만, 그 사랑도, 그분도 거절된 까닭이 아닐 까요! 결국,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고통 받으신 것이 아닐 까요! 그리고 오늘도 어쩌면, 당신 사랑이 나의 거절 때문에 고통 받고 있지는 않을 까요!
그렇지만, 당신의 사랑은 너무도 커서, 거절당해도 멈출 수가 없는 사랑인가 봅니다. 하도 커서, 배신을 당해도 그칠 수가 없는, ‘죽기까지’ 해도 다하지 못할 사랑인가 봅니다. 그렇게 사랑에는 자신을 죽이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인가 봅니다.
이처럼,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고,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루카 23,34)하고 간청하십니다.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끝까지 용서하시는 충실하시고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이렇게,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빚어진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거절 때문이지만, 실상 드러난 것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 ‘신실하시고 충실하신 사랑’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고통 받으셨고, 고통 받으면서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셨고, 상처 받으면서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니, 그런 사랑을 먹은 우리 또한 이미 받은 그 사랑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걸까요? 왜 예수님을 거절한 것일까요? 종교지도자들과 원로들은 왜 예수님을 반대한 걸까요? 왜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걸까요? 또 유다스와 베드로, 그분의 제자들은 왜 걸려 넘어진 걸까요?
그것은 그들이 작아져서 못해 섬기려 하지 않은 까닭이 아닐 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배와 권세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옥신각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감으로 자신을 내세우다 꾸중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옆자리를 요구하다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화를 내다가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작아져서 섬기려 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의 왕들과 기득권자들은 가진 자로서 권세와 횡포를 부리고, 지배하고 군림하고자 합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작은 자들에게서 빼앗고, 힘없는 이들을 때리고 억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것을 다스림의 기준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하십니다. 아버지를 섬기고, 제자들을 섬기고,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마저도 섬기십니다. 참으로, 작아지고 낮아져서 남을 섬기며,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종으로 자처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뒤따르는 우리의 삶도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호사스런 영광을 취하기보다, 작아져서 섬기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오늘, 혹 우리 역시 당시의 제자들처럼, 작아져서 섬기려하지 않으려다 자칫 예수님을 거절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사랑으로, 거부와 배척을 용서로 응답해 가며, 우리에 대한 충실하심과 신심하심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께 대한 의탁과 희망을 결코 저버리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참으로 그분의 충실과 신실하심이 그침이 없으시니, 우리는 그분 안에서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당신의 사랑를 찬미하며 경배합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23,34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
그 어떤 모든 일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이게 하소서.
그 어떤 저의 거절 때문이라도
드러난 것은
당신의 크신 사랑이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시고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그 사랑을
결코 잊지 말게 하소서.
상처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게 하소서.
죽기까지 그침이 없이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성장이란? 부모의 희생을 가슴에 새기는 과정
어떤 사람들은 회개가 잘 안된다고 말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잘 안 됩니다. 회개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내가 결심하는 것과 다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결과입니다. 잃어버린 양이 혼자 돌아갈 수 없고 목자가 와서 목에 메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희생이 양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목자의 희생입니다. 그 희생을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내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아무리 목자가 와도 그 상처가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면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관계의 준비가 안 된 사람입니다. 자라기를 원치 않는 피터 팬과 같습니다. 『피터 팬』은 제임스 매튜 배리(J.M. Barrie)의 유명한 동화로,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모험을 상징하는 캐릭터인 피터 팬이 중심이 됩니다. 피터팬은 ‘네버랜드’라는 환상적인 섬에서 살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누구도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피터는 자유롭고 모험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성장을 거부하며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기를 원합니다. 그는 모험을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피터는 웬디라는 여자아이와 두 동생을 데리고 네버랜드로 와서 함께 즐기자고 합니다. 그들은 네버랜드에서 자신들을 걱정하며 기다리는 엄마를 생각합니다. 웬디는 피터를 데리고 집으로 와서 엄마에게 소개해줍니다. 엄마는 피터도 키워주겠다고 하지만, 피터는 원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피터가 웬디를 찾아왔는데, 웬디는 벌써 어른이 되어 아기를 낳았습니다. 피터는 어른이 된 웬디에게 실망하여 웬디의 딸을 데리고 네버랜드로 갑니다. 그리고 그의 딸을 데리고 갑니다. 시간이 이렇게 흘러 다른 사람은 다 성장하지만, 피터만 영원히 어린이로 남는다는 동화입니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엄마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피터는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으로 산 작가의 모습입니다. 매튜 배리에게 어머니는 형만 좋아하고 자신은 사랑하지 않는 분처럼 보였고 그래서 어른이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부모와의 감정의 단절입니다. 부모의 아픔을 보기를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피터 팬의 공감의 결여로 초래한 자기 고립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것처럼 는 피터가 감정적으로 성장하고, 어른의 책임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피터는 그런 제안을 거부하며, 자유롭고 모험적인 삶을 고집합니다. 그는 어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런 삶에 대해 공감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어린아이로 남기를 고집하며, 감정적인 연결과 책임을 피하려 합니다.
인간의 성장은 공감 능력의 성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공감 능력은 부모의 감정을 느끼면서 시작됩니다. 아이가 자라서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와 같은 시를 쓸 수 있게 된다면 엄마처럼 성장한 것입니다. 부모의 자녀를 위한 희생은 결국 자녀가 부모의 감정을 공유하며 성장하게 만드는 사다리와 같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자녀는 부모의 수준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유튜브 ‘포크포크’에서 ‘가족을 위해 포르쉐를 포기한 새아빠’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데이브는 젊은 시절, 포르쉐 914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차였고, 젊은 날의 추억을 모두 함께 한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딸아이를 가진 미혼모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포르쉐를 끝내 포기하고 팔게 됩니다. 이 모습을 지켜봐 온 의붓딸 러셀은 성장하여 아빠에게 그 차를 다시 찾아주기로 합니다. 갖은 고생 끝에 그 차를 샀고 수리까지 해서 아빠에게 깜짝 선물로 선물한 것입니다.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버린 아버지는 오열을 합니다. 여기에서 진짜 성장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딸입니다. 딸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위해 흘린 피의 가치를 직접 느껴보았습니다. 그만큼 당시의 새아빠만큼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고통은 고통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제가 단식하며, 또 나의 것을 포기하며 신학교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면, 다 주셨다는 그분의 고통을 느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만나 그 아픔을 느껴야 회개가 됩니다. 내가 변화됩니다. 그것을 느끼려면 나도 그 고통에 동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통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우리가 일부러라도 느끼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하늘나라로 가는 사다리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지신 십자가를 나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질 때, 우리는 그분처럼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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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한 수도승이 우연히 길 구석에서 여자와 간음하는 수도승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수도승이 저럴 수가 있냐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소리를 지르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수도승과 여자가 아니라 한 무더기의 곡식더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자와 성적 관계를 하는 자기 환상을 곡식더미에 투사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뒤, 이 수도승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게 될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거울삼아 자기 자신을 다시금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먹으면서 점차 죄를 멀리하고 선을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남의 죄를 잘 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그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자기 관심사가 더 눈에 잘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에서 자기가 찾는 어떤 물건이 있으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그것만 보이지 않습니까? 저도 어느 집을 방문하게 되면, 제 눈에 제일 잘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나 성모상과 같은 성물일까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주로 책장에 있는 책만 보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관심사가 책에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죄가 그렇게 잘 보였던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관심사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남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죄 짓는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버리고, 선을 행하는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온 백성은 올리브 나뭇가지를 흔들며 길에 자기 옷을 깔고 그분을 환영합니다. 이 순간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이렇게 열렬하게 환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과 며칠 만에 180도 바뀌고 맙니다.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고함지르고 있으며, 침을 뱉고 발로 차면서 모욕하고 조롱합니다. 그들의 관심사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모욕과 조롱을 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입니다. 너무나 많은 죄를 짓고 있으며, 또 그 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그 죄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분이시지만, 죄로 가득 찬 상태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누군가의 죄가 보일 때, 자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간직해야 했습니다. 그때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고, 더 나아가 주님께 커다란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나에게 예의를 갖춘 시간이 모여 내 가치가 소중해지고 빛나는 것이구나
- 밀라논나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
거룩한 나뭇가지를 적시는 눈물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수난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십자가에서 만나는 거룩한 성주간입니다. 주님의 수난은 인간의 갈채(喝采)와 함께 시작됩니다.
오늘은 고발당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성주간의 첫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위선과 불충실을 결코 고발하지 않으십니다. 너무 쉽게 하느님께 등 돌리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수난의 구경꾼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이었습니다.
환영의 가지는 너무 빨리 하느님을 모욕하는 나쁜 손가락질로 바뀝니다. 나쁜 마음에만 몰두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하느님께서는 떠나지 않으십니다.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되는 우리들입니다. 무엇이 진정 사랑인지를 알게 됩니다.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며 수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십니다.
우리가 붙잡고 흔드는 것이 흔하디 흔한 나뭇가지만이 아니라 수난과 함께하는 소중한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주님께로 돌아가야할 주님의 수난입니다.
성주간은 수난을 통한 우리의 구원을 만나는 새롭고도 뜨거운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앞에 우리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이 길을 걷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수난입니다.
루카복음 22장 4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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